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의 손님들

  • 연합 예배 (1999년 10월 03일)
  • 창 19:1-5, 23
  • 설교자: 이지 슈토렉

1999년 체코-한국 에큐메니칼 첫번째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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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이지 슈토렉(꼬빌리시 야곱의 사닥다리 교회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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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창세기 19장 1-5절,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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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2)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4)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창세기 19장 1-5절)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창세기 19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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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

    아브라함에 관한 창세기 말씀들은 마치 행동강령이나 좋은 방향과 올바른 결정을 돕는 교리문답 같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이야기는 세례식이 있는 예배에 적당한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새롭게 하셔서 성서의 주제들을 올바르게
느끼도록 하셔서 달콤하고 자유하게 하는 복음으로 안내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움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헤어질 때 그들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롯의 눈에 요단 들판은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창세기 13장 10-11절 말씀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아브라함은 그 반대편 가나안을 택하였다.”

롯은 이 땅의 낙원을 선택하였습니다. 롯은 낙원을 알았고 그리고 낙원을 잘 이루어갔습니다. 방랑자로서 그 도시의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아브라함은 다른 선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입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라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습니다(창세기 13장 12절). 돌멩이와 먼지,
여기 저기 듬성듬성 그것도 손바닥만한 목초들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불안합니다. 무척 위험하기도 하고 어쩌면
태만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부르심을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 1) 얼마나 허술한 약속입니까! 한 장소에 정착하지 않은 교회를 위해서.

소돔은 무엇입니까? 에스겔 예언서의 예루살렘을 벌하는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겔 16, 49-50) 얼마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큰지 우리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죄악이 심히 중한지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 눈으로 보겠다’고 하십니다(창 18, 20).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원인은 탐욕과 권력욕
불의를 행함, 사회적 억압, 소비(낭비)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기회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손님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
것입니다.  소돔의 죄악은 이스라엘이 경험한 첫 번째로 기록된 대학살입니다. 그래서 소돔에 심판이 내렸습니다. 그러나 누가
압니까?  외국인이 된다는 것 또는 손님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 주의 깊게 다른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롯의 친절과 방문자들에 대한 롯의 존경입니다.  롯은 그들의 좋은 기독교적인 행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롯은
인간의 한 예입니다.  롯은 부유함과 안정으로 모든 면에서의 탈선 속에서 ‘좋은 행실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롯은
교리문답의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며, 마지막 순간에 환영받지 못한 손님들을 보호해 준 사람입니다. 성서에서 손님은
하나님의 천사로 복을 받았고(히 13장 2절) 그래서 복을 전하는 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자신의 삶의 위험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롯 자신만이 깨달았습니다. ‘손님처럼 있다가 심판을 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손님은 집으로 들어오고
손에는 막대기가 들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찬양하는 언제나 사방각지에서 오는 외국인들, 나그네들,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잔치입니다. 손님들의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거룩한 존경을 교회가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우리들끼리 만의 성만찬의 축제
때문입니다.  죄 용서함을 우리들끼리만 주입시켰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특별히 우리들은 외국인들 알지 못합니다. 어떤 교회가
성만찬을 단지 자신만을 위해 그리고 종교적 보장을 위해서 할 때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성만찬들은 매우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올바른 성만찬은 반대로 우리들이 손님들을, 낯선 사람들을 사방각지로부터 초청하는 것을 잊지 않은
만찬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랑의 하나님은 롯의 간청을 받아들여 작은 도시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롯은 말이 없습니다. 롯은 완전한
주인공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믿음과 삶의 아브라함 같은 주인공의 한 예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와 인내의
증언자, 참여자, 실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자매들, 형제들 여러분들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여러분의
집일지라도 이 교회에서 이 작은 도시에서 발견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자신의 모든 연약함으로 결국 손님들을 두둔하고 편들려는 사람들, 그리고 집 없는 사람들, 소수 민족들이 마치
일시적인 거처로서 가장 작고 가장 빈약한 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업신여김과 죽음의 고통이 일시적으로 우리 가운데 거했습니다.
교회가 여기에 예배당을 가졌다면 여러분을 위해 마치 소알처럼 작은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닥다리 교회처럼.

    하나님의 순종, 사랑의 유머, 신실함을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강건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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