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기준

  • 한인 예배 (2003년 11월 23일)
  • 마25:31-46
  • 설교자: 다빗 유레흐

2003-11-23
제목: 심판의 기준
본문: 마태복음 25:31-46
<본문>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기독교회의 전통은 마지막 교회 예식 속에 교회연도의 끝을 상징적으로 연결시켰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강림절 첫번째 주일을 축하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연도의 마지막 주일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말하는 세상의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과  행위의 가장 높은 심판자는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의미하는 참으로 행복한 고백입니다.
인간이, 혹은 인간의 심판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친구나 적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우리를 위해 베들레헴의 가난한 아이로 세상에 오신, 우리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한,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도록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이렇게 선하고 사랑이 많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주님이 우리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실까요?
오늘 본문의 비유 말씀이 바로 그것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비유는 최후 심판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위협이나, 마지막에 모든 것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것은 아닙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두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최고의 주권 심판자는 모든 인류의 형제가 되셨고, 결국 그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리 행위를 심판하시는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실천했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유 말씀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양치기의 양과 염소를 가르는 작업은 그 유래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밤에 염소는 천막에서 밤을
보내게했던 반면, 양들은 밖에 내 놓고 밤을 보내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치기는 저녁에 염소와 양을 분별하는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양치기가 가축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 얼굴 앞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십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사랑으로 가득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셨고, 비웃음과 냉대, 미움까지도 감당해 내셨으며, 죄악되고 약한,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 채찍질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셨으며,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으셨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도 형제와 구세주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또한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안에는 사랑이 가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불행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는 그에게서 예수님이 대신해서 희생하신 형제를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의 고통을 냉담하게 바라보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형제애를 발휘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웃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자신의 구원 약속에 대한 걱정만을 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찌됬던 그 모든것에서 나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야하고, 모든 사람들을 도와야하며, 그래야 하나님께서 상급을 내려주신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심이고,  자기 편의만 생각하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성공적으로 죄를 피하고, 규칙적으로 교회에 다니며, 또는 훌륭한 기도를 할줄 아는 사람이라고 심판에 통과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그분의 사랑을 배운 사람만이  그 심판에서 통과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자신의 사랑의 실천으로 겸손하게 보답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물어볼 것입니다. : 우리가 어느 때에 주를 보았습니까?
그들은 어느 때에 주를 보았는지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건 바로 그들이 어떤 공적이나 상급 때문에 봉사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믿음의 진실성과 정직성은 정말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아주 작은 일에서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가 얻기 원하는 영원의 상급 때문에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체험하는 진실된 믿음의 결과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는 다른 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 구절에 네 번이나 „내가 주릴 때에…“ 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 비유를 읽을 때 우리는 끝에가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 말씀을 암송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 그 특별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교리 문답집 같은 것을 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리 문답집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과 대답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이 비유 말씀이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기억속에 점착되어 늘 남아 있어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사람을 마시게 했는지, 나그네 된 사람을 영접하였는지, 병든 사람을 돌아보고, 옥에 갇힌 사람을 살폈는지에 따라 심판은 결정 됩니다. 
이기적이 아닌 섬기는 사랑의 실천은 인도적 행위(인간애)의 표명 이상이며, 바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심판을 결정하는 기준은 교회의식의 규율을 잘 지켰느냐도 아니며, 열렬한 신앙적 표현들도 아니며, 정말 보잘 것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진정으로 살펴보지 못하는 그럴듯한 자선행사도 아닙니다.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은 사랑으로 실현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도움과 원조로 나타나는, 무관심과 무시와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과의 연대입니다. 

또 이 비유에는 특별함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 비유 말씀은 모든 인간, 즉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모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을 꼭 섬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 기도교인의 삶은 예수님을 말이나 형식적인 예식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의 실천으로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경직됨 속에서 예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의견이나, 가르침 같은 이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 즉,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믿는다‘라는 소극적인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기에 내 인생이 그 믿음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사랑의 봉사를 최후의 심판을 미리 대비하기위해, 혹은 하나님 나라를 가기위한  준비로서, 또 세상에서의 칭찬을 받기 위해 실천하지 않습니다. 
선행과 공적이 목표가 아니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분명하고 적극적인 인생이 목표입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 자신의 인생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절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처럼 기독교인도 다른 이웃에대해 배려하고 존중해야 하며, 특히 그 이웃이 곤경에 처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올바르지 않은 일이 우리 이웃에게 일어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호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상황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때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이 자신을 위한 계획적인 행동이 되지 않도록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경 본문 말씀과 기도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메시지를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탄생 2천년이
넘도록 강하게 지켜져 온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 때문에 이 교회 안에 모인 것이며, 이제 정확히 한달 후가 될 그
분의 탄생일을 즐겁게 상기할 것입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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