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를린 수해 봉사 활동을 다녀와서

까를린 수해 봉사 활동을 다녀와서…

이번 홍수가 100년만의 홍수라고 들었다. 다른 시각에선 800년만의 대홍수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고 들은 바 있지만 솔직히 나에겐 그리 큰 관심은 없었다. 더 그런 것이 그 때 나는 여기에 없었고 이웃나라인 폴란드에 있었을 때였다. 폴란드 경우는 비로인한 아무런 피해가 없었고 텔레비전과 신문지상으로만 체코와 독일쪽에 큰 홍수가 났다고 연일 기사화가 되긴 했는데 나로선 단지 그 순간만 남의 일인양 혀를 찼을 뿐 단지 일상의 뉴스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후에 내가 다시 프라하로 돌아왔을때는 이미 비는 다 멎은 상태고 남은 건 그로인한 많은 재산피해와 아픈 상처들… 듣기로는 인명피해도 있었다고 했다. 기차역에 도착해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는데 출입금지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순간 생각한 것은 수해를 당한 그들을 생각하기 전에 단지 나의 불편함을 먼저 떠올렸다는 것에 수해지역을 다녀온 뒤 필자는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내가 수해복구 봉사활동에 참여한 계기는 자발적이였으면 좋으련만 부끄럽게도… 목사님을 비롯 체코인 봉사자들과 한국인 4분이 승합차를 타고 수해 입은 한 마을로 진입했을 때 그 거리의 광경만 보고도 적지 않은 충격을 느꼈다. 정말 없는 것 조금 더해서 전쟁터의 뒷모습을 보는 듯했다. 수해를 입은 지역을 한국에서도 본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도착해서 도울 장소는 주택가의 아파트 단지였는데 1층 모두가 천정까지 물에 잠겼던 흔적이 보였다. 우린 장화를 신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장갑을 끼고 망치와 정과 곡괭이로 온 벽들을 뜯어내는 일. 그대로 두면 집이 썩어간다니… 내가 도왔던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사시던 곳이었는데 그 분들과 함께 종일 벽을 때리고 깨고 하는 일의 연속. 솔직히 나는 오후 정도에는 집에 가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 두 분은 몇 날 몇 일을 계속 일하였고 또 앞으로도 계속 해야 되는데 그러면서도 놀라웠던 것은 그 노부부의 얼굴에는 짜증이나 걱정스러움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에 나로서는 또 한번의 충격이었고 그들의 마음과 표정이 나에게 귀중한 가르침과 교훈을 주었다는 거. 예상치 못했던 변화와 두려움을 맞아 어떤 이는 주저 앉아 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 변화와 두려움에 당당히 맞서 결국엔 다시 일어난다. 후의 일들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노부부는 잘 참아내고 이겨내어 다시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을 거라 믿는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노부부가 우리에게 “감사하다.” “고맙다.”고 했다. 나도 “당신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했다. 더 열심히 도왔어야 했는데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그렇게 떠나오는 나의 마지막 심정은 타국의 남의 민족이 아닌 바로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생각이 들어 죄송하고 가슴 한 켠으로 마음이 저려왔다. 어느 평범한 농사꾼이 책을 펴낸 적이 있었다. 제목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요즈음 우리 살아가는 모습들을 볼 때 필자는 주제 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만 잘 살면 되지 하며 살아가는게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고 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권력과 금력과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나눔이고 또 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며 길고 짧고 잘나고 못난이들이 나누며 어우러져 아름답게 자연스럽게 살아갔음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도 역시 나눔을 정을 모르며 살아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이 부끄럽고 더욱 더 나를 되돌아보며 숙연하게 하는 의미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부디 많은 수재민들이 하루 빨리 그들의 온전한 삶 속으로 되돌아 가길 진심으로 빌며…

부끄러운 봉사자 유 수 영 <찬양대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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