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이후의 고통과 하나님의 통치

  • 연합 예배 (2002년 01월 06일)
  • 마 2:13-23
  • 설교자: 슈테판

스물다섯번째 에큐메니칼 예배
주현주일
본문:마 2:13-23
제목:성탄이후의 고통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대강절에 성탄일 다음으로 중요한 주일로서 민속적으로 세분 왕 으로 불리우는 주현주일로 우리들이 함께 지킵니다. 세분 왕 이야기로부터 저는 오늘 두번째 의식 절차인 거룩한 가정의 애굽 피난을 본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밤중에 서둘러 피난하고, 헤롯이 분노하고, 베들레헴 어린이들의 피가 흐르고,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어머니들의 절규와 신분을 숨긴채
애굽에서 체류하는 가족… 이러한 이야기들이 성탄절의 말씀입니까? 그러나 교회는 성탄절의 중간에 첫번째 순교자 스테반 집사를
회상하고 „유아 살해“를 기억하는 이유를 잘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평화와 기쁨의 그리고 가정의 날로,
슬프고 희망이 없는 잿빛 날들의 중심에 몇몇 아름다운 날들이 작은 섬으로 성탄을 이해하는 오늘 그렇습니다. 정말로 오늘은
우리들에게 성탄의 행복에 힘든 현실을 밀어넣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성탄의 빛을 우리 자신들에게 비추기 위해서도 아니며 더구나
오늘 사람들이 성탄과 연결하는 작은 좋은 것의 기쁨을 우리들이 세상에서 부패 시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기쁨과 평화는
세상으로부터 성탄이 정당한 것임을 인정 받는 내용을 창조합니다.

성탄은 하늘에서 뿐 아니라 땅에서도 기쁨과 평화가
됩니다; 승리한 교회에서 뿐 아니라 투쟁하는 교회에서 역시 기쁨과 평화가 됩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 뿐 아니라 현재에도 기쁨과
평화가 됩니다. 우리의 성탄절들은 상당히 이 땅의 삶과 관련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들레헴 한밤중에 하나님은 하늘을
찢으셨고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자신의 영광을 비추셨으나, 우리들에게 탄생한 아들은 기쁨도 없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빛은 죄와 죽음의 어두움을 비추고, 그의 탄생은 “기쁨과 소망“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빛의
오심은 어두움이 모든 여력을 모아 절망적인 반격을 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천사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 유아 살해의 위험을 알립니다. 동방 박사들에게 속임을 당한 헤롯이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게되고 자신의 목적을 수행한 어떠한
방법도 철회하지 않습니다. 자리를 차지한 그는, 더 잘 설명하면, 로마를 협력하는 대가로 유대왕의 왕위를 차지한 그는 약속된 다윗
왕국의 길에 자신의 위치를 세우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 스스로 메시야 시대에 모든 민족을 준비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그를 선택하였던 부르심이 모든 전선에서 방해받았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는 보호를 받습니다. 구약의 말씀대로
그의 하늘 아버지의 거대한 손이 그를 깨웁니다. 아기와 어머니의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요셉과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명령에 순복합니다.

거칠게 이는 인간의 죄의 파도가 들이치는 것을 원치않으시는 하나님이 마귀의 격랑에
자신의 첫아들을 보호할 하나의 댐을 건설하십니다. 그래서 거룩한 가정은 한 밤중에 몰래 급하게 피난을 떠납니다. 이름이 알려진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않은 화가들이 이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낯선 외국 어느 지방 한 밤중에 요셉이 끄는 나귀 위에서 아기를 팔에
안고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왕위를 찬탈하는 자를 피하는 유대 왕; 꼭두각시 왕을 피해 도망가는 진짜 왕; 과거에 속한 사람 앞에서 미래에 속한 사람; 힘없는 아이 – 우리가

망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러나 절대권력자를 피해가는;  죄에 죄를 쌓는 범죄를 피해 도망가는 죄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자(시 2:1-2)를 대적하는 계획을 하는 세상의 왕들과 무신론자들의 계획을 방해합니다.

이스라엘과
선택받은 민족의 모든 구약시대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이방의 나라 애굽으로 도망하고 있습니다. 7년간의 기근을 피해 열한명의
야곱의 아들들이 형제 요셉을 찾아 애굽으로 갔습니다; 노예의 땅 애굽에서 모세가 민족을 약속의 땅, 자유의 땅,  예언자
이사야가 애굽인들이 여호와를 경배하는 꿈을 꾼 그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애굽에서 유대의 왕은 피난민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장 11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을 자가 없느니라“(눅 4장 24절)
이 모든 것을 성인 남자가 겪는 것이아니라 아직 어린아기, 피난민 아기가 겪어야만 했던것입니다.


