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자들의 슬픔

  • 한인 예배 (2001년 11월 25일)
  • 마25:1-13
  • 설교자: 이종실

01/11/25 (삼위일체 후 스물네번째 주일)
본문: 마태복음 25장 1-13절
제목: 미련한 자들의 슬픔

<공동기도>
세상을 사랑하시어 구원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복음을 믿는 다고 하지만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없어
불안해 하는 우리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미련한 자들의 슬픔이 우리들의 슬픔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설교>

년 전 저의 아이 김나지움 입학시험 발표를 보기위해 학교를 갔습니다. 체코 학교는 합격자 발표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학교 현관 유리에 A3용지 한 장이 붙어있고 사람들이 거기에 옹기 종기 모여있었습니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합격자 명단인 것을
알았습니다. 수험생 백 여명의 성적이 1등부터 차례로 모든 과목의 점수와 총점을 밝힌 성적 리스트가 현관에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30등 학생 이름과 성적 밑에 빨간 밑줄이 똑 바로 그어져 있었습니다. 빨간 줄 아래 이름들은 불합격입니다. 합격선 위 아래
학생의 성적차이는 불과 0.01이었습니다. 억울한 불합격생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체코학교는 “odvolani”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억울하게 불합격된 학생의 학부모나 가르친 선생님들이 합격 청원을 하면 심의를 해서 입학을 허용하는 제도입니다. 한국에서
입학시험을 떨어지면 이차 삼차 아니면 재수를 해서 원하는 학교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떨어지면 두 번
다시 치르지 못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억울하게 불합격되었다고 하소연 해도 관용이 없는 시험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천국
입학시험입니다. 오늘 본문의 천국비유는 특히 신자들인 우리들에게 정신이 번쩍 나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합격한 줄 알고 넋 놓고
있다가 떨어진 사례입니다.

천국은 혼인잔치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 결혼 풍습은 팔레스틴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부장 사회로 결혼예식은 신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이 결혼식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신랑과 신랑 일가친척들은 신부의 가족과 신부의 가격을 협상하고 있습니다. 딸에 대한 가족들의 사랑의 정도에
따라 협상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딸을 크게 사랑하는 가족은 딸을 잃게 되는 것을 마음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족들의
마음을 보여 주려면 흥정은 자연히 어려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이나 물건의 가치에 대한 흥정이 아니라 양가 집안의 관계성과
상호 존중과 존경을 세우는 협상입니다.

신부의 가격을 결정해야 신랑과 그의 일가친척들은 신부와 그녀의 들러리들을
데리고 혼인식과 잔치에 데리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흥정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늦어져 밤까지
지연되고있다. 요즈음 시대 같으면 전기와 가로등이 있어 문제가 없겠지만 그 당시는 들러리들이 등불과 횃불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들러리들의 역할은 길을 밝히고 그 불빛은 결혼식의 분위기를 연출하게 될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들러리들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 4절까지 말씀입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로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마태 25장 1-4절)


러리들이 10명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외모로 누가 지혜로운 들러리인지 누가 어리석은 들러리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10명의
아리따운 들러리 처녀들은 하나같이 옷 단장을 하고 머리를 깨끗이 손질하고 얼굴에 분을 칠하고 장식을 달아 치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등불은 모두 밝게 켜져 있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오면 언제든지 바로나가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신랑과
그의 일행이 오는 일이 점점 지연이 되자 모두들 기다리는 것에 지쳤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들도 미련한 처녀들도 모두 하나같이
기다리기에 지쳤습니다. 벽에 기대어 졸고 자는 그들의 모습을 만약 여러분들이 둘러본다면 누가 어리석고 누가 현명한지 구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장한 옷들이 구겨질까봐, 머리가 흐트러질까봐 조신하며 피곤한 몸을 잠시 기대고 졸고 있는 그들의 표정은 마치
즐거운 혼인잔치 참예의 단꿈을 꾸는듯 하였을 것입니다.

