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기도로 한 몸 이룬 안디옥교회

  • 한인 예배 (2003년 09월 28일)
  • 행13:1-12
  • 설교자: 이종실

030928
본문: 사도행전 13:1-12
제목: 예배와 기도로 한 몸 이룬 안디옥 교회
<본문>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쌔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설교>
저희가 지난 주에는 바나바와 익명의 기독교인 즉 주의 손이 함께한 교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안디옥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세운 안디옥 교회의 모습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후에 사도가 된 사울과 바나바가 1년 동안 그 교회에서 가르칩니다.
이때 비로소 여러모로 교회 꼴을 갖추게 되어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소리를 듣게됩니다.
그리고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던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옵니다.(행12:25)
그 후에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안수하여 복음을 다른 지역에 전파할 수 있도록 파송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후 얼마 만에 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 오랜 세월은 흐르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모인지 얼마되지않아 더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는 교회가 되었고 심지어 이제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는가? 

안디옥 교회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더 많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명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명단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명단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받은 <바나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있었습니다.
니게르(Niger)라는 말에서 Negro가 나왔습니다.
니게르 시므온은 즉 흑인 시므온이었습니다.
히브리 이름에서 <시므온>은 전통적인 유대인 이름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프리카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은 그레네(키레네) 출신 <루기오>가 나옵니다.
그레네(키레네)는 아프리카 북쪽지역에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시므온>과 <루기오>는 아프리카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전통 유대인의 이름인데 <루기오>는 아닙니다.
<루기오>는 라틴 이름입니다.
여기서 히브리 이름 <시므온>과 <루기오>의 이름을 나란히 기록한 것은 문화적인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안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루기오> 다음에 나오는 사람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입니다.
헤롯이라는 이름을 지닌 통치자가 신약 성경에는 여러 사람 나옵니다.
첫번째가 헤롯 1세(마2:1; 눅1:5)입니다.
헤롯 1세는 주전 37-주후 4년 팔레스틴을 다스리던 로마의 봉신 군주였다.
헤롯 1세가 다스릴 때 예수께서 탄생하셨다.
두번째가 헤롯 1세의 아들 헤롯 안디바(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주전 4년-주후 39년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렸다.
그에게 분봉왕(1/4 군주)이라는 칭호를 붙입니다(마14:1; 눅3:19; 9:7; 행13:1)
세례 요한을 처형한 사람이 바로 헤롯 안디바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나엔>은 헤롯 안디바의 젖동생 이었습니다.
젖동생이란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어린친구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릴 때 남자 친구를 뭐라고 하나요? 여자 친구는요? 
이를 미루어볼 때 마나엔은 궁전의 귀족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이름이 <사울>입니다.
그는 다소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그는 정통 바리새파 유대인이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가장 정통 랍비교육을 받았고 기독교인들 박해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명단에 나오는 이름을 통해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사회적 신분으로 매우 다양한 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한인교회들은 인원 몇 명 안되어도 교파가 다르면 둘로 셋으로 교파에 따라 나뉘어집니다.
게다가 지역출신에 따라 또는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나뉘어집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경험한 다양성은 곧 갈등과 다툼과 분열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유럽교회가 경험한 문제입니다.
유럽사회는 민족=교회(카톨릭과 개신교회)= 개신교회 교파가 일치되어있습니다.
예를들어 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 민족과 마쟐민족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슬로바키아 민족은 루터교회로 마쟐민족은 칼빈개혁교회로 일치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일치되지않은 북아일랜드 같은 지역에서는 지금도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럽교회가 교회간의 일치를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이런 분열을 심각하게 겪고있기 때문입니다.

체코 개혁교도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 다른 외부 사람들이 그 예배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가 어렵다면 이것은 완전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코교회와 함께하고 체코교회와 호흡을 하는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의 선교적 교회론적 존재의의가 바로 이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교인이름을 나열하는 누가의 의도는 교회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민족적으로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 신분으로 또는 출신지역으로 통일이 되어간다면 그 교회는 병든교회입니다.
유대인으로 민족이 통일된 예루살렘 교회에 비해 다양한 이방민족으로 구성된 안디옥교회가 타 문화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안디옥교회는 교회의 다양성이 다툼과 갈등과 분열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다이나믹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질문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읽어드립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2)
여기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표준새번역에 <주께 예배를 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체코어 성경도 <섬긴다>를 <bohoslu&#382;ba(예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식이란 단어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은 단지 음식을 먹지않는 금욕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금식은 기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도도 그냥 하는 기도가 아니라 음식을 포기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해 하나님에게 매달리고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만을 의지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역대하 20장 3절에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 군대가 쳐들어와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자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전쟁이 여호와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에스더 왕비가 민족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삼일간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 왕 앞에 나갔습니다.
<주께 예배를 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이 말씀은 주일날 우리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 지를 말씀해 주고있습니다.
그냥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의 다양성은 한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예배 드리고 기도할 때 한 몸이 되고 폭발성을 갖는 것입니다.

