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체류자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 한인 예배 (2004년 07월 18일)
  • 행19:1-20
  • 설교자: 이종실

040718

본문: 사도행전 19:1-20

제목: 체코 체류자로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본문>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설교>

한국에서 작은 교회 또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오신 분들은 좀 덜한데, 성령운동, 성경 공부, 또는 경배와
찬양과 같은 특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이제 10년 20년 만에 대교회로 부흥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오신 분들은 도무지
해외한인교회에 적응하는데 매우 어려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해외한인교회를 비교하면서 비슷한점과 차이점 그리고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무엇인지 늘 탐구하고있습니다.

어디서 신앙생활을 했던지 새롭게 출석하는 분들을 위해 쉽게 이해하고 새로운 교회의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흡수력과 구심력이 있어야 하는데 한인교회는 그것이 매우 약합니다.

더구나 한인교회는 늘 불안정하게 느껴집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저는 대부분의 해외한인교회들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교회 안에 신앙과 사회의 위계질서가 없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교회에 어른과 선생이 없습니다.

서로 알 것 다 아니 너와 내가 다를 것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존경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한인교회는 해외에서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신앙생활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갓 온 신자들이 보면 한심하게 보입니다.

질서도 없고, 신앙의 중심도 없고 중구난방입니다.

교인들도 한심하고 목사의 설교도 목회도 교회운영도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해외한인교회를 몸에 비유를 하자면 조그마한 질병도 쉽게 감염될 수 있는 그런 허약한 체질과 같습니다.

그래서 온갖 유사 기독교 종파들이 해외한인교회 안에서 득실 거립니다.

지금 체코에 한국 유사 기독교 종파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침례교파에서 생겨난 박옥수의 구원파와 김기동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프라하 한인교회가 평안하지 못할 때 통일교 사람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을 한 것을 보고 그날 설교하러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통일교의 새가정 운동이 나쁜 것이 없어보인다는 교인을 만나고 마음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여성이며 당시에 남편은 찰스대 법대를 나와 변호사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안되겠다 생각하여 통일교 활동을 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왜 교회에 나오는지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살기 어려워 일거리를 찾으러 한인들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체코 사람들처럼 돈을 받고 한국 학생들 과외공부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리 순순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말 것을 완곡하게 말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교회 예배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2-3년 전에 세 딸을 데리고 온 박옥수 구원파 한 가정이 들어와 열심히 체코어를 공부하더니 금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의 집회와 성경공부를 참석한 체코인들의 전화가 얼마 전에 우리교회에 걸려왔습니다.

그를 저 인줄 알고 이상한 가르침에 질문겸 항의겸 전화를 했습니다.

이미 오래전 부터 베뢰아 김기동씨가 목사의 이름으로 체코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물질 공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곳 제일 큰 체코 침례교회에 오르간을 기증하였습니다.

이 일에 체코에 있는 한국 선교사들이 부화뇌동하고 있습니다.

교회일에 분열과 다툼이 있는 해외한인사회에는 이단이 뿌리내릴 수 있는 좋은 토대가 됩니다.

이 외에도 잘못된 영을 가진 이들이 신앙적 사회적 위계질서가 잡혀있지 않는 해외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 교회는 풍지박살이 납니다.

그 뿐 아니라 한국에서 성숙하지 못한 신앙을 가지고 온 분들로 인해 역시 해외한인교회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인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곧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들입니다.

해외교회의 이 허약함은 바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은 해외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에 왔습니다.

에베소의 전도는 바울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볼로가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아볼로를 성경은 “그는 이미 주의 ‘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열심히 예수에 관한 일을 말하며,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다.”(18:25)라고 소개하였다.

다시 말씀드려 예수를 선포하였지만 그는 세례요한의 설교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아볼로가 알고있는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요단 계곡 온 지역을 찾아 다니면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눅3:3)

이것이 “요한의 세례”입니다.

회개의 세례는 임박한 심판의 선포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그리고 오실 메시야는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시키는 농부로서 암시되고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눅3:17)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우리가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이 설교는 요한의 제자들을 통하여 요한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 전해졌습니다.

아볼로는 이 설교를 받아들였고 그는 요한의 세례 즉 회개의 세례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물론 그가 “주의 도”를 받아들였기에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최후심판으로서 재림하실 예수를 설교하였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활동할 때 바울은 에베소를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제자를 만났습니다.

