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5)

2103년 3월 15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시편 130편 3절, 공동번역)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서
그 분의 피로 구속 곧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표준새번역)
묵상
현대사회에서 정의의 개념이 복잡해진 만큼 
윤리와 도덕의 해석도 그만큼 발전되었습니다.
그것을 달리 설명하면 현대사회는 복잡해졌고 
현대인들은 그만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가중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신에게 정신적인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입니다.
소위 성장하는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죄”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청중들에게 스트레스가 될 수 있는 죄와 희생을 요구하는 이야기보다 
위로와 평안과 행복과 소망이 넘치는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바로 이 유혹에서 부터 교회의 영적기반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죄”에 대한 이해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기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친구”로서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마 9)
욥기를 보시면 욥은 조금도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고 
그러면서도 마음에 조금도 자신의 의로움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겸손했던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두고 그는 친구들과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당시 일반적인 생각은 인생의 불행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 사고방식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을 아무리 성찰해보아도 
자신은 하나님앞에서 조금도 불의가 없었기에 
친구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시며 불행을 주신것도 하나님이시니
그 불행조차 감사히 받겠다는 태도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에 대해서 조금도 흠이 없었던 욥이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깊이와 질이 달라지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됩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재위에서 회개합니다”
욥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것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존재 깊이에서 하나님을 만날때 깨달아지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단순한 “행위”나 “의식”의 반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지는 나의 모습이 죄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만큼 죄를 알게되고
죄의 크기와 깊이를 아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됩니다.
기도
주님,
이제 사순절도 막바지에 다달랐습니다.
한주가 더 지나가면 고난주간을 맞이하게됩니다.
당신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찾아다니시고
죄인을 만나시고
죄인과 교제하신것은
죄인을 부르기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
진솔하게 제 자신을 돌아보면
죄인을 부르러오신 당신이 필요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내 생각, 내가 하고싶은 말과 행동을
다스려 주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만이 내 죄를 용서해 주는 
능력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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