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3년 02월 16일)
- 행 13:13-43
- 설교자: 이종실
030216
사도행전 13장 13-43절
바울의 선교
<본문>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2 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설교>
사도 바울은 살아 생전에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구브로, 바보, 버가와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거쳐 다시 처음 출발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여정가운데 있었던 전도여행입니다.
개역성경에 구브로라는 섬은 오늘날 키프러스 섬을 말합니다.
키프러스 섬에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살고있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직함은 총독이었습니다.
총독은 그 당시 로마로부터 지역통치를 위임 받은 사람입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이 사도 바울을 만나 회심을 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키프러스는 기독교인에 의해 통치된 첫번째 지역으로 역사에 기록되고있습니다.
총독의 회심으로 키프러스에서 이제 막 생겨난 어린교회는 박해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았고 그래서 복음을 넓게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일행은 날마다 성장해 가는 키프러스의 교회를 뒤로하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의 남쪽해안(지금의 터어키 남쪽해안)으로 건너와 거기서 육로를 이용해서 버가로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버가에서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산을 넘어 내륙을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곧장 안디옥에 도착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도착한 14절의 안디옥과 1절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안수하여 전도여행을 떠나보낸 교회가 있던 안디옥은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다른 도시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비시디아의 안디옥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 일행은 키프러스의 경우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러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빈 자리에 앉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혼란을 겪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던 그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이에 유대교 회당과 유대 기독교인들의 신앙공동체와 이방 기독교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혼재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경계선을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선교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사도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일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는 자기 종교, 자기 교파를 위해 절대 맹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새 역사의 증인이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찾아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렸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교회들간의 경쟁과 교파교회로 분열되는 유럽의 한인교회들의 경험은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의 동기와 목표가 진심으로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회당을 찾아가 안식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평상시 대로 예식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예배의 첫번째 순서는 신앙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으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이스라엘인들의 신앙고백을 쉐마라고 합니다.
신앙고백이 끝나면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을 큰 소리로 낭독합니다.
그리고 성경낭독이 끝나면 유대 남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권면의 말씀을 하도록 부탁을 받게 됩니다.
오늘 예배의 권면의 말씀을 위해 회당장은 바울 일행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특별히 바울과 바나바가 여행객으로 낯선 사람들이어서 랍비의 눈에 띄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서 온 여행객 바울에게 오늘 예배의 권면의 말씀을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의 회당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새 역사에 대해 증언할 기회를 갖게된 것입니다.
바울의 증언의 내용은 16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러분, 나의 말을 들으십시오.”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예배에 참석한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라고 불렀고,
안식일을 지키지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러분”하고 불러 참석자 모두를 설교에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바울이 예배 드린 유대인의 회당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민족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민족이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들을 큰 민족으로 높여 주시고,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17절)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를 감동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출애굽, 사사시대, 왕국시대와 다윗의 왕 즉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 역사가 지금 설교를 듣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차별과 소외감을 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역사는 무엇보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도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 만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상관이 없는 그의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거론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구주를 세워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으니, 그가 곧 예수입니다.”(23절)
이 한 줄의 말씀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싶은 두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자가 이미 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청중인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성경의 상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그들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끄셨고 어떻게 구원의 역사의 한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는지 설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포함하는 구약의 말씀은 물론이거니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와 더불어 나사렛 예수가 오실 메시야였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들은 분명히 이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27절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말도 깨닫지 못해서, 그를 정죄함으로써, 예언자들의 말을 그대로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 일상생활처럼 된 유대인들이 그 말씀을 지나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자들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완전히 반대로 말했습니다.
그가 메시아였기에 그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선교는 선교의 대상을 믿는 우리 자신들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해 하나님을 늘 배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뽑혀서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일을 그렇게도 많이 겪어본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된 메시아를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생겨난 교회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를 예로 그것을 우리들에게 적용시켜 설명해 본다면, 오늘 하나님께 먼저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아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잘 알고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는 기독교회들과
기독교인들로 이해를 해도 틀리지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존적인 질문을 스스로 해야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있는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책임을 맡은 사도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일꾼입니까?
아니면, 그러 한 종, 일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죄인들입니까?
아니면, 어떨 때 는 이렇고 어떨 때는 저런 사람들입니까?
우리들은 이중적이고 모순된 실존으로 살아갑니다.
늘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그러한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있습니다.
오늘 본문 38-39절에서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어떤 일에 있어서도 결코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를 힘입어서 의롭게 됩니다.” 라고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증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자기 자신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실존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죄인 가운데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시고 신실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자기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발견과 동시에 다가온 이 두가지 새로운 깨달음은 그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가 생명을 구원하는 사도로 바뀌어 졌습니다.
자기 종파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율법으로 자기 의를 구축하는 삶이 은혜 안에서 그 은혜에 응답해 가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가 지금까지 쌓았던 세상의 지식과 경험과 지위와 명예를 배설물로 여기고 오히려 자신의 깨어지기 쉬운 이중적이고 모순된 자신의 연약함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오히려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 받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음을 날마다 체험해갔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에서 예배 참석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호칭에 변화가 있음을 여러분들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 여러분”이라고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구분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를 힘입어 의롭게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죽었고 죄 용서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오직 믿는 사람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죄 용서로 구원 받았고 죄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모세의 율법으로 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차별이 더 이상 중요성이 없어졌습니다.
오직 우리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한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 믿음의 문제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믿고 그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은 곧 그 은혜에 대해 응답하는 삶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믿음으로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오늘 본문 41절에서 하바국 1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고 망하여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할 터인데, 그 일을 누가 너희에게 말하여 줄지라도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않을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41절)
태양이 비치지만 빛을 거부하고 문을 닫고있으면 우리들에게 어둠만이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게 되고 스스로 빛이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은 참된 행복과 삶의 충족감을 맛보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실존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않는 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배 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43절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은 은혜를 간직하고 붙잡으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이 기독교인으로서 오고 가는 짧은 만남 속에 교회로 모이는 그 만남 자체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교회로 모이면서 세상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