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07)

2013년 3월 7일 오늘의 말씀

주님, 위대함과 능력과 영광과 승리와 존귀가
모두 주의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도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는 만물의 머리 되신 분으로 높임을 받아 주십시오.
(역대상 29장 11절, 표준새번역)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의 근원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여라
(계시록 14장 7절 하반절, 표준새번역)
묵상
오늘 본문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것을 보며 하나님께 올린 다윗의 감사 기도의 일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전이 왜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지금까지 그들에게 성전대신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은 portable 이동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예루살렘에 고정된 움직일 수 없는 건물입니다.
성전건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임을 확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윗에게는 성전건축은 그의 숙원사업이었습니다.
성전 건축 완성은 민족적 축제였습니다. 
성막과 성전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준 의미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였습니다.
성막과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이스라엘은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그들은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는 경험을 했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광야에서 배불리 먹었고
40년동안 신발과 옷이 헤어지지 않았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의 도움으로 광야에서 생활을 했고
막강한 군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했고
반석에서 샘이 터져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광야 40년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이스라엘은 체험하였습니다.
이와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가 
바로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성막과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망했고 솔로몬도 망했습니다.
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눈에 보이는 성전과 율법과 제도로 대신하려고 했기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었던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는 
실제로 눈에 보이는 성전과 율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승리와 존귀를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파의 제도화된 권력과 기득권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중세 기독교회가 망한 이유도 이와같습니다.
지금 한국개신교회가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느끼고 보지못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망하는 길로 휩쓸려가게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육신의 한계와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비천한 가난하고 힘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마 1:23)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의 인간이 만든 제도와 기관안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전지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의 근원을 만드시고
만물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명예 소유 건강과 소속감을 주는 일체의 조직과 제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삶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나의 모든 것이 당신으로 부터 온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는 이 고백이
내 삶의 안정과 소속감을 제공하는 
소위 “축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졌을지라도
드릴 수 있는 고백이 되게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며 드릴 수 있는
고백이 되게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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