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적인 교회

  • 한인 예배 (2002년 03월 10일)
  • 눅 9:43-50
  • 설교자: 이종실

02/03/10(사순절 넷째주일)
본문: 누가복음 9: 43-50
제목: 개방적인 교회

<공동기도>
이 세상에 교회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장벽을 넘어가신 주님처럼
세상의 장벽을 허무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쫒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설교>
오늘
네번째 사순절 주일을 우리들은 지키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들의 생각을 부활절로 향하게 합니다. 이 절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있는지 우리들은 생각해야만 합니다. 매년 사순절이 되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큰 주제의
흐름아래 언제나 약간의 다른 모티브를 가지고 매 주일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세상 속에서
교회의 모습과 위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지않지만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조그마한 신앙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본문 속에서  우리들은 교회와 관련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 우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여정의 마지막인 그리고 자신의 여정과 밀접하게 관련된 고난을 예고하고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필요와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리고 제자들은 이 말씀을 묻는 것 조차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들은 직접적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모습과 그 위치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지않습니다. 그 질문이 드러나고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
특별한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의미를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우리들은 자신들의 위치와 사명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사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오늘 우리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주제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이 자신의 말씀과 자신의 모든 사역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 하지 못한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들이 우리 교회 공동체의 과제와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삶과 그의 삶의 의미를 우리 각자와 모든 신자들의 삶
속에서 따르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논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분명히 그들의 논쟁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자신들의 혼돈을 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라미드 사회조직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자신의 말은 자신의 사명의
의미와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신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더구나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필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피라미드
사회조직의 최고봉을 차지하기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생각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셨습니다.”  생산성 있는 남성들만 인구수로 계산하던 당시의 풍습에서 생산성 없는 어린아이는 피라미드 사회조직의 가장 밑바닥 즉
가장 작은 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에큐메니칼 예배가 마친 후 체코교우들은 삼삼 오오 모여 저의
설교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다음날 들었습니다. 저의 설교가 선동적이라고 비판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연히 화요일에 교회에
온 체코교우들 몇 분들을 만나자 그 분들이 저의 주일 설교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체코교우들이 선동적이었다고 느낀 것은 기독교 문화의 차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설교가들의 설교와 체코 설교가들의 설교의
차이점을 조목 조목 들어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설교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였습니다. 성전 안에서 짐승을 팔고 환전을
하도록 허락한 대제사장의 일과 장사하는 사람들의 일은 모두 유월절과 교회를 위한 명분이었지만 교회를 위하는 그 관심의 동기와
모티브가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이었기에 예수님이 공분을 해서 그들을 성전에서 내어쫒았던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의 입장에서 성전
안에서 그 분이 하셔야 되는 일이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일들은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궁극적인 관심이 곧 자기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명분을 벗기고 보면 그 일을 하는 이유가 곧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관심과 우리들의 일이 동시에 우리 자신들을 형성시켜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개인의 삶은 교회 공동체의 삶에도 적용이 됩니다.

금 예수님은 우리들을 바르게 형성시킬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의 진정한 가치가 숨겨진 일을 우리들 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곁에 서있는 어린아이 입니다. 그래서 이 어린아이는 제자들의 생각과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됩니다.


수님이 교회의 모습과 그것을 발전 시키는 방법이 설명된 지침서를 우리들 손에 들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시각이
자신을 향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늘 회개하고 우리의 믿음의 근본과 뿌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방법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어린아이를 보면서 세상의 가치관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생각과
부끄러웠던 관심과 부끄러웠던 우리들의 가치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우리들의 희망은 우리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언제나 창조
주앞에 피조물인 우리들의 소속과 세상에 휩쓸려 있는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원점에 설수 있는 용기입니다.


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그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권면 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가장 연약한자 힘없는 자 도움이 필요한자 가장 작은 자를 상징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자를 영접하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 우리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가장 큰 지위와 사회의 위치를 하나님은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죄인과
연약한 자들을 바라보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들 가운데 우리들이 지금 원하고 바라고 우리들의 모범이 되는 그 교회 –
초대교회가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가장 연약한 것, 약한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들 위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교회가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찮고 나약한 이들의 희생 위에 교회가 서있다는 의미입니다.

