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프라하의 한국인들을 사랑한
나의 친구 나의 목사
이지 슈토렉을 하나님곁으로 떠나보내며
1994년 2월 설교자가 없어 중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프라하 한인교회 교인 자녀들이 푹 머리 숙이고 카세트 녹음기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던 모습에 해외에서 절대 한인교회 목회는 하지않겠다던 나의 다짐이 무너졌다. 1년이 넘도록 자신들의 목회자를 찾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체코교회로 파송하는 마음으로 보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사실상 이제 교회를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었다.
단지 설교를 하였지만 설교자에게 교인에 대한 신앙적인 보살핌은 자연스럽게 설교와 함께 수반되는 일이다. 체코에 좀 더 깊이 뿌리를 내리려는 조급한 마음으로 그때부터 언어를 익히는 일과 체코교회를 출석하며 교회를 이해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때 체코교회에서 두 사람의 목회자와 한 사람의 평신도와 깊은 교제를 하였다. 그들은 내가 체코교회를 이해하는 관문이 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지 슈토렉 목사였다.
현재 필자가 소속되어 일하는 체코형제개혁교단의 해외교회협력부의 책임자가 선교적인 활동이 가장 왕성한 교단의 대표적인 목회자로 추천을 하여 그와 처음 만난 것이 1995년 가을 무렵 프라하 4지역의 이쥬니 므녜스또에서 열린 주일 저녁 예배였다. 프라하 지역에서 유일하게 슬럼화가 되어가는 프라하 4지역의 이쥬니 므녜스또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감리교회 침례교회 체코형제개혁교회 그리고 카톨릭교회 기독교인들이 연합해서 예배를 드리며 서로 일치하여 자신의 지역을 복음으로 섬기는 선교활동을 하고있었다. 이 에큐메니칼 선교활동의 주창자가 바로 이지 슈토렉 목사였다.
몇 차례 그 예배와 활동에 참석하면서 그를 더 깊이 알게되었다. 카톨릭과 개혁파들 사이의 오랜 종교전쟁으로 분열된 체코 교회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무신론적인 사회에 가까이 가려는 그의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종교적인 도움을 배척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관리하는 수용환자 800명, 의사 직원이 천명이 넘는 대단지 마을을 이루고 있는 프라하 8지역에 있는 보흐니쩨 정신병원과 지역 목회자로서 깊은 신뢰를 형성하여 병원에서 임명한 환자상담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그는 지역사회에 눈에 보이지않게 무신론적인 사회분위기와 기독교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무는 일들을 하고있었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세우는 그의 활동은 역설적이게도 오랫동안 생존을 지상과제로 삼은 소수파 체코개혁 기독교회가 스스로 사회를 향해 쌓아놓았던 벽과 동시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체코교회의 문제를 안팍으로 직시하고 있던 그에게 서로 다른 민족의 기독교회들과의 일치와 연대에 대한 필요성과 그 중요성에 대한 나의 설명이 그리 어렵지않게 이해되었다. 당시 나는 찰스대학의 개혁신학부 박사과정을 하면서 체코형제개혁교단에서 체코교회의 경험과 한국교회의 경험을 상호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프라하 8지역의 꼬빌리시 교회의 담임인 이지 슈토렉 목사와 이웃하고 있는 프라하 7지역의 프라하 연합한인교회(이전 프라하 한인교회) 담임인 오형석 목사에게 두 교회가 한 달에 한번 연합예배를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양쪽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각각 당회와 제직회에 의견을 물어보기로 하였다.
이 제안을 계기로 이지 슈토렉 목사는 체코의 한국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한번은 대우 아비아의 직원의 자녀가 어려운 질병에 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질병 때문에 의료보험 연장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이지 슈토렉 목사는 자기 일처럼 나섰다. 의료보험회사의 책임 있는 사람을 만나 그 자녀를 위해 보험회사가 마련한 특별기금으로 보험처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정을 이끌어 내기까지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그 자녀의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더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단 이 일 만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체코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함께 아파하고 그리고 힘써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그는 언제나 노력하였다.
