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를 위한 변명

  • 한인 예배 (2004년 04월 25일)
  • 요 20:19-31
  • 설교자: 빠벨 뽀꼬르니

040428

이사야 53장

요한복음 20: 19-31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 때부터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친구들을, 동료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는 도마는 그들이 확인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기 시작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직접 만져보고 싶어했습니다. .

도마는 회의론자와 의심 많은 모든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교황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왜 그 자리에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는지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도마가 제자들의 모임을 소홀히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그 도마를 변호하고자 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구요?

다른 제자들을 한번 살펴 보십시요 : 그들의 믿음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시고  성령을 주시며 세상으로 그들을 보내십니다. –
그런데 그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난 그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해 또다시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숨어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두 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들의 기쁨은 무엇 이었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과 평강의 축복은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어떻게 행했습니까?

그들이 정말 믿음이 있었는지 대해서는 쓰여있지 않지만, 우리는 다만 그랬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들에게선 그 믿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도마가 왜 믿어야 합니까?

이 제자들이 교회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 입니까?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그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어쩌면 그 제자들이 도마를 전혀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의심이 많은 도마를 그 모임에 계속 끼워 주었고, 다음 주일에  모두 함께했던 것은 성령의 열매인지도 모릅니다.

도마는 그 때까지 12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서만 등장합니다. 앞에 잘 나타나지도 않았고, (베드로나 요한 처럼) 특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쌍둥이“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가 정말 쌍둥이 형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누구와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게 불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도마는 어쩌면 다른 사도들에게 그림자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쌍둥이가 자기만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 도마가 자신의 의심 때문에 이제 얼굴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의 의심은 그에게는 약점이기도 하고 강점이기도 했습니다.

의심은 약점이지만 자신이 인정하고 고백한 의심은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숨겨놓는 의심은 우리의 내면을 약하게 만들고,

우리를 넘어뜨리며, 사람을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물건처럼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나타낸 의심은 의심을 풀려고 하는 마음의 표현이며, 용기와 내면의 힘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솔직함의 표현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기도 합니다.

해서는 안되는 말을,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할 때도 많습니다. 

아우구스틴 교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 도마는 우리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럼, 도마의 의심은 과연 무엇에 관한 것이었을까요?

도마는 무엇에 대해 의심했습니까?

무엇을 믿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까?

다른 동료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까?

그 분이 정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까?

도마는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만약 도마가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그랬다면, 제 생각엔 도마는 오히려 못자국이 다 나아 상처가 하나도 없는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을 겁니다.

그 분이 진짜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했다면 오히려 도마는 자신이 아는 얼굴을 보고 아는 음성을 듣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도마가 정말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했다면,  살과 뼈로 된 그 사람을 오히려 한번 안아보고 싶어했을 겁니다. – 그렇다면 왜 도마는 자신의 손을 예수님의 상처 난 곳에 직접 넣어보기를 원했을까요? 

제 생각에 거기에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사야서 53장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채찍질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 하나님의 종, 그 분에게 난 상처로 우리가 나음을 받고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도마는 단지 살아있는 시신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자신의 구세주를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마가 그 이상의 다른 뭔가를 원했을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마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 도마는 예수님이 과연 누군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마 때문에 다시 찾아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그 의심을 풀어주십니다. 도마가 믿음에 대해 싸우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도마에 대해 마찬가지 입니다.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보다는 믿는 자가 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계십니까?

우리의 개인적인 의심들과 질문들에 대답해 주시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각자의 개성 속에서 찾고 계십니까?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한가지 유일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못자국 난 상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각자 개성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길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동일한 한가지 입니다.  – 동일한 하나의 믿음입니다. : 바로 예수님이 받은 상처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상처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의 어리석은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되며,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도마는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대답합니다. :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

그것은 도마의 외침이기도 하며 동시에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 회의론자에 의심이 많았던 그 도마가 요한 복음을 통틀어 최고의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아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항상 다른 사도들의 그림자 속에 있었던 것 같은 도마가 그러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도마는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고 서로 연결시켜준, 알파와 오메가를 찾아낸 첫 번째 사람인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도마가 정말 자신의 손가락을 예수님 손바닥의 못자국에 넣어봤는지, 자신의 손을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봤는지는 더 이상 말해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닌 것 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시며 말씀을 마치십니다.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귀로 듣는 것으로 충분한 것을 눈으로 보아도 만족하지 않다는 설교자의 회의를 듣는 것 같고 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들에 대한 시몬 벤 라뀌쉬 랍비의 깨달음을 듣는 것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산에서 번개와 지진을 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나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구약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로 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런 경험을 전혀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런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람이 있을까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세지입니다. 자신의 의문들과 의심을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직접 만져보지 않아도, 보지 못해도 믿음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 믿음은 그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보다  과거에 누구를 믿었었는지, 또 지금은  누구를 믿고 있는 것인지 하는 사실에 달려있습니다. 아멘. 

Subscribe
Notify of
guest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