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 한인 예배 (2004년 07월 11일)
  • 행18:18-28
  • 설교자: 이종실

040711

본문: 사도행전 18:18-28

제목: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본문>

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설교>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지 그리고 설령 하나님의 뜻을 알더라도 그 뜻을 어떻게 실천해야될지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2차선교여행의 막바지 내용과 3차선교여행의 시작 내용이 잠깐의 인터발도 없이 연이어 지고 있습니다.

1차선교여행은 사도행전 13장 4절에서 14장 28절까지 기록되어있고 잠시 인터발을 두고 2차선교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15장 36절부터 18장 22절까지 나오는 것에 비하면 3차선교여행에 대한 내용이 (오늘 성경을 보시면) 22절에서 마침표도
찍지않고 23절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에 있는 고린도에서 1년반 선교를 하고 에게해를 배를 타고 건너 현재 터어키에 있는 에베소를 거쳐 다시 배를 타고 지중해를 통해 팔레스틴의 주요항구인 가이사랴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시면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라고 나옵니다.

표준새번역에는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내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에 문안한 뒤에, 안디옥으로 내려갔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에 상륙해서 가이사랴 교회에 들리지도 않고 해안에서 100km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문안하였다.” “안부를 물었다.”라고 설명한 것을 볼 때 그동안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염려하던 안디옥 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곳에서 인사만 한 것이 아니라 선교보고도 하였을 것이고 그동안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성밖에 버림을 당하고 죽일려고 폭동이
일어났고 야반 도주하였더니 거기까지 폭도들이 따라왔던 일이며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은 일들을 설명하면서 그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는지 간증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목회를 하였던 안디옥 교회에서는 아마 예루살렘 보다 더 인간적으로 정이 가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겪었던 고난과 체험으로 선교보고를 할 때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과 안디옥 교회 교인들의 반응도 대단하였으리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 모두들 흥분의 도가니였을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주후52년 여름경에 2차선교여행에서 돌아와서 53년 이른 봄 에 3차선교여행을 출발하였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3차선교여행을 출발하기전 6개월 동안에 바울의 설교와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예루살렘과 안디옥 교회는 많은 부흥과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6개월의 이야기를 22절 후반절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라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보기에 더 궁금하고 알았으면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않으면서 겐그레아서 머리를 깍은 바울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8절 입니다.

“바울은 여러 날을 더 머무른 뒤에, 신도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났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와 동행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서원한 것이 있어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겐그레아는 고린도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한 항구도시입니다.

다른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슬쩍 지나가면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도 바울의 머리깍는 이야기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갖는 질문은 “왜 누가는 그런 사소한 것을 일부러 기록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또 이상한 것은 3차선교여행때는 머물렀지만 에베소에 머무를 계획이 없는 사도 바울의 생각을 자세히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차전도여행때 처음에 아시아 지방으로 가려고 했던 바울의 목적지는 당연히 에게해 항구도시인 아시아 수도 에베소가 목적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6장 6절에 아시아로 가는 것을 성령이 막았기 때문에 갑바도기아 내륙지방으로 빙돌아 지금의 그리스 빌립보로 갔습니다.

이제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을 바닷길로 가려고 하다 보니 처음에 성령이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에베소를 지금 경유하게 된것입니다.

19절 20절 21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 일행은 에베소에 이르렀다. 바울은 두 사람을 떼어놓고, 자기 혼자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 사람과 토론하였다. 그들은
바울에게 좀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으나, 바울은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내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작별 인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났다.”

이 본문이 흥미있는 것은 성령께서 보낸 선교지에서 사도 바울은 환영대신 박해와 핍박과 경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가로막은 선교지 에베소에서는 지금 환영을 받고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내가 처음부터 환영을 받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거나 다른 곳에서 견뎌내지 못할까봐 에베소 가는
길을 처음에 가로막은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고국으로 돌아가기전 마지막으로 나를 환영하는 이곳에서 나의 2차선교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하고 그동안 사람들로부터 받은 속상했던 마음이 위로받고 심신을 회복해서 귀국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아무 일도 하지않고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분명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 그 판단이 매우 모호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의깊게 오늘 본문을 보시면 겐그레아에서 바울이 머리를 깍은 이야기가 바로 이 판단이 어려운 상황직전에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중요한 상황이 바울의 머리깍은 이야기와 관련성을 갖는 다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께서 이 기록을 통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중요한 영적기준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머리를 깍은 동기와 목적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와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그대로 받아들이면 서원(서약, 맹세)한 것이 있어 머리를 깍은 것입니다.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두려워 떨었던” 고린도에서 하나님앞에서 많은 맹세들을 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앞에서 맹세하고 서원한 경험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느날 급한 문제가 생겨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 아버지!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다음부터 다시는 하나님앞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맹세를 둔 기도를 합니다.

“지금 이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게 하옵소서. 내가 이제 나의 모든 것이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 고백합니다. 앞으로 감사생활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십일조 생활을 하겠나이다.” 맹세를 둔 기도를 합니다.