다양한 교회의 구성원들이 한 몸이 된 것은 그들 모임이 이해관계가 같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나가 되는 이 세상의 다양한 조직과 단체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한 단체라면 그들은 바벨탑을 세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와 기도 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함께 겸손하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하나님께 복종할 때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가장 우선순위를 주일예배와 말씀 읽고 기도하는 일에 두고있습니다.
출애굽기 강해 설교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을 <우리가 주일을 지키면 주일이 우리를 지킨다> 입니다.
외롭고 고독한 해외생활에서 오는 문제들을 교회의 모임이나 행사나 다른 일에서 찾으려는 유혹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어서 안되는 것은 예배와 말씀과 기도가 가장 근본적이고 모든 것에 우선 한다는 사실 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왜곡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졌던 나의 모습, 자신도 모르게 비뚤어진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발견하고 다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때 예배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배와 기도 중에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게됩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배와 기도 중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 보냈습니다.”(3)
여기서 한국교회가 들어야 할 말씀은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을 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보내는 것과 교회가 보내는 것은 같은 것 같지만 사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소속된 한국교단 총회 세계 선교부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행정적인 지원과 관리를 하고 후원교회들을 관리하는 일을 만 4년이 넘게하였습니다.
100가정이 넘는 선교사님들에게 선교비를 송금할 때는 몇 억이 되는 돈을 수표 한 장으로 들고 은행에 다녀보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교회와 단체들이 400개가 넘었습니다.
이 교회와 단체들 그리고 선교사님들을 관리하는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 갖게 된 가장 큰 문제의식은 “선교는 누가하고 선교사는 누가 파송하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말들은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고 파송도 하나님이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과 선교사들의 실제의식은 선교는 선교사가 하고 파송은 교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는 후원하며 파송하는 교회 눈치살피기에 바쁘고 교회는 선교사를 해외파송한 자기교회 부목사로 생각을 합니다.
특별한 선교에 사명이 없이 자식 교육을 위해서 또는 한국목회에 문제가 있어서 탈출구로 해외 선교사로 나오고 교회는 선교사의 소명감보다 교회의 담임목사나 장로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우선해서 파송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이 잘못되었기에 아무리 선교의 이론과 실제와 그 대안을 제시해도 시정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파송한다고 해서 모두가 성령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 보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임받고 그것을 고백하는 교회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파송하는 오늘 안디옥 교회 모습에서 성령의 파송의 위임을 받은 자의 진지한 자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교회가 선교를 얼만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위탁 받았다는 고백과 그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이지만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체코교회와 더불어 체코선교를 하도록 목사인 저를 여러분들은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빗 유레흐 전도사님을 동역자로 파송하셨고 보흐니쩨 병원선교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성령의 하신말씀으로 듣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여러분들이 동참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교회가 성령의 말씀을 따라 선교를 할 때 교회에 나타나는 태도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안디옥 교회에서 누구를 파송하였습니까?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들을 파송하라고 했을 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들을 떠나보내고 싶을 교인들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들 곁에서 가르치고 지도해 주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들은대로 그들을 파송하고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4절이하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가 살라미에 도착했습니다.
살라미는 키프로스 동해안에 있는 항구였습니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온 섬을 두루 다니다가 바보로 갔습니다.
그 무렵에 키프로스를 통치하던 지역 총독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키프로스에서 박해로 흩어진 기독교인들이 이전부터 선교를 하였습니다.(11:19)
서기오 바울은 아마도 이 섬에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번지기 시작한 새로운 일에 대해 알았을것입니다.
그는 사울을 초대하였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예수(또는 엘루마)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마법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늘 곁에 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미루어볼 때 바예수(엘루마)는 궁중 예언자이거나 궁중 마법사였을것이라고 성서학자는 설명합니다..
이것은 마법사 엘루마가 키프로스 통치에 큰 권위를 가졌음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 엘루마가 바나바와 사울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 8절은 “이름을 엘루마라고 번역해서 부르기도 하는 그 마법사가, 그들에게 훼방을 놓아서,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선교여행에서 그들은 매우 영향력있는 특별한 마법사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첫번째 선교사들의 첫 선교지에서 겪은 첫 어려움이 마법사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선교의 첫번째 어려움이 왜 하필 마법사의 방해입니까?

마법사의 방해는 교회의 선교가 영적 전쟁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가 개인적인 신앙생활에서도 늘 체험합니다.
제대로 신앙 생활해 보려고 마음을 먹으면 꼭 방해되는 일이 생깁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설교를 할 때에는 틀림없이 많은 교인들이 결석을 합니다.
사탄이 저를 낙심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를 낙심시켜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우리 교회를 넘어지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인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마음을 다잡다가 마음에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7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겠다는 마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탄은 꼭 시험을 합니다.
하나님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던 욥을 사탄이 시험하였습니다.
이 영적전쟁이 극명하게 드러나면 하나님의 축복이 가까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안디옥 교회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로 모이는 구성원들이 다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으면 유유상종하고 끼리 끼리 모이는 교회가 됩니다.
나의 신앙의 눈높이로, 나의 도덕적 기준으로 형제와 자매들을 절대로 판단하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함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도록 우리들 곁에 데려다 놓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교회를 찾은 사람들을 가로막는 문턱이 되지않게 하십시다.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온전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힘들고 어렵고 때론 동의하기 쉽지않지만 말씀 대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켜가는 그런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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