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1918년 – 1989년
반 종교개혁이 오랫동안 16세기 체코 개혁자들 사이에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장애가 되었다. 1861년 종교개혁에 대한 칙령이 발표된 이후 체코 개혁 교도들에게 처음으로 외국 자매 교회들과의 접촉이 허용되었다. 외국의 개혁 교도들은 당시 자신들의 믿음의 체코 형제들과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영적으로 그들에게 회들과의 접촉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접촉은 목회자들의 연합 컨퍼런스에 지지를 보냈고 물질적으로 도왔다. 1821년부터 외국 대학인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개혁 신학부에서 체코 신학생들이 공부할 가능성이 열린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관계는 그러나 양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복잡한 국제 정치관계의 시기에 중단되었으나 후에 다시 재개 되었다.
개혁교회의 교인들은 올바른 에큐메니칼 협력은 체코 국내에서 작은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1905년 프라하에서 후스의 경험으로 “콘스탄츠(후스가 화형을 당한 스위스 국경을 접한 독일 도시)의 연대”라는 상징적인 이름 아래 1주년 체코 국제 종교개혁 단체가 설립되었다. 절대적인 로마 카톨릭 국가 안에서 종교개혁의 단체들이 성장하고 종교개혁의 소수파의 자의식과 그들의 사명이 강화되었다. 이 단체들이 오늘날 다시 많은 에큐메니칼적이고 영적이며 문화적인 활동들에 참여하고 있다. 주간지 “콘스탄츠의 불꽃”과 신학월간잡지 “크리스찬 리뷰”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슬로바키아 개혁 교회들과의 접촉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접촉은 목회자들의 연합 컨퍼런스를 더 발전시켜 계간지 “Theologia evagelica”(1948-1951)의 발간이 이루어졌다.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연합되기 이전부터 체코개혁교회는 “세계개혁교회연맹(당시 세계 장로교연맹)”의 회원교회가 되었으며 후에 연합교회로서 “세계 루터교회 연맹”과 “연합교회연맹”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는 기독교회 일치를 지향하는 활동에 참여 하였으며 특별히 1925년 스톡홀름(Stockholm)회의와 1927년 로잔(Lausanne)회의에 참여하였다. 1948년부터 세계교회협의회(WCC), 1959년부터 유럽교회회의의 회원교회가 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대표들은 1973년 로이엔베르크 콘코르디아(Concordia of Leuenberg) 준비와 활동 그리고 계속되는 신학토론에 참여하였다. 그때부터 해외의 개별 자매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단체들과의 교류가 성공적으로 확대되고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조직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에큐메니칼 협력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1954년 에반스톤의 2차 세계교회협의회 회의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에큐메니칼 교회 협의회를 조직하도록 자극하였다. 사회주의 사회의 어려운 환경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개혁 교도들은 개혁 교회의 신앙의 토대에서 세계의 사건에 대한 응답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세계평화의 주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1958년 프라하 기독교 평화회의가 조직되었으며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개혁교회는 동서유럽의 개혁교도들의 만남에 의해 폭 넓은 단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후에 전 세계에서 많은 교회들이 이 회의에 참여 하였다. 흐로마드까(J. H. Hromadka) 및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다른 중요한 인사들이 처음부터 기독교 평화 회의에 참여하였다. 1968년 소위 “프라하의 봄”의 정치개혁이 강제로 탄압된 이후 정치적으로 “정상화(normalizace, normalization)” 운동의 시기에 특별히 이 평화운동은 정부의 간섭과 이데올로기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소위 “제 3세계”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평화회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내에서 교회들 사이에 에큐메니칼 협력은 단지 정부기관의 감시 아래에 계속될 수 있었다. 에큐메니칼 교회협의회는 실제로 각 회원 교회들의 대표자로 구성된 협의체로서 존재하였다. 반면 에큐메니칼 교회협의회 몇몇 활동 위원회(특별히 성서와 에큐메니칼 연구를 위한 위원회, 기도 생활 실천위원회, 여성활동 위원회, 성서발전 위원회 – “성서 사역”)는 시들어가는 에큐메니칼 단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89년 말경 형식적인 에큐메니칼 사업은 “우리 역시 사회의 아픔을 외면했고 오랫동안 침묵했었다”는 교회협의회 마지막 회의 성명서로 폐지되었다. 새로운 에큐메니칼 사업은 지역 교회와 개 교회의 차원에서 실질적인 과제와 협력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교회들 사이의 형식적인 교리가 아니라 말씀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교회의 일치에 근거한 새로운 성서연구가 에큐메니칼 관계의 토대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성서의 권위의 관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이 형제로써 발견된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의미는 일치된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삶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일치된 확신 속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