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결혼

  • 한인 예배 (2001년 09월 23일)
  • 창 29:20-35
  • 설교자: 이종실

01년09월23일
삼위일체 후 열 다섯번째 주일
본문 창세기 29장 20-35절
제목 “야곱의 결혼”

<공동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부족함까지도 용납하시고
역사를 주관해 가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신실하심 앞에서 겸손을 배우게 하시며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본문>
“야
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찾으니 애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와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창 29:20-25)

<설교>
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테러와 그에 따른 보복전쟁이 선포되어 지금은 전쟁 아닌 전쟁의 공포에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전 통보 없이 공격하겠다.” “보복은 테러를 뿌리

기위해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쟁은 장기간 지속될것이다.” “미국의 보복 전쟁에 협조한 나라들을 보복을 하겠다.” 이전
전쟁과 달리 전쟁의 상대가 불분명해서 “새로운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러리즘과 패권주의와의 이번 전쟁은 전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전쟁 심리전을 펴고있습니다.

은행창구는 연일 돈을 인출하는 사람들로 붐벼 미화계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인출신청을 하고 이틀 뒤에나 현금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시아와 남미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미국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럽경제도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새 밀레니엄의 시대가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것 처럼
희망을 불러 일으켰던 년 초의 화려한 행사들은 결국 어떤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이벤트 행사에 불과했음이 새 밀레니엄의 첫해도
넘기지 못하고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우리 개인들의 삶은 망망대해 위에 떠있는 한조각의 나룻배와 같은
처지입니다.

우리들의 가치관과 삶의 의지가 세파의 흐름에 의지하고있습니다. 세파의 흐름에 우리들의 삶이 독립적이지 못하기에 우리들의 삶은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세상의 흐름에 의존적인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은 어떻게 성취되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야곱의 결혼 이야기를 통해서 이 아침에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곱이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낯선 땅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약 700키로미터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벧엘” 이란 곳에서 야곱은 큰 기쁨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28장 14-15절)  여행의
목적지인 외삼촌 라반의 집, 하란에 도착한 이야기가  창세기 29장 1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저자는 많은 야곱의 하란 도착 소식
가운데 하란의 우물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구멍을 향해 공을 몰고 가는 골퍼들 처럼 우리
하나님은 야곱을 700키로 미터 떨어진 마지막 종착지 하란 그 중에서도 우물가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란
도착 첫 이야기가 외삼촌 라반의 만남이나 그의 집 아니면 하란에 있던 하나님의 제단이 아니라 우물이었습니다. 우물은 사막
여행길을 가는 나그네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 우물에서 야곱은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나고 이 만남은 그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물가에 물을 기르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녀의 미래를 예언하는 또 다른
우물이었습니다.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영생의 물을 주는 우물, 예수 그리스도곁에 우리들은 교회로 모여있습니다. 교회가
야곱에게 약속한 축복을 성취해 가는 하나님의 첫 인도지 우물가임을 발견하는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세기 저자는 29장 야곱의 하란 도착 장면을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1-2상반절)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야곱을 하나님이 인도하셨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물을 야곱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교회를 하나님의 복의 시발점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야곱은 하란에서의 자기의 인생을 결정짓는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납니다. 우물 아구를 막고 있는 큰 돌을 치우고 라반의 양떼들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라헬에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먼
여행길을 틀리지 않게 목적지 까지 왔다는 안도감과 목적을 했던 사람을 찾았다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해외에서 살다 보면 생각지 않던 일가 친척들이 찾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헬도 너무 기뻐 야곱의 소식을 달려가서 아버지 라반에게 전하였습니다. 라반의 기쁨도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달려가 야곱을
환영하고 안고 입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야곱은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여행길, 형의 복수의 두려움을 다 잊을 만큼
기뻣습니다.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듯 기쁨은 또 다른 고생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야곱에게 라반의 집에서의 삶은 인생을 새롭게 배우는 여정의 시작을 의미하였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시작한 일입니다. 야곱은 뼈중의 뼈 살중의 살인 아내를 얻는 대가로 일을 시작합니다.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라반이 허락을 합니다. 언니 레아가 있었지만 야곱은 하란에 도착해서 처음
우물가에서 만난 라헬을 사랑하였습니다. 라헬을 사랑하였기에 칠년을 하루같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라반을 위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한 칠년의 노동은 단지 노동의 가치만을 지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은 라헬과 가정을 이룬 후 낯선 곳에서 살아갈 야곱의 꿈과 인생의 계획을 수없이 그려보고 지우고
다시 그려본 세월들이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그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자신의 기다림과 희망이 사기 당하는
날이었습니다. 학벌과 이력과 출신과 가문을 속이고 한 결혼의 결과가 가져다 주는 인간적인 배신감과 심리적인 충격을 고스란히
경험하는 날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쳐 나온 악몽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형 에서를 속인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의 결혼의 기준이 잘못된것일까? 아니면 내가 라헬을 사랑하지만 레아와 결혼할 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야곱이었더라면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에 대해 당혹스러운 장면을 접하게
됩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그의 복을 탈취한 사기꾼 야곱이 자신을 속인 라반에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질문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삭의 시각장애를 이용하여 그를 속인 것 처럼 라반은 야곱이 어두운 장막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여 야곱을
속였습니다. 분명 이 사기사건을 통해 형을 속인 자신의 과거가 한번쯤 기억났을것임에도 불구하고 라반이 자신을 속인 것을
따집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는 인생에 대해 한번쯤 뒤 돌아 볼만도 한데 그는 라헬과 결혼하려고 했던 본래의 자신의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7년을 라반을 위해서 일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리도 야곱처럼 무엇인가 원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삽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과 함께 그
상황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어떤 경우엔 하나님에게 항의도 하고 기도로 간구를 하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은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하기보다 오직 라헬을 아내로 삼고 싶은 자신의 생각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원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 결과적으로 무려 14년을 보내기로 작심을 하고 있습니다.


