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3년 04월 27일)
- 출 12:21-23
- 설교자: 이종실
030427 (부활절후 첫째주일)
출애굽기 12:21-23
유월절
<본문>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4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25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26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28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설교>
지난주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소명을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 애굽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놓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전했을 때 바로는 모세의 말을 듣지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재앙을 하나씩 하나씩 내리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부터 해방을 시키도록 압박을 가합니다.
결국 10번의 재앙 끝에 바로는 그들을 해방시킵니다.
이 이야기가 12장까지 이어집니다.
아주 유치해 보이는 출애굽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당혹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근거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무고한 애굽사람들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시는가?
출애굽 8장에 파리떼 재앙을 내리실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출 8장)
무슨 근거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백성이라고 구별하시는가?
하나님은 인종 차별자이신가? 아니면 민족 차별자이신가?
애굽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차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편드시는가?
무엇보다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않게한 원인제공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가 고집을 부린 것이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언급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함정을 파고 그 함정 속으로 바로가 들어가도록 등을 떠밀고 애굽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셨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가치가 있어 하나님은 애굽사람들에 그토록 잔인하신가?
우리는 의문을 갖지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문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믿음의 관점에서 고민없이 그 의문을 해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하나님을 믿고있었고 애굽인들은 우상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편드신다는 것입니다.
바로와 모세 또는 바로와 하나님의 대결을 신앙과 불신앙의 불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즈음말로 표현하면 신앙의 우월성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것 그것 자체가 우리들의 신앙의 우월성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한번 자문해 보고싶습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지 수십년이 되어서 지금까지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을 회상하며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말한 내용이 여호수아 24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결심은 그들의 믿음때문이 아님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있었던 그 싯점은 그들이 애굽에서 애굽인들이 했던 것 처럼 애굽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 사람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었노라 그 날에 내가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 (겔20:5-8)
무슨 말씀입니까?
심지어 약속의 땅 구원의 땅 그곳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사람들보다 조금도 더 낫지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불신자들 보다도 타종교인들 보다도 더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바로와 모세, 애굽인과 이스라엘 백성, 사울과 다윗, 바리새인과 예수의 제자들, 유대인과 바울 이런식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을 해서 한쪽을 이기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해서는 안됩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이해하였습니다.(출3:7)
하나님이 그들을 본 이유는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들의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독자들로 인한 고통때문에 부르짖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시말씀드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무가치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를 소개한 책입니다.
그들이 제각기 자기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그들의 해방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와 그의 형제 아론은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 5:1)
바로가 대답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2)
이처럼 해방을 요구하는 하나님과 완고하게 거절하는 바로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10가지 재앙은 대단히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와 이와 파리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고, 가축에 전염병이 돌고 사람들과 가축들에 종양이 번지고 거대한 우박이 비오듯 쏟아지고 메뚜기떼가 자라는 풀들을 갈아먹고 3일동안 어두움이 전 애굽 땅을 덮었다.
오늘 본문은 10번째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 재앙들이 차례 차례로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건들 속에 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능력으로 심판을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목전에 벌어지는 충격적인 재앙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절정에 다다를 다가올 저녁에 대해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밤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애굽 전역에 짙은 안개가 깔리듯 펼쳐질것입니다.
그 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토록 갈망하며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들에게 역시 가장 큰 위기의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롭게 애굽의 전영토를 심판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심판을 피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구원을 찾는 그들이 자신들의 억압자인 애굽인들과 비교해서 그들의 억압자들 보다 더 의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구원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의로움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을 원하는 사람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모세를 통하여 당신의 자비와 용서를 기다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 모두를 불러 명령하였습니다.
너
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1-23)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칠해진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 집안의 사람들과 짐승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피를 본다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용서와 구원의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의 근거는 희생의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28)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인간적인 노력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집 문설주와 기둥에 피를 칠하고 집에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은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어린양의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하신 마지막 만찬이 유월절 축제의 식사였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축제가 예루살렘에서 진행되는 동안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진실로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유월절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찬예식때 하나님의 어린양 찬송을 부릅니다.
세상 죄를 끊으신 어린양 예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유월절은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전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 출애굽 사건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유월절은 조상들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하나님으로 불리우는 전환점이 되고있습니다.
출애굽 전야의 유월절 그날 저녁의 모습에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바른 출발을 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 각자의 의로움으로 모인 곳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모인 모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그 믿음이 다른 어떤 종교인들에 대해 불신자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집단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구원받을 가치도 자격도 없습니다.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피에 의지해서 묵묵히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작년 한인 송년의 밤 때 한글학교 발표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어린 자녀들이 나와서 모든 한인들 앞에서 발표를 하였습니다.
모두들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한 어린 학생이 말과 행동이 다른 교회 다니는 친구로부터 기독교에 대해 의문을 갖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목사로서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그리고 어린 학생에 대해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조용히 불러서 이야기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친구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어 미안하구나.
그런데 교회가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야. 좋은 점도 보려고 한번 노력해 보렴.
그 어린 학생이 싫었던 것은 말과 행동이 본이 안되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한 어린아이의 철없는 생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희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믿지않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조롱을 당하고 있는지 조금만 귀를 열어보면 금방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만심과 우월성을 극복하는 문제는 새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2차세계 대전이후 유럽교회들의 질문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면 세상의 마지막 때가 되고 그러면 그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한 기독교인들은 구원은 물론 하늘의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믿음으로 서구 기독교인들은 열렬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한 하나님 나라는 오지않고 대신 참혹한 전쟁의 체험만이 있었습니다.
1차세계대전은 카톨릭의 종주국인 이탈리아가 주도하였고 2차세계대전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나라, 개신교의 나라 독일이 주도하였습니다.
참혹한 전쟁을 체험한 서구 교회들은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기시작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신앙의 우월성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그래서 독일교회는 사회봉사단체를 교회가 이름없이 빛도없이 세상을 섬기기위해 막대한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대가없이 투자하면서도 교회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사회를 일으키는 큰 역할을 감당하게됩니다.
이슬람과 힌두교 등 다원화된 사회인 영국 버밍험에서 영국교회들이 타종교와 평화를 이루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화,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 백인 기독교와 흑인 기독교의 대화 각종 연구센터들이 생겨났습니다.
서구교회는 선교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고 했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과 참회의 실천의 내용이 지금 서구교회의 선교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인 까닭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흘리신 보혈의 피로 칠해진 십자가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아침까지 희생의 어린양의 피로 칠해진 자기 집 대문을 열지말고 그 안에서 기다려야 하듯 우리들도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을 기억하고 의지하며 구원의 아침까지 교회를 떠나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지않고 그들의 문설주에 칠해진 피를 신뢰하며 평화롭게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즐기는 동안 그들은 구원의 희망 안에서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는 것을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듯이 동시에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후 5:18)
이러한 교회의 삶이 유월절 축제요 구원의 희망 안에서 주의 날을 기다리는 교회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로 모이면서 무엇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와 실망과 낙심밖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기준과 잣대로 교회의 문턱을 높여 나도 들어가지않고 남도 들어가 못하게 천국 문을 가로막는 불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지 마십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칠해진 십자가만을 의지합시다.
십자가는 자기를 죽여 아무 대가 없는 희생과 섬김입니다.
나는 죽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이 교회 안에서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며 함께 노력하십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