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까지이르러/(27) 나의 목사 나의 친구 이지 슈토렉 (9)
이지 슈토렉은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목사였다. 체코형제교단의 소개로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그 무렵 그가 프라하에서 유일하게 슬램화 되어가던 프라하 4구역의 아파트 단지 교구 안에 있던 카톨릭 교회 그리고 감리교회에게 에큐메니칼 선교프로그램을 제안하여 모임을 시작했을 때였다.
그러나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그 지역 교회 목회자가 자신의 교구에서 활동하는 같은 교단의 이지 슈토렉 목사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계속 갈등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갈등이 다른 교단과 교회의 사람들 보기 민망해서 내가 직접 나서서 한번은 이지 슈토렉 목사에게 프라하 4구역에서의 활동에 손을 떼고 프라하 8 꼬빌리시 지역에서 활동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때는 이미 나의 가족이 이지 슈토렉 목사가 시무하는 꼬빌리시 교회의 교인으로 출석을 하며 그를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우리는 체코교회의 사명과 선교적 과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교육 봉사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교회의 중요한 과제로 이해를 하고 있지만 체코교회는 구조적으로 이 교회의 과제들이 분리되어 있다. 예배와 교육과 성도의 교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선교와 봉사는 교회와는 분리되어 있는 교회의 사회봉사 기관인 “디아코니아”에서 진행된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분리된 데에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상황이 있었고 그리고 그에 대한 신학적 응답의 결과였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의 독특한 관계로 “디아코니아”가 체코 국내의 많은 인도주의적인 사회봉사 기관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이 되면서 구조적으로 “디아코니아”가 감당해야 될 교회의 선교와 봉사의 역할이 교회 공동체와 상호작용을 할 수 없게 된 문제점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체코교회의 문제점을 이지 슈토렉과 나는 공감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중풍병자 이야기에 주목하게 되었다. 교회의 디아코니아의 활동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가리워진 상황이 바로 체코교회의 현실이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진지한 디아코니아 실천이 오늘 체코교회의 문제의 해결임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네 친구가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까지 운반을 하였듯이 디아코니아 실천은 단지 봉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만찬의 식탁에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체코교회의 문제에 대한 공감과 성경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지 슈토렉과 나는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에서 체코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 댜블리쩨 디아코니아 활동 그리고 꼬빌리시 교회의 교구 안에 있는 8백명의 환자와 천여명의 의사와 직원이 거주하는 한 마을 같은 보흐니쩨 정신병원을 향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활동들은 날마다 발전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들인 꼬빌리시의 한국 교우들에게 “여러분들은 우리 체코교회의 천사들입니다. 이곳은 여러분들의 집입니다. 이 교회를 지켜주십시오. 다른 곳으로 떠나지 마십시오.” 마지막 말을 남기고 2003년 6월 28일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 6년 그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그에게 목회와 목회자의 삶과 개혁교회와 그 신앙을 배웠고 그리고 췌장암과의 일년 반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면서 일상생활의 리듬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흐트러트리지 않던 그로부터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크게 배운 시간이었다.
“이 목사, 의사 선생님이 이제부터 내 인생이 이전 보다 더 좋아진대.” 중요한 내장 기관에 퍼진 암을 떼어낼 수 없어 그대로 봉합을 하고 퇴원한 후에 평상시처럼 입가에 싱글벙글 웃음을 띄며 나에게 한 그의 농담이었다. 그의 농담은 앞으로 남은 짧은 자신의 인생의 기간이 이전 보다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질병이 그의 육신을 죽어가게 하였지만 그의 일상생활과 그의 마음과 정신은 더 생동감을 느꼈다. 언제 부턴가 그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는 욥의 고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설교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의 눈으로 이해한 성서의 깊이에서 흘러나왔다.
팔 다리의 모든 근육이 풀어져 걷거나 설 수 없게 되자 그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마지막 순간까지 휠체어에 앉아 설교를 하고 성만찬을 집례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이었던 월요일 6월 23일 그는 당회에 참석하여 세시간이 넘게 중요한 일들을 마무리하였다. 마지막 안건으로 그는 당회에 교회 정원을 담장처럼 둘러싸고 세월질 납골당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요청하여 당회는 그것을 결정하였다. 당회를 마치고 저녁 10시가 훌쩍 넘어 분주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사를 나눌 때 그는 내게 해맑은 미소를 띄며 “나는 고향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 보다 한국형제 자매들이 있는 이곳에 남고 싶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