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입버릇처럼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저와 여러분에 대해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을 얼마나 가증스럽게
여기고 계실지를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 하지만 야곱처럼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게으름, 자신의 잘못을 모두 정당화 시키는 일을 서스럼 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테러주의자들은 신의
뜻으로 자신들의 테러를 정당화 합니다. 이 테러에 맞서 전쟁을 선포하는 미국 대통령은 정의를 위한 거룩한 전쟁으로 미화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않고 하나님의 뜻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견주어 볼 때 차라리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
않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야곱이 더 인간미가 넘쳐보입니다.   

아버지의 축복과 장자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아버지의 신체장애를 이용해 아버지를 속인 사기꾼 야곱은 바로 우리들의 얼굴이요 우리들의 이름입니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기꾼 야곱의 얼굴에 하나님의 뜻으로 분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를 알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도 부자 청년처럼 거듭남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교리화 시키고있습니다.


자가 아버지를 떠나갈 때 아버지와 단절을 한 것도 아니고 스캔들때문도 아니며 탕자가 탕자가된 것은 아버지것을 잘못 사용하였던 것을
알기에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자기의 뜻대로 모든 것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빌려 그 마음을 감추어 보려고 하고있습니다.


간들이 자신의 이름을 온 천하에 떨치기 위해 바벨탑을 세우는 일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아는 오늘날 신자들이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내기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전히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자기 계획대로
해보려는 인간의 모습을 신의 이름으로 감추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정말인 것처럼 말해도 듣는 사람은 그것이 거짓말인지 아니면 빈말인지 느껴집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하는 우리들의 신앙행위가 자기의 뜻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야심찬 행위는 단지 야심 찬 마음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두 번 다시 보고싶지 않을 가증스러운 우리들의 얼굴을 우리 하나님은 피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야심들은 고통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까지도 하나님이 거두어 주십니다.

레아는 라헬처럼 매력이 있지않았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것은 인생의 현실입니다. 언제나 사람의 등뒤에 서있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고통스럽고 이해하지 못하는
질서가 존재합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한 여인의 마음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남편의 사랑을 위해 기도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며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 생각을 바꿀 수 있기를 그녀는
마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남편에게 차별대우를 받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아기를 잉태하지 못하였다.”(31절)라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고 그리고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무언가 희망의 요소들이 있는
우리들의 인생의 현장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여호와께서 야곱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빚어진 상황에 직접
개입하고 계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레아를 버리지않으셨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여인의 아픔을 아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아들을 계속해서 넷을 낳았습니다. 그동안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정하지 않았지만 30장
1-2절에 이 일로 라헬에게 질투와 시기심이 일어나고 급기야 야곱과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14년을 기다리고 일해도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던 라헬 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던 그때 처음에 라헬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처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처음처럼 지속됩니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부유함과 가난이 길고 짧은 시간으로 반드시 교체되며 지나갑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이 있었고 레아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기에 커다란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히 자녀들의 출생에 늘 하나님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후에 라헬에게도 레아 처럼 하나님께서 아들과 딸을 주셨습니다. 모든 아들들이 하나님의 백성 곧 12지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가
그리고 그 추구의 방식과 가치관이 그리고 삶의 위치가 각기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를 이룹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신 약속하신 복을 성취해가는 것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가르침의 의미를 자신의 삶 속에 뿌리내려
사기꾼 야곱의 얼굴과 이름을 가진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눈이 어둡고 잘생기지 못하여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녀의 몸에서 하나님이 주신 아들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였습니다. 레아의 몸에서 난 유다는
누구입니까? 12지파 가운데 그가 바로 다윗의 조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의 시작이었습니다. “곱고 아리따운” 라헬을 얻고자
하는 야곱의 계획을 통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못생기고 눈도 나빠 사랑 받지 못하던 야곱의 여인 레아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문,
유다를 탄생시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차근 차근 진행시켜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라하 꼬빌리시 교우여러분,
형과 아버지를 속인 야곱, 신뢰할 수 없는 라반,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레아, 곱고 아리따워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나 아이를 낳지못해 질투와 시기심에 가득찬 라헬,
서로 속고 속이고, 갈등과 분쟁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공동 운명의 창세기의 인간사회를 저와 여러분들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 우리들의 모습과 다른점이 없음을 우리들은 이 아침에 발견하였습니다.


리고 놀라운 사실을 우리들은 또한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한 야곱과의 약속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장 14-15절) 이
약속만이 부족하고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욕망과 갈등과 불화를 통해 하나 하나 성취되어 가고 있다는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오늘
아침 우리들은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 성취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신앙, 불신앙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고 못생기고 눈이 나쁜 레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한 채 라헬을 얻고자 하는 야곱의
인간계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생에 개입하셨습니다. 야곱의 운명은 광야에서
제단을 쌓던 그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들의 믿음, 우리들의 헌신, 우리들의 기도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설교 후 기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을 불러주시고 우리들을 통해 세상의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신앙과 헌신과 노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임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따를 때 우리들의 믿음과 헌신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며 부족한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위탁의 말씀> 고린도후서 6장 17-18절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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