그는 췌장암이란 판정을 1년 반 전에 받고 금년 6월 28일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년 반 동안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그 시간들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크게 배운 시간이었다. “이 목사, 의사 선생님이 이제부터 내 인생이 이전 보다 더 좋아진대.” 중요한 내장 기관에 퍼진 암을 떼어낼 수 없어 그대로 봉합을 하고 나온 후에 한 그의 농담이었다. 영문을 모른 나는 수술이 잘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 내 인생은 이전 보다 질적으로 훨씬 좋게 될거야.” 매주 월요일마다 검사를 받고 화요일마다 항암치료를 반복하였다. 항암치료로 힘이 들면 쓰러져 누웠다가 다시 한 줌의 힘이라도 생기면 일어나 목회 일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그에게 이전과 다른 일상생활이 있다면 병원에서 치료 받는 일이었다. 질병이 그의 육신을 죽어가게 하였지만 그의 일상생활과 그의 마음과 정신은 더 생동감을 느꼈다. 언제 부턴가 그는 욥기 42장 5절에 나오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는 욥의 고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설교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의 눈으로 이해한 성서의 깊이에서 흘러나왔다. 때로는 마치 누설된 천기를 듣는 것과 같아 전신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언제부턴가 팔 다리의 모든 근육이 풀어져 걷거나 설 수 없게 되어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설교를 하고 성만찬을 집례하고 세상을 떠나기 한달 전 사랑하는 막내딸의 결혼식을 집례하였다. 이미 자신의 시간을 예상한 듯 6월 29일 마지막 주일날로 예정된 결혼식을 한달 앞당긴 것이다. 그 날 결혼식을 마치고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한국인 교우들이 모인 곳을 찾아왔다. 결혼식 때문에 늦어진 예배시간을 사과하였고 딸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언과 같은 몇 마디를 자신의 한국교우들에게 남겼다. “여러분들은 우리 체코교회의 천사들입니다. 이곳은 여러분들의집입니다. 이 교회를 지켜주십시오. 다른 곳으로 떠나지 마십시오.” 세상을 떠난 그 주간 월요일 6월 23일 그는 당회에 참석하여 세시간이 넘게 중요한 일들을 마무리하였다. 마지막으로 당회에 교회 정원에 생길 납골당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안건으로 내어 당회는 그것을 결정하였다. 7월 첫째 주 체코 한국 연합예배 준비를 위해 그와 내가 만난 6월 25일이 마지막 이었다. 그 날 그는 “나는 고향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 보다 한국형제 자매들이 있는 이곳에 남고싶다.”고 하였다.
다음날 그는 숨찬 목소리로 전화를 하였다. 아무래도 7월 첫째주 설교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일단 그 예배를 이번에는 취소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다시 의논하자고 하였다. 그 다음날 그에게 손님이 있어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그의 방에서 나왔다. 그의 목회자요 선생님이었던 분이 방문을 하였다. 그는 그에게 축복기도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날 잠이 든 후 다음날 아침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장례절차를 모두 유언으로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6월 28일 토요일 오전 8시 숨을 거둔 직후 하늘과 땅을 소통하는 야곱의 사다리처럼 세상을 섬기는 그와 우리의 꼬빌리시 교회의 상징인 사다리 탑의 종(* 종 제작은 비뜨 성당의 종을 관리하는 체코의 유명한 종 제작 가문의 마노우쉑이 하였으며 이지 슈토렉 목사는 그 종을 <천사>로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이 종탑과 종은 한국 형제 자매의 헌금으로 세워졌다.)을 오랫동안 크게 울렸다. 천사의 종소리는 밀납처럼 누워있는 그의 침대 위로 평화롭게 그리고 나의 두 눈의 눈물로 흘러내렸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2003년 9월호 제31호 나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