예상치 못하게 신랑이 오는 시간이 지연되자 졸고 자며 긴장이 풀어져 있는 한 밤중에 “신랑이 온다. 맞으러 나오라.” 누군가가 소리를 쳤습니다.
처녀들은 졸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 그 순간 혼돈이 찾아왔습니다. 그 때 처녀들의 등불에 기름이 떨어져 연기가 나더니 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순간 까지 10명의 들러리 처녀들에겐 결정적인 차이점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러리들의 책임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신랑이 도착했을 때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다섯 들러리들은 그들의 등불에 여분의 기름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계획하지도 준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빈 등불에 채울 기름이
없습니다. 기름이 없어지자 불이 꺼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단 한가지 책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랑을 마중
나가는데 참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랑과 무리들이 도착하자마자 예식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름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미련한 들러리들은 신랑의 행진을 맞이할 불이 없었습니다. 시골 농가 마을의 문화상황에서 이 미련한 들러리들의
행위는 신랑과 신부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식당에 저녁을 초대해 놓고 지불할 돈이 없다고 하는 황당한
경우입니다. 뒤늦게  기름을 구하러 나가야 소용이 없었습니다. 콘서트가 시작되면 극장의 큰 문은 닫힙니다. 누구도 입장이
허용되지않습니다. 결혼행진과 예식과 잔치는 그들의 등불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함께 결혼 예식을 기다리다가 그만
참가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들러리의 이야기는 마지막 때의 심각한 상황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주라 고백하여 천국 행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의 일부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마지막 때의 상황을 우리는 지금
보고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공의로 우신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누구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가 없습니다.  빛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분이 없는 들러리들 사이에 심판의 순간에 구분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열심이 있고 도덕적으로
신실하고 순수해도 마지막 때에 시험에 통과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든것은 우리들이 진정으로 준비되어 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등불에 기름이 채워져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등불의
기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들러리 처럼 치장을 하고 등불을 들었다고 모두 들러리라고 말할 수 없듯이
예수를 믿는다고 모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실존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주님께 복종된 존재를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의 사랑과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 안에 결단성 있게 거하고 그의 빛을 받고 그의 가르침으로 살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존경하며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며 더욱더 성장하고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믿음으로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름은 우리들의 더 깊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이 성장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복음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그 은총이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준다”(딛 2,11-13)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인 이 복음은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우리 안에 성장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 자신들을 냉철히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받아들인 복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과 영혼에 깊이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의고사를 한번 치러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양심과 영혼이 그
증인이 될 것입니다.

짧은 기간동안 거룩하게 귀하게 보이기는 쉽지만 우리의 믿음이 오랫동안 한결같이 지속되는
것은 쉽지않습니다. 진리는 우리들의 삶의 오랜 과정에 의해 드러나게 됨을 오늘 이 비유는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기다림”으로 묘사하고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재림이 2천년이 지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심은 이미 준비되었고
방심하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장 27-28절)

사도 바울은 우리들은 모든 은혜를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고전 1,7)  이처럼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 들인 사람들은 기다림이 그의
소명이 됩니다. 이 기다림은 무작정 넋 놓고 기다리는 낭비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상관없이 산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만하며 하늘만 바라보는 수동적이 기다림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로마 군대에 체포되기 며칠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확신을 시켜 준비된 자로 기다릴 수 있게 하기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래에 다가올 고난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기위한 것이었습니다. 천국 무대는 즐거운 혼인잔치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슬픈 장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수님의 오심은 좋은 소식이지 나쁜 소식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가까운 친구의 기쁜 재림을 조금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우리들의 마음의 깊은 갈망과 기쁨의 완성입니다.

거짓 들러리들이 쫒겨나고, 인생의 질투와 무자비함들이 사랑에 의해 정복되고, 거짓말과 비난들이 진리 앞에서 밝혀지고, 잔인함과 폭력들이 평화로 정복되는 그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망과 한탄과 다툼과 분쟁들을  시시비비로 가려내고 악을 악으로 갚으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정의롭고 신실하고 선한
세상의 주인으로 나타나 약속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그의 나라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임하는 그날을 바라보고 인내하여 악을 선으로
승리하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리던 그 날에 우리들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거나
아니면 “저주 받을 자들아 나를 떠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것입니다. 저주 받은 자들이 항변을 합니다. “우리는 주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그러자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눅 13, 26)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복 받을 자여 나아오라” 아니면 “저주 받을 자여 나를 떠나라.”

<설교 후 기도>

님, 오늘은 교회 달력으로 한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는 날입니다. 이시간 주님의 재림의 때를 생각하며 나는 미련한 자인지 슬기로운
자인지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그 은총이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준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직도 복음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한 나 자신의 독한 품성과 세상적인 행실들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진정으로 구원의 생명의 복음을 우리들의 영혼깊이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마지막 주님의 때가
우리들에게 혼인잔치의 기쁨의 자리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복 받을 자여 나아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모두 들을 수 있는 사랑하는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우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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