- 한인 예배 (2023년 12월 10일)
- 마태복음 25장 14-30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됩시다 -마25,14-30.docx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소위 달란트 비유라 불리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 말씀 중 하나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이 문장에는 주어가 빠져 있습니다. “무엇이 무엇과 같으니”라고 해야 하는데, 앞에 있어야 할 ‘무엇’이 빠져 있습니다.
그것을 찾으려면 1절로 가야 합니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는 말에 분명히 주어가 나옵니다. ‘천국’ 즉 ‘하늘나라’가 주어입니다.
이로써 본문 14절의 주어도 ‘천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달란트 비유를 통해 천국의 어떤 면을 말씀해주고자 하시는 걸까? 천국은 ‘맡김’이 있고 ‘결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은 먼 길을 떠나며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깁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돌아와 그들과 결산을 합니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르고 섬기는 우리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분의 종들인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습니다.
달란트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화폐단위였습니다. 한 달란트는 약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성인 남자의 하루 임금이었음을 감안할 때, 한 달란트는 한 사람이 20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하루 일당을 7만원 정도로 낮춰 잡아도, 한 달란트는 4억이 넘는 큰 돈입니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를 받은 세 번째 종 또한 결코 적게 받았다 말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어쨌든 종들이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5, 2, 1. 각기 달랐습니다.
이것은 주인이 각 종들의 능력과 역량을 고려한 결과였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라는 개역개정의 번역보다는 ‘각자의 능력을 따라’라는 공동번역의 번역이 ‘뒤나미스’라는 원어의 의미에 보다 충실한 번역이라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일을 맡겨도 거뜬히 감당할 역량이 되지만, 어떤 사람은 그보다 적은 일도 간신히 감당합니다.
주인은 각각의 종들이 가진 역량을 잘 알았고, 그에 맞게 적절한 양을 맡기고 떠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종들에게 맡기고 떠난 ‘달란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각 사람에게 맡겨진 책임이나 직분,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주인은 아무 목적 없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후에 주인은 그 받은 달란트로 종들이 무엇을 했나에 관심을 갖습니다.
또한 주인은 아무것도 없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 받은 달란트를 밑천 삼아 열심히 수고한 종들은 모두 놀라운 결과를 맛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달란트는 복음입니다. 은혜입니다. 생명입니다. 믿음입니다. 소망입니다. 사랑입니다. 또한 깨달음입니다. 자유입니다. 혹은 은사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들입니다.
하지만 또한 이 모든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 주님의 일에 필요한 자원으로 주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전해져야 합니다. 은혜는 나누어져야 하고, 사랑은 흘러가야 합니다.
은혜로운 부르심은 책임있는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것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봉사합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앞에 놓인 사명과 직분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선물들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지만, 모두가 같은 정도로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믿음의 크기가 같지 않습니다. 소망의 높이도, 사랑의 깊이도 똑같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정도도, 자유의 넓이도, 은사의 모양도 각기 다릅니다.
그에 따라 주어지는 책임의 무게, 직분의 형태도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의 역량을 따라 주님은 다르게 맡기실 것입니다. 어쩌면 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더 많이 맡겨질지 모릅니다(눅12:48). 그러나 주님의 일에 부름받은 종들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합니다.
다섯, 둘, 하나. 주님의 일에 뛰어드는 시작점에 이처럼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 사실 이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차이는 그 받은 것을 가지고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각자 어떻게 살았느냐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며, 그 차이는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결정적 차이가 될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결산할 때, 앞의 두 종은 주인에게 칭찬과 보상을 받습니다. 반면 세 번째 종은 책망을 받고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깁니다.
이 되돌릴 수 없는 결정적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입니까?
앞에 두 종은 주인의 일을 자기 일처럼 했습니다. 주인이 맡긴 것으로 주인을 대신해 주인의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뜻임을 이해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바로 갔습니다(16). 그 받은 것으로 열심히 수고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반면 세 번째 종은 주인의 뜻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주인의 소유를 축냈다는 이유로 후에 받을지 모를 추궁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그는 주인의 것과 자신의 것, 주인의 일과 자신의 일을 분리시키는 삶을 선택합니다. 이미 가진 걸 잃을까 두려워 모험을 거부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모험심의 차이, 배짱의 차이가 아닙니다. 사실 그 이면에 더 중요한 요인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종들의 인식, 그들이 주인을 어떤 이로 생각하고 있었나가 그것입니다.