그들 역시 요한의 세례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다가올 심판을 준비하고 회개의 좋은 열매을 맺기위해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 패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기에 무언가 부족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자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3차선교여행을 할 때를 학자들에 따라서 52-54년 또는 55-57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체로 주후 50년대 중반쯤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그들은 예수 승천이후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 사건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래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4) 

믿음생활에서 회개와 용서함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다가 한 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신앙생활의 패턴에 저와 여러분들은 멈추어서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의 고백과 용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죄 고백과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믿어야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신자의 삶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며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십니다.

바울이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들에게 손을 얹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였습니다.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시작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초자연적인 체험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아래 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말씀드려 그들은 회개와 죄 용서의 삶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에 동참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마술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에베소 설교는 영적 전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엡 6:12)

저는 이 에베소 교회의 이 신앙의 씨름이 바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우들의 신앙생활의 모델로 삼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이 프라하에 살면서 아직 얼굴한번 보지 못한 분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분이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한분이며 가족관계는 어떻고 프라하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어떤 사람인지 기타 등등….

조금만 살다 보면 알 것 다 알아요.

어떤 감추어진 사생활도 심지어 한국이나 다른 나라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마치 피할 수 없이 만나야 되는 감옥 같은 해외생활에서 그것도 해외의 교회 안에서 우리들이 신앙의 패턴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살다 보면 서로가 오해할 수 도 있고, 손해를 끼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고, 관계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해외생활에서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신앙생활과 인생이 한발자국도 앞으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해외이민생활을 위해서 우리들이 우선 배워야 할 것은 이해심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마음이 내게 형성되었다고 생각되면 그때 비판할 것이 있으면 비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 6장 12절의 이 신앙의 패턴이 우리들에게 이해의 마음을 길러주는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어여움을 영적전쟁으로 이해하면 상대방이 미워지지않아요, 그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한번 더 살펴보게 됩니다.

저는 이 해외생활이 정말 영적 전쟁인 것을 날마다 체험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자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잠이 듭니다.

때로는 선명한 꿈을 꿉니다.

체코어로 체코사람의 꿈을 꾸기도 하고 한국어로 한국사람의 꿈을 꾸기도 합니다.

그 꿈이 너무 선명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얼마가지 않아 그의 주변에 일어나는 것을 체험합니다.

깊은 묵상 속에서 나 자신이 큰 은혜를 받은 말씀을 전할 때는 꼭 교회 오는 길에 자동차 안에서 부부싸움을 하게 됩니다.

우리 교우들의 삶에 그리고 교우들 사이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어려운 문제들이 저에게는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 걸어오는 싸움으로 저의 눈에는 보입니다.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영적싸움에서 지지않는 삶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늘 권세를 잡은 어두운 세력이나 악한 영들은 간교하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않고 우리 인간의 가장 연약한 고리를 통해 공격합니다.

해외생활에서 가장 연약한 고리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감옥 같은 해외생활의 인간관계를 통해 악한 영들은 먹이를 찾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싸움을 싸우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 저희들은 꼭 한가지는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이야기할 때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혼돈해서 듣는 분들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말씀드려 성령을 받아도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않는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성령을 받지않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바랍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따로 주제를 삼아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우리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하는 이유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롬 8:9)

성령이 우리안에 내안에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14절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14)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징표가 무엇입니까?

성수주일하는 것입니까? 하루한장 성경읽고 하루세번 기도하는 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전도하는 것입니까? 숨은 봉사를 잘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 성령이 내 안에 없으면 우리는 영적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주의 거룩한 영이 임재하고 계신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한번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십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을 여러분들의 의지로 이성으로 고백하게되고 기도하게되고 받아들이게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내 안에서 성령께서 하신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예수님만 생각해도 눈물이 흐르는 것은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마 16:13-17)

혈육도 우리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일도 모르고 아무리 오래 사귄 친구도 모르는데 인간의 노력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이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임재하는 성령을 깨닫고 그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삶의 문제들을 영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성령의 뜻에 나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체코 체류자들의 믿음생활 입니다.

우찌무라간조의 “예수를 생각하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성령을 모시고 살면 우리도 그와 함께 그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가난함도 슬프지도 않고, 남의 부유함도 부럽지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감사한 마음이 넘칠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몸의 환란도 괴롭지않고 그 행복도 사모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는 나는 오직 평강과 만족만 있을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일의 실패에 실망하지 않고 그 성공에 뛰며 기뻐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영원한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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