롯의 유아살해 작전은 죄의 모습이며 모든 무기를 드는 마지막 전쟁으로 치닫는 모습이며 문명사회의 모든 전쟁들이 밟아왔던 마지막
전쟁으로 치닫는 모습입니다.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살까지 사내아이“ 단지 예수와 같은 나이, 거주지 그리고 성
때문에 죄가되어 목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P Brueghel의 커다란 그림을 혹시 보신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겨울 시골풍경을 배경으로 헤롯의 군대들이 기웃거리며 자신들의 희생물을 찾고있고 모든 것은 혼란스러워지고 불탄자리 눈물 피가
강이되어 흐르고 고요하고 모두 잠든 조그마한 마을 베들레헴을 악이 달려들고 파괴된자리 눈물 비명 두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은
고통스러운 모습 맹세 반항 그리고 좌절이 담겨있는 그림입니다. 전쟁에서 모든 것이 일어났던 것을 느낄 수 있는 악들의 격렬하고
광신적인 잔인성 – 악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그 잔인성입니다.

베들레헴의 죄없는 아기들 이때 죄없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죄없는 아기들은 포악한 통치자에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포악한 통치자는 베들레헴의
예수를 깨우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에 비해 더 힘이 없습니다. 헤롯의 잔인성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잔인성에 대해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 보다 암퇘지가 되는 것이 낫다 라고 잔인하게 희화화 시켰습니다. – 피흘리는 궁전의 혁명을
공격하였다.

계몽주의 시대는 베들레헴의 유아학살에 세번째 제국(히틀러 통치시대)의 수용소에서 유대의 대량학살
희생자들이 된 그 숫자를 알 수 없는 유대 어린이에 비유한 쇼킹한 코멘트를 첨부하였습니다. 오늘 유대 어머니들은 모세의 그리고
예수의 백성들에 속하기 전에 다른 어떤 죄도 없는 자신의 아기들을 잃어버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회당을 공격한
것이 교회를 공격한 것이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중한 죄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유대인의 별을 달고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한 편이 되어 그들을 돕지 못한 중한 죄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어떤 헤롯의 코멘트가 있습니까?

스라엘 군대가 성탄 전야의 성경의 베들레헴의 한 밤의 고요함을 지켰습니다.(지켰어야 했습니까?) – 통역자주: 최근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금번 성탄절에 팔레스틴의 테러를 염려해서 군대를 주둔시킨 최근의 뉴스를 두고한말.


귀에 끌려가는 인간이 저질러 놓은 모든 것에 대해 인간의 고통과 인간의 놀람들은 성경에 묘사되어있습니다. 시편에서 예언서에서
울부짖는 욥에게서 그리고 예레미야의 눈물에서 나옵니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왜 악인가? 이 질문에 대해 설명하거나 이유를 대는 
대답이 없습니다. 특별히 여기에 인간의 악의 표현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며 단지 동방 박사들이 헤롯에게 하늘에 대해
속이지않았습니다. 특별히 이빨로 깨기에 너무 딱딱한 마귀가 이끄는 그 악이 헤롯을 속였습니다. 하나님은 헤롯의 기다란 팔이
예수에게 다다르게 하지않았습니다.

그리고 폭군은 단지 제한된 시간을 통치할 것이며 그의 통치는 노예가 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만을 남겨둔다는 한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헤롯은 죽을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옥에 갔다고 우리들은 말하고
싶지않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의 예를 위해 그를 십자가에 죽인 사람들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용서하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를 살해하려고 시도하지않을 다른 통치자들이 헤롯의 뒤를 이을것이며 별로 그리고 박사들로 혼돈스러웠던 것을
오늘 더욱 신선한 새로운 것을 위해 잊어버립니다. 어머니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는 자신이 어른으로 성장하고 „마귀의 일을
멸하는“(요일 3장 8절)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는 곳 갈릴리 나사렛 집으로 돌아올 수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을 조금도 막지 못한다는 커다란 희망을 찾읍시다.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이해가 안된다고
할지라도; 작년 9월부터 핵무기로 위협하는 새로운 시대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전지구적으로 위협받는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음을
다시 알게되었습니다.

모든 고통이 지금까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계속 밀폐된 벽이 남한과 북한을 나누고 있고, 아프칸 난민의 어린이들이 기아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고통은 마귀의 마지막 행진임을 우리들은 믿어야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미래는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던“(요 1장 5절) 빛에 속해있습니다. 이 성탄의 복음의 빛 안에서
다가오는 주님의 새해 2002년을 바라 보아야 하고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 오늘 설교하신 슈테판 목사님은 찰스대학 개혁신학부 조직신학 교수이며 꼬빌리시 교회 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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