래서 “너희 모든 사람 속에 가장 작은 이가 큰 자니라”라고 오늘 누가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약하고 작은 자들이 수모와 자기
고통을 봉헌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샘이 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말씀입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아름다운 교회는 그 아름다움 속에 하나님의 어린양과 동일시
되는 희생의 어린양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나약하고 작은자들이 교회의 존재 근거가 된다는 것은
동시에 교회가 교회 밖의 그들을 영접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둘 중의 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정지하는 법이
없습니다. 체코교회는 소수파로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봉사단체인 디아코니아를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는 법안이 통과된지
얼마되지않아 어제 신문에 문교부가 기독교학교에 대해 재정 지원중단을 정부에 요청하였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학교의 폐교를
의미합니다. 정부의 결정에 교회의 존립자체가 흔들릴 만큼 체코교회는 약하여 그들은 세상에 대해 위축이 되어 점점 폐쇄적인 모습을
갖게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해외에서 복잡한 인간관계에 피곤증을 느끼고, 점점 편안해 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과 단절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에 대해 개방적이 되거나 아니면 폐쇄되어 영적으로 시들어 버리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개방성을 갖는다는 의미를 오늘 본문 49절과 50절에서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49절과 50절에서 주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예수를 따르지 않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쫒는 데도 예수를 따르지 않기에 주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자들이 조처를 취한 이야기입니다. 주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처한 제자의 이유를 자세히 보면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
서 우리들은 폐쇄적인 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폐쇄적인 교회란 물리적으로 교회대문에 빗장을 걸어 잠근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워져 있고 거주하고 있는 세상으로, 밖으로 향하는 시각이 없는 교회가 폐쇄적인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갇혀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한 믿음 한 신앙고백 공동체의 좁은 테두리에 갇혀
살아서는 안됩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벽을 허물고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히려 벽을 세우는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과 삶의 나눔”이란 작은 제목으로 나눔터가 발행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목회를 시작하기 전부터 뜻 있는 젊은 분들과 시작한 일입니다. 같이 시작한 분들 가운데는 종교를 달리하는 분도 계셨고 종교가 없는 분도 계셨습니다.

분들은 믿음과 삶이란 이 용어에 거부감을 갖지않았습니다. 그 취지에 동의하고 다른 모든 것을 존중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과 목회를
시작하면서 나눔터 발간 비용을 교회에서 지출하자는 의견이 나오면서 교우들 가운데 나눔터에 믿음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니 그 부분을
더욱 강화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토론을 멈쳤습니다. 신앙이라는 울타리 안에다 교회의 일을 국한 시키는 것은 나눔터의 취지뿐 아니라 저의 목회 철학에도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작
년에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저희 교회를 방문할 때 함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마 한국에 대형교회 목회자들 모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김삼환 목사님이 불우한 소년 소녀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대형교회들이 힘을 모아 대규모 학사를 시내에
짓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다른 분들이 복음 전도하는 데 교회는 힘을 써야 된다고 반대를 해서 – 대형교회들이 그렇게 하면 복음의
열매를 우리들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다른 모든 한국 교회들이 다 거두게 된다고 설득을 한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우리 교회들은 전도를 좀 더 넓은 뜻으로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도는 세상을
살리는 일입니다. 세상을 살린다고 할 때 이는 사람들의 영혼만을 살린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는 사람들이 먹고 입고
일하고 놀고 살아가는 것 모든 것이 제대로 되도록 하는 것도 세상을 살리는 일에 들어갑니다. 우리교회가 교인 한 사람 더 늘어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이 체코사회에, 체코의 한인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더욱
안타깝고 부끄럽게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기독교인에게도 신앙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햇빛과 비를 고루 내려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인 우리들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복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일에 폭 넓게 관심을 갖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작은 자 안에 감추어진 신앙의
신비를 깨닫는 이 사순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작은 자 안에 감추어진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는 우리 교회가 되십시다. 나 자신 안에
우리 교회 안에 장벽을 부수고 마음의 터를 넓히는 이 사순절이 되십시다.
세상의 고통과 기쁨을 발견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습니다.

<설교 후 기도>

님의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태하고 게으르고 그리고 진실한 마음도 긴장감도 없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 서로가
서로를 밟고 서려는 병든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아첨하고 더 간사하고 더
악한 삶을 살다가 교회에 오면 신앙의 벽을 높이 쌓아 신앙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우리들의 이중성을 이 시간 고백합니다.
우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부터 하나님의 어린양과 같은 희생의 삶, 사랑의 삶, 관용의 삶,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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