“건강을 잃고 병상에 누웠을 때 기도하기를 나를 치유해 주신다면 내 생명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기도합니다.

“환란과 고통을 겪으면서 기도합니다. 이 환란의 풍랑을 잠잠하게 하소서. 내가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겠나이다.”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상황이 지나가면 마치 화장실 들어갈 때의 마음이 나올 때 달라지듯 달라지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갈대와 같이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하는 인간의 마음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서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주님의 위로와 허락하신 비전 앞에서 무릎 꿇고 자신의
의지와 지식과 경험으로 선교하려했던 그동안의 선교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자신의 힘과 의지로 자신의 판단으로 하려고 했기에 “두렵고 떨었던”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신의 힘과 뜻으로 선교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심을 잊지않기위해 고린도에서 나와 바로 옆에 한적한 도시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깍았던 것입니다.

신자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뜻을 잘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적인 기준 즉 영적 분별력이 우리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환란과 고통속에서 드리는 기도가운데 마음에 둔 맹세는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영적 분별력을 이끌어 주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황이 바뀌면 그만 그 마음의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려버립니다.

그당시 머리를 깍는 행위는 나실인들의 맹세와 관련이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나실인이란 말을 처음 들어보신분들은 계시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실인은 민수기 6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6장에 의하면 맹세한 이후에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을 <나실인>이라고 부릅니다.

민수기 6장에 따르면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나실인의 맹세를 하는 사람이 지켜야할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포도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먹거나 마셔서는 안됩니다.

두번째로 머리를 깍아서는 안됩니다.

세번째로 시체를 만져서는 안됩니다.

첫째로 포도로 생산되는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떠돌이 유목민들입니다.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원주민들의 농경생활에 동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매일 매일의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며 비옥한 땅이나 다른 무엇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머리를 깍는 것을 금하는 것은 긴머리카락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의미를 늘 인식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머리카락이 짧거나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리면 머리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깨끗한 거울이 없어서 머리가 긴지 짧은지 다듬어야되는지 만져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일로 정신이 팔려있을 때는 적당히 머리가 길어도 머리가 길어진 것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머리를 자주 들여다보고 만져보아야 머리를 손 볼때가 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앞에서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식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성경읽고 기도하지않고 심지어 성수주일하지 못하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습니까?

마직막으로 시체에 손을 대지않는 것은 순결함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나를 하나님께 봉헌한 사람의 삶의 중요한 것은 순결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 품위있는 교양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알고 정직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고 남을 위해 수고하는 삶을 살 줄 아는 삶의 태도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비판하고 하는 혀에는 가시가 밖혀있어 남의 심장을 쑤시고 욕설을 담고 인격을 무시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하고,
먹을 것과 먹지 말을 것에 구분이 없고, 갈 곳과 가서는 안 될 곳에 구분이 없고, 앉아야 될 것과 앉아서는 안될 것의 구분도
없는 그런 삶을 살면서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체를 만지지않고 포도주를 마시지않고 자신의 머리를 자르지 않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 고백하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을 알고 날마다 나는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결단과 결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곱번 넘어지면 여덟번 일어나겠다는 용기와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설령 세상에, 사람에 넘어지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비전이 있는 사람이야” “나는 하나님의 것이야”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 확신과 용기와 열정은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한 사람의 노력이자 동시에 기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고린도에서 마음에 깨닫고 결심한 것을 꼭 지켜내겠다는 바울의 맹세의 마음이  겐그리아에서 머리깍는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2차선교여행은 바울을 더 깊은 신앙의 결단의 단계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신뢰하며 주님의 것으로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 바울은 귀향 길에 에베소를 경유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그는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에베소는 바울이 첫번째로 선교지로 삼았던 도시였습니다.

지금 에베소 사람들은 그를 필요로하였습니다.

만약에 이곳에서 그를 다시 붙잡는 사람들이 회당에서 만난 유대인들이었다면 그는 에베소에 더 머물러야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바울의 목적은 자신의 동족 한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처형한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깨닫게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성령께서 지난번처럼 에베소를 가는 것을 가로막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에 더 머물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기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것이고 그는 허락된 시간에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는 그릇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일보다도 바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순복하는 삶이었습니다.

이 바울의 입장을 그대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적용을 한다면 우리 신자들은 자신의 먹고 사는 삶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눈앞에 돈 버는 일이 닥쳐와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질문해야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좋으면 하나님의 뜻이고 나에게 불리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간절하게 더욱 듣고싶어 더 남아있을 것을 간청하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면, 내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대답하는 바울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울은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적당한 싯점에서 놓을 줄도 알고, 또 어떠한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일할 줄도 아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뜻이지 바울의 의지가 아닌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이제 나 중심로 이웃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멈추십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서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의 의지를 머리깍고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고백으로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십시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행복한 삶을 날마다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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