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갈 길

  • 연합 예배 (2004년 03월 07일)
  • 눅 13:31-35
  • 설교자: 드로빅

<본문>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복음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해 조금은 의심을 하게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헤롯에 대해 경고를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고가 좀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복음서 다른 곳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논쟁을 한 사람들이며 예수를 도와주는 친절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논쟁하질 않고 그를 쫓아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준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을 쫓아내려고 합니다.

예상되는 헤롯의 위협을 예수님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헤롯을 쓸모없는 인간의 의미로 여우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최강의 동물이며 헤롯을 임명한 로마 권력의 상징인 사자와 구별됩니다.

예수님의 유머가 돋보입니다.

예수님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떠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가지고온 소식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헤롯에게 예수가 한말을 일러바칩니다.

분명히 헤롯의 권위를 무시하였다고 일러바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갑니다.

스스로 준비한 길을 갑니다.

그것을 이룰 자신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길에 초청을 받습니다.

우리들이 이 길을 이해할 것을 요청 받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에게 이 길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 길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스스로 악의 길을 피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생각과 마음이 치유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예수를 취하는 우리임을 고백하십시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목적대로 되지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을 우리들이 실패할 때, 우리들은 길을 잃습니다

아니면 그의 길을 모양만 본뜨게 됩니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 모든 경우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누가복음에서 이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주 의식적으로

예수님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어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지 잘못된 재판과 정의롭지 못한 판결의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쉬운 길이었으며, 인간으로서 내적 투쟁과 심각한 질문과 의심에 대한 대답을 찾을 필요도 없었던 그런 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의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다른 통치자에 대한 신뢰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신뢰, 그의 사명에 대한 신뢰의 결과가 죽음까지 걸어가야 했던 그의 길이었습니다.

그를 기다렸던 불행한 종말은 헤롯에 달려있었고 갈릴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극장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보는 “영화의 끝”이란 자막글자 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이 완성한 그 길로 나아가길 원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그길을 걸어가야 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디론가 인도하시는 길

우리 개인뿐 아니라 우리 모든 공동체를 인도하시는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꼭두각시 인형들이 아닙니다.

미리 결정된 대로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해 오늘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이와 같이 “아니오”하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라 말하는 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면 그에 뒤따르는 행동과 결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사람들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의 “아니오”때문에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좌지우지 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거하시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현존안에 살 수 있도록 하기위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길을 완성하셨고 악에 굴복하지 않으셨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않으셨으며 그러나 홀로 계시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안에 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 오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의 영광 안에서 종려주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축복의 왕이여 호산나” 찬양을 하였던 그들과 연합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들의 헤롯들의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며 그의 길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내일 모래 우리의 길에 고통과 죽음과 내적 갈등과 의심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연약한 믿음과 의심으로 뒤덮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에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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