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한 것

  • 한인 예배 (2003년 09월 14일)
  • 행10:1-35
  • 설교자: 이종실

030914 삼위일체 열두번째 주일
본문: 사도행전 10:1-35
제목: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한 것

<본문>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17 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쌔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30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설교>
저는 체코교회를 개혁교도들의 종친회에 비유를 합니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의 경험하나로 체코교회를 자기식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지 30년 50년 또는 그 이상되는 교회들의 예를 들어 설명을 덧붙입니다.
처음에 교회개척 당시 그 교인들이 이제는 교회의 중진이 되었고 그 자녀들이 대를 이어 교회를 섬깁니다.
이 개척교인들이 구심력을 갖는 교회는 대체로 새로운 사람들이 정을 붙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뚫고 들어가기 어렵고 굳어진 관례를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개척교인들의 폐쇄성이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경향이 요즈음 한국교회에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몇 년전 한국가서 체코교회의 폐쇄성에 대해서 설명을 하니 교인들이 자기교회 이야기 하는 것 같다는 반응을 하였습니다.

600년 체코 개혁교회역사는 생존이 역사의 과제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생겨났던 교회의 관습과 제도들이 이제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거대한 시설물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교인수의 증가가 인구증가율을 따르지 못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나마 이제는 그 증가율 마저 없어 앞으로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주 5일근무제라는 사회의 변화가 큰 폭풍이 되어 교회를 강타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대안을 제시하고 대책을 세우는 일에는 모두 손을 놓고있습니다.
600년 늙은 교회의 현상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인 수는 늘지않는데 목사숫자는 늘어나는 현상입니다.

저는 요즈음 한국교회가 점점 쇠퇴해가는 현상을 이곳에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의 대화의 변화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근에 해외에 나오는 분들을 만나보면 교인들을 만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이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왜 교회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그나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마저도 떠나고 있는가?
저는 이 질문을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제가 섬기는 이 교회가 더 부흥해야 될 목적으로 이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프라하의 좁은 체코한인 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각자 심각하게 해야될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의 내부인들이 외부인들을 기꺼이 맞이하는 전환점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장소도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을 고백할 때마다 그들은 언제나 유대인이었으며 유대인 외에 결코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회의 출발이 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우리들은 이방인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보신적은 없습니까?
한번은 한국에서 여행오신 분을 따라 유대인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입장료가 너무 비싸 내부가 궁금했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하다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머리에 납작한 접시 같은 것을 얹고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면서 유대인들의 초대교회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상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검은 옷과 모자를 쓰거나 이런 납작한 접시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면 교인들이 아마 한마디 하지않을까? “당신 유대인들이 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느냐? 당신들은 회당으로 가라!”
초대교회 안에 이방인들이 있는 것을 유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 당시를 혼자서 그렇게 역으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교회 안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고 왜 있게되었습니까?
유대인들 만의 교회가 벽을 허물고 그 문호가 이방인들에게 개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전환점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 입니다.
분명이 그것은 세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강조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유대교의 이단으로 남았었다면 세상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교회가 존재하지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된 이 사건은 매우 하잘 것 없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러나 어떻게 복음이 이방인들과 대화되었는지, 어떻게 우리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는가를 생각한다면 역으로 우리가
어떻게 교회 밖의 사람들을 맞이하는 전환점을 만들어 갈 것인지 이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이 굉장한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

