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안에서 자유하는 신앙인

  • 한인 예배 (2003년 10월 12일)
  • 행 13:44-14:7
  • 설교자: 이종실

031012 (열일곱번째 삼위일체 주일)

본문: 행 13:44-14:7

제목: 말씀 안에서 자유하는 신앙인

<본문>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설교>

바울과 그의 일행은 키프러스 섬에서 소아시아(현재 터어기)로 건너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도착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13장 16절부터 오늘 저희들이 읽은 본문 직전인 43절까지 나옵니다.

바울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관점으로 언급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나라의 역사를 통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유대인들의 역사 이해의 논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논리로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있는 예언자에 의해 예언된 바로 그 오실 메시아임을 설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설교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어떻게 성취 되었는지 설명 하였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고난의 종의 모습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표준새번역 사 53:6)

하나님은 이 종의 중보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렸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과 그 증언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의 설교의 결론이 사도행전 13장 38절과 3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어떤 일에 있어서도 결코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를 힘입어서 의롭게
됩니다.” (표준새번역 행 13:38-39)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메시지의 중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교제 안에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의 근거는 오직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 그 분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세의 율법으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설교의 요지였습니다.

바울의 이 설교를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한 주가 흘렀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 바울이 다시 회당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주제에 대해 질문 하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개종자들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설교에 대해 호감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모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은 바로 바울이 설교를 하고 한 주가 지난 뒤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 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한 주동안에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초대를 받아 같은 설교를 반복했을 때 매우 부정적인 반응이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온 성읍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것은 사실입니다.

한 주간이 지난 그 다음 안식일에 사람들이 이전 보다 더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44절은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동네 사람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전 주일 예배에서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뿐 아니라 회당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이방인 역시 회당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닥쳤습니다.

오늘 말씀 45절에 “그 무리를 보고 유대 사람들이 시기심으로 가득 차서, 바울과 바나바가 한 말을 반대하면서 비방하였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난 주에 유대인들은 특별히 바울에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친절하게 그를 받아들이다가 갑자기 반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 원인을 <시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사도 바울의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한 분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한 분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설교는 지금까지 할례 받지않았다고 경멸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않는다고 경멸 받았던 이방인들, 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스스로 자신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지금까지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들의 노력과 열정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집을 나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맨발로 뛰어나가 그를 환영하고 온 동네 사람을 불러모아 축제를 벌리는 아버지를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며 섬기던 첫째아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그는 아벨을 죽인 가인처럼 마음 속으로 동생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오하는 자는 이웃을 증오합니다.

이러한 증오의 형태가 시기심입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시기심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신에 대한 증오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뼈 속 깊이 흐르는 스타의식과 특권의식의 자기 중심적인 자기 주장이 하나님에게서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이웃을 향한 증오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시기심입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히면 나는 다른 사람을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않게 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공적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실한 신앙생활을 위한 노력과 열정이 시기심으로 변하였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신앙의 노력과 열정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것임이 판명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실한 신앙생활이 또 다른 자기 중심적인 자기주장의 표현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구원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죄의 용서 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위해서 내가 했던 것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했던 것,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지않습니다.

우리들의 눈은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앙생활을 위한 나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의 결과가 일방적인 은혜의 말씀인 복음을 거부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의 결과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인 평화 기쁨 그리고 의롭게됨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증오와 시기와 질투에 싸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들에게 먼저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당신들은 그것을 배척하고, 스스로를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으로 자인하므로, 우리는 이제 이방 사람들에게로 갑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으니, 그것은 네가 땅 끝까지 구원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표준새번역 행
13:46, 47)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선포되지만 그 복음이 강제로 마음의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복음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 목회자는 분석을 하고 설명을 할 수 있지만 그 원인을 목회자가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강제로  없애 버리지는 못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13장 46절 47절의 바울의 이야기는, 복음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지않으면 그 복음은 다른 곳으로 떠나갑니다.

주인이 혼인잔치를 배설하고 초대해야 될 사람들의 명단을 종들에게 주면서 초대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논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밭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집가고 장가가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 마다 다 이유가 있어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주인은 두 번 다시 그들에게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들에게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와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마태복음 8장 11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그 복음은 이방인들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방인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바울은 자신을 배척하고 복음을 거부한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10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의 간절한 소원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내 동족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선동이된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읍의 지도층 인사들에 의해 그 지방에서 쫒겨났습니다.

바울과 그 동료들은 동원된 공권력에 굴복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장면만을 본다면 그들은 실패자들입니다.

그러나 비시이다의 안디옥에서 설교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믿었고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 선포의 실패는 이방인들에게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어 기독교인이 되고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것을 바울의 노력과 그의 능력때문이라고 하지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이방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람은 모두 믿었다.” (표준새번역 행 13:48)고 누가는 주의 말씀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 믿지않아 멸망을 받았다는 식의 교리적인 가르침으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주의 말씀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패배를 겪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추방을 당하고 실패를 할지라도 복음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52절 말씀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에는 자신들의 계획과 생각이 좌절되는 아픔은 겪지만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의지가 더욱 굳건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추방당하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일어났던 일이 14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건의 기본적인 패턴은 13장의 비시디아의 안디옥의 사건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곳에서 역시 바울은 처음에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들(헬라 사람들)이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14장 2절에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패턴이 사도 바울의 초기 선교에 계속 반복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마치 세상의 이치를 득도한 수도사들처럼 박해 받으면 도망쳐서 다른 도시로 가고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가서 또 다시 복음을 전하고 아이러니칼하게 회당에서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고 믿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고
마음을 돌이키지않고 시기와 질투의 사신이 되어 그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두 사도의 모습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오늘 본문 14장 3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두 사도는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말하였다. 주께서는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놀라운 일을 하게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처럼, 주의 말씀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두 사도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기심과 우월심과 질투심과 열등의식으로 표출되는 자기 중심적인 자기주장과 자기 의로움을 벗어버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총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살 수 있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얼마나 자유하고 행복하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전파의 자신들의 계획이 좌절될 때 마다 그들은 불행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생업인 선교의 결과가 자신들의 열정과 노력과 능력과 설득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들 각 자가 자신의 계획과 열정과 능력으로 이곳에서 얼마나 큰 일의 결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여러분의 사업에 얼마나 큰 결실을 꿈 꾸십니까?

인간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여러분의 학업에 얼마나 큰 성취를 전망하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모이는 이 교회가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복음이 체코의 한국인들에게 그리고 무신론자들의 체코인들에게 얼마나 전달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할 때  하나님 자신이 일하시고 하나님의 기적으로서 성령의 평화와 기쁨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샘솟듯 솟아납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유와 기쁨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업을 경영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런 신자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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