돌아온 주인 앞에 세 번째 종이 나아와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4-25)
여기 “굳은 사람”이란 말은 엄한 사람, 냉혹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는 말은 씨를 심지도 않은 밭에서 소출을 내놓으라 요구하고 씨를 흩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결실을 모아오라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실제 그런 주인이 있다면 그는 악덕지주일 것입니다. 이 종은 자기 주인을 그런 존재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에, 본전이라도 잃지 않으려고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종의 말이 얼마나 진실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종의 말을 듣고 주인이 대답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26-27)
주인은 지금 이 종이 이자를 불려오지 않는 것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종의 말이 진실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종은 주인이 두려워서 그리 하였다 말하지만 실상 그는 주인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주인을 두려워 했다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라도 맡겨서 이자라도 들고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종의 문제는 주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가 말한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종이 주인에게 받은 칭찬과 두 번째 종이 주인에게 받은 칭찬이 같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주인은 그 사람의 상황이나 역량을 고려치 않고 무턱대고 대단한 성과를 요구하는 그런 무자비한 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 세 번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불렀습니다. 그가 ‘악한’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주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게을렀습니다. 주인의 뜻을 헤아리는 일에도, 주인의 소유를 불리는 일에도 그는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앞에 두 종은 주인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갖고 있었고, 주인이 그들에게 맡긴 것에 대해서도 바른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갔다’는 사실은 그들이 주인의 뜻을 이해했고, 따라서 거침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주인이 어떤 분인지 알았고, 따라서 그분을 경외했습니다. 참으로 주인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것은 그 세 번째 종이 아니라 이 두 종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반드시 돌아올 것을 알았고, 그 사이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충성된 삶을 산 것입니다.
돌아온 주인 앞에 나아가 그들은 말합니다: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20),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22) 주인과 기쁨을 공유하고 싶은 종들의 마음이 이 말들 속에 그대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이 말들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수고하여 더 남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가 누구의 소유인지, 주인의 소유인지 종의 소유인지 특정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일을 자기 일처럼 행해온 시간들 속에서 이미 그것은 중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들은 주인과 더 많은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 번째 종이 자신의 것과 주인의 것을 명확히 구분하려 했던 것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 아닙니까?
그 두 종에게 주인이 대답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23)
잘한 것에 대한 보상이 더 많은 일을 맡기는 거라니, 그게 무슨 보상인가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이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요 짐으로 인식될 때가 많은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드는 생각일 것입니다.
주님과 더 많은 일을 공유하며 주님의 즐거움에 더 많이 참여하며 살아가는 것, 분명 그것이 천국을 사는 주님의 종들에게,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에게 약속된 축복이요 특권일 것입니다.
주인은 그 두 종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부릅니다. 그들이 ‘착한’ 이유는 주인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실히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끝까지 충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삶의 태도요 모습일 것입니다.
5와 2와 1, 이 숫자의 차이는 사실 크지 않습니다. 2와 1의 차이는 더더욱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종과 세 번째 종이 살아간 삶의 차이,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결과의 차이는 실로 엄청납니다. 그것은 주인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른 인식이 각각 야기하는 차이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진 종들은 바른 삶을 살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유혹에도 끝까지 주님께 충성된 모습으로 살 것입니다. 그리고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님께 칭찬과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에 대해 바르지 못한 인식을 가진 종들은 바르지 못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런 삶의 길에서는 주님이 바라시는 좋은 열매가 맺히길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삶으로부터 소외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느냐가 우리 삶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안타깝고도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중요한 일에 힘과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고 깨달았다 생각하는 것인가요?
조각 조각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지식들이 계속해서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되며 나날이 깊어져가고 넓어져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바르게 알지 못하면 바르게 실천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겸손히 배우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4-26)
하나 지키려 하면 모두 잃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가 죽으면 많은 생명이 살 것이라는 역설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우리의 구원이 됨을 믿는 우리는 이제 이 말씀이 진리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들로서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훈합니다.
지금 내게 있는 것 잃는 게 두려워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 나를 온전히 의탁하고 주님께 받은 것으로 주님의 일에 봉사하며 살 것인가,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순 없습니다.
주신 말씀을 따라 착하고 충성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