피장(무두장이) 시몬이란 사람의 집에서 베드로가 묵고있을 때였습니다.
정오쯤 되자 지붕위로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그 시간은 사람들이 점심을 준비하는 때였습니다.
그가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무아지경에 빠졌고 그리고 그는 환상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음식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서 땅으로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12절 본문에  “그 속에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짐승과 하늘의 날짐승이 들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렸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14절 입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율법에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부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음식은 레위기 11장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언급되어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은 굽이 갈라진 쪽발이면서 새김질하는 짐승입니다.
쪽발이면서 새김질을 안하는 짐승이나 아니면 새김질을 하는데 쪽발을 갖지않는 짐승은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오소리 토끼 낙타 돼지는 먹지못합니다.
물고기도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지만 둘 중에 하나가 없는 것은 먹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새 가운데서도 독수리 매 종류 까마귀 타조 올빼미 갈매기 부엉이 백조 펠리컨 박쥐는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쥐 도마뱀 악어 카멜레온도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어떤 먹거리는 정결하고 어떤 것은 정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통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금지된 음식을 엄격히 지키고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가공된 음식이 있기에 그들은 성분을 분석하여 검사한 음식을 선택해서 먹습니다.
유대인 지구에 가면 이 음식 율례를 엄격히 따르는 유대인 식품점이 있습니다.
그 식품점에는 가공한 음식은 성분을 검사해서 금지된 성분이 없는 식품을 판매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러한 음식에 관한 법을 매우 엄격히 지켰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표현대로 음식이 정결하고 정결하지 않는 위생적인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음식뿐 아니라 모든 정결하지 못한 경우를 규정하여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허락하였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정결하지 못한 음식을 먹었다면 그 사람이 정결하지 못하기에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게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정결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된 경우 가운데 음식에 대한 규정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경우는 설령 그 규정을 지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시 정결해 질 수 있는 예식 규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체를 만진 사람은 옷을 세탁해서 입고 저녁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음식 만큼은 불결하게된 조건이 정화되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금지된 음식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큰 보자기에 담겨 내려오는 그 불결한 것을 “잡아 먹으라”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대답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매우 놀라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절)
이러한 대화가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배고픈 베드로에게 이 음식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못먹을 것을 주면서 먹으라고 놀리는 그런 재미있고 짓궂은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바로 이 환상 안에 이 후로 세계역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서 피장 시몬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19, 20절) 하셨습니다.
그가 내려가 보니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성령님이 보내신 사람들이란 말인가?” 베드로는 마음 속으로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22절에 나옵니다.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보내서 왔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온 유대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서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다가 말씀을 들으라는 지시를, 거룩한 천사에게서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정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들은 절대로 이방인들을 방문하거나 함께 음식을 먹지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정에 없이 불시에 그것도 이방인에게서 초청을 받고 함께 가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의 음성에 따랐습니다.
그들을 불러들여 묵게하고 다음날 가이사랴로 함께 떠났습니다.

그 다음날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자기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는 도중에 베드로는 계속해서 어제 보았던 그 환상을 생각했고 마침내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28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 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28절)

 “우리는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해서는 안된다” – 이 베드로의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매우 주의 깊게 주목해야됩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같고 동등하기에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꿈속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5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 이 구절은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나누었던 것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절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눅 15:2) 성경은 수근거리며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대단한 스캔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난과 수근거림을 상관하지 않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나눈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똑 같기에 평등하기에 차별을 해서는 안되기에” “하나님과의 교제에 그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이런 대답들은 틀리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 예수님의 마음의 깊이를 이해하는 대답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청을 받으려면 사전에 죄 용서와 성결해야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깨끗함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식탁에 참예하는 것도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없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속죄의 희생이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자 예수님은 자신이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죄인들을 초청하였고 그들과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 인간의 죄가 용서받고 깨끗하게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들었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는 하늘로부터 들려온 그 말씀의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모인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용이 본문 말씀 34절과 35절과 그 이하에 나옵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는 분이시고,
그분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느 민족에 속해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34,
35절)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세상의 민족과 인종의 구분 안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차이는 인간의 집단 안에 있는 것입니다.
차별은 성과 나이 사회적 지위와 학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한 차별은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세상에서 차별이 사라지지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 차별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차이점은 우리들 사이에 있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차이를 결정적으로 중요한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차이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각자 개 개인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고넬료가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로움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게 돌아왔다는 의미는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이 했던 것 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님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으려고 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의 삶만을 바라보며 그 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냐 우리 각자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그리고 편을 만들고 있지는 안습니까?
교회로 모이는 것이 무슨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기득권이 되는 것 처럼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겸손히 노력할 때  우리들은 편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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