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유럽 에큐메니칼 총회를 참관하고 (1997년 11월 1일 여전도회보)
체코형제개혁교회 일원으로 유럽 에큐메니칼 총회를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교회 내적.외적으로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 마다 전체 유럽교회가 함께 모였던 다른 어느 교회 회의 보다 유럽 에큐메니칼 총회의 교회사적 의미는 앞으로 교회사가들에 의해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질것으로 믿는다.
1차 2차 세계대전, 소위 철의 장막으로 불려진 냉전시대의 유럽의 분열, 그리고 옛 유고연방의 내전등과 같은 현대사의 참혹한 경험들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다. 이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8년전 1989년 스위스 바젤에서 유럽 에큐메니칼 총회로 분열된 모든 교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유럽 분열의 종식이 역사의 한 흐름이 될것으로 전망하고 새로운 유럽을 건설하기 위한 교회의 역할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8년후인 금년(1997)에 그들은 “새로운 유럽” 건설을 위해 다시 한번 총회로 모일 수 밖에 없었다. 6월 23일 부터 29일 까지 전 유럽의 160개 이상되는 각기 다른 교회(교파)와 20개 이상의 선교 단체로 부터 약 만명이 오스트리아 그라쯔(Graz)에 모였다. 유럽교회들의 고뇌를 금번 2차 총회의 주제인 “화해 – 하나님의 선물, 새 생명의 근원”에서 읽을 수 있다. 화해는 분열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그런뜻에서 옛 유고연방과의 국경부근인 오스트리아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그라쯔는 화해의 대상인 분열과 갈등의 구체적인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이다. 정치적
으로 냉전시대에 나토와 바르샤바 양진영의 대표들이 만났던 곳이며 교회적으로는 에큐메니칼 활동 단체들이 일어났던곳이다. 이처럼 그라쯔는 금번 총회가 추구하는 화해의 내용과 방향에 대한 지정학적인 상징성을 갖고있다
“철의 장막”이 무너진 지금 유럽의 화두는 “통합”이다. “철의 장막”으로 나뉘어졌던 동-서유럽의 통합, 시장과 화폐의 통합이다.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있는 각각의 이질적인 민족들이 통합하기위해 유럽을 우선 하나의 시장으로 건설하는것이다. 이 시장의 건설은 “신자유주의 와 세계화 라는 유령”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 유럽교회들은 유럽대륙에 이 유령들에 의해 깊고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동-서 유럽으로 갈라놓았던 냉전시대의 “철의 장막”이 “은(silver)의 장막”으로 대치되고 있다고 경고 하였다. “은의 장막”이란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을 의미하는 “철의 장막”이 무너진 이후 동서유럽간의 경제적 차이로 인해 분열이 오히려 더욱 심화되고 있는 상황을 뜻한다. 프랑스 복음주의 교회 엘자베스 팔멘티즈 목사는 이러한 상황의 유럽을 “공포” 와 “희망” 이라는 두 쌍둥이를 갖고있는 임산부에 비유를 하였다. 이 공포와 희망 사이에서 유럽교회는 “화해”로 자신의 역할을 자리매김 하였다. 그리고 이번 총회에서 유럽교회는 그 화해의 길을 유럽의 정신적 토대인 기독교 뿌리에 대한 반성과 그 역사로 부터 배움으로써 찾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회의의 결과가 정치, 경제, 사회일반에 즉각 반영되기 보다는, 서서히 그리고 교회간의 화해의 노력으로 나타나게될 것이다. 화해의 노력으로써 동서 교회들은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한것임을 함께 인식하며 동시에 그것을 하나의 행동양식으로 지켜가기로 약속하였다.
회의를 참석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것은 “철의 장막”이 무너지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도 유럽의 거대한 변화의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변화의 방향은 동서유럽의 통합이며, 유럽교회는 그 변화를 단지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경제적인 방법에 맡기지 않고 “평화”라는 정신적 가치의 토대위에 “새로운 유럽”을 건설하려고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화해”라는 주제가 도출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앞으로 한국교회는 동유럽 선교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동유럽을 대표할만큼 중요한 위치에서 총회의 회원교회로 참석한 러시아 정교회는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교회의 일치를 한국교회가 파괴하고 있다는 비난을 유럽교회들 만이 모이는 이 회의에서 조차 거론하였다. 물론 러시아 정교회의 일방적인 편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 유럽교회의 흐름과 동떨어진 우리의 동유럽 선교는 앞으로 복음주의 계열의 유럽교회들 조차도 거부감을 가질 수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