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자 욥

  • 연합 예배 (2002년 11월 03일)
  • 욥 42:7-17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21103ek
설교: 슈토렉
제목: 중보자 욥
본문: 욥 42, 7 – 17

<본문>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세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15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설교>
종교대표자들, 데만 사람 엘리바스 그리고 그의 두 친구들이 마침내 입을 다물고 번제를 드리러 욥에게 가야만 합니다.
사탄이 시작한 이 죄의 사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여호와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설명들 사이로 진리의 빛이 스며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종교적인 연설이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거친 간구가 옳았다고 인정 받았습니다.

욥의 위치가 처음으로 현저한 변화를 겪고있습니다.
그때까지 큰 고통으로부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짖는 사람이었으며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공허한 하늘과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곳 가장 깊은 심연과 마주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특별하고 가치 있는 사명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분명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요단 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 하늘로부터 소리 같은 것이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고 예수님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너를 택하여 준비하였고 너는 나의 도구가 되리라. 왜냐하면 이 세상을 위해 너로 간구하게 하길 원하며 그리고 이 세상을 더없이 멋지게 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십니다.

기서 처음에 사탄(사탄은 고발자란 뜻이 있음) 즉 고발자의 말이 나오고 욥기서 마지막에 하나님 자신이 찾은 중보자로서의 욥의
마지막 말이 나오고, 하나님은 욥을 고통을 통해 지옥과 무덤과 같이 인간의 힘이 완전히 소진된 곳에서 그리고 하나님 없이 외로운
곳에서 그의 중보가 모든 능력을 갖도록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할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중보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행복하게 삽니다.
인간의 눈에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질 때 교회는 하나님의 중보의 사명자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애굽의 요셉 같은 욥, 모세 같은 욥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같은 욥은 중보자입니다.
헛되지 않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속에 들어간 첫번째 사람이 스데반 순교자 – 자신의 원수들을 위한 중보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러한 고통을 인내한후 스데반 처럼 중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체코 한국 유럽 아시아 미국의 교회가 모든이들이 보도록 둔, 산 위의 등불처럼 독자적인 사명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십시오.
그 빛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지 세상에 대한 불평과 세상에 대한 잡담 그리고 세상 죄에 대한 말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직후 하나님은 욥의 운명을 바꾸었고 욥이 이전에 소유한 것 보다 모두 두 배를 받았습니다.
   

에게 모든사람들이 돌아오는 이 아름다운 말씀 – 모든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과 전에 알던 모든 사람들 그를 진저리치게 싫어하던
사람들, 그와 이야기 나누길 싫어했던 사람들,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 계속 그에 대해 무언가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 하나님과
사람에게 해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지금 욥에게 돌아오고있고 욥은 오는 것을 막지도 그리고 선택적으로
오도록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의 집에서 욥과 함께 음식을 먹기위해 왔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비밀로 이 세상을 위한 아버지 곁에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가 성만찬(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성만찬은 고발과 심판의 시대가 끝남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중보의 능력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모든이들이 그리고 모든이들이 그리고 또 모든이들이 성만찬의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중보가 완전히 승리하는 그곳에 누구도 허물을 찾을 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 금 한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그에게 선물하였습니다.
이렇게 슬퍼하며 위로하자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에 저주받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상황이 다 끝난 지금 욥과 연대를 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인간의 유대는 앞서 하나님이 먼저 인간의 운명을 변화시킨 그곳에서 시작됩니다.
자, 거기에 모든이들이 모였습니다. – 주의 식탁이 좀 이상합니다. – 모두 죄인들이 둘러앉아있습니다.
욥에게 사람들이 몰려오고 각기 다른 선물을 들고왔습니다.
주의 만찬 직전에 우리들도 봉헌시간을 갖습니다.
봉헌과 성만찬이 이렇게 관련되어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기쁨으로 예물을 가지고옴으로써 이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암나귀 양 소 약대와 기타 짐승떼들이 있습니다 – 그 주 하나님이 능력을 펼치시어 여기서 사탄의 종교적인 숫자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욥은 처음처럼 일곱아들과 세딸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아들의 이름은 없고 딸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적이지 못합니다.
동양에서 여자들은 양지의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언가 시작하는 곳 거기서 모든 것이 변화하고 그리고 거기서 욥의 딸들인 여자들이 이름을 갖습니다.
모두 의미있는 이름들입니다.
예를들어 비둘기, 육계향, 화장할 때 쓰는 작은상자 입니다.
아름다운 이름들은 실용적이 못합니다.
예를들어 돈까스 접시, 좋은 요리사 등 등입니다. (번역자- 체코의 이름가운데 예를 든 것)
주 하나님은 비실용적이고 장식적인 것에 대해 의미를 가집니다.
동방정교회와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성화들이나 향들 이런 것들 없이 검소해야 된다는 개혁교도들의 전통에서 이러한 장식에 거부감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모든 축복 위에 축복을 하시고 욥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딸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이름을 썩 좋아하지 않을 지라도 주 하나님께 우리들이 세례받을 때 귀하게 귀하게 불려지는 우리의 이름을 들으시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장식이 된 것 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마치 자신의 얼굴을 우리들에게 그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모세의 얼굴이 변한 것 같이 우리들은 이제부터 변화된 얼굴을 가지고 갑니다.
어떤 성령파들 처럼 눈을 부릅뜰 필요가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일하심이 그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 그에 대해 여러분들은 아실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들에게 아들들 처럼 유산을 주었다고 덧붙입니다.
딸들에게 유산을 주는 이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특별한것입니다.
아낌없이 베푸는 아버지입니다.
아낌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아낌없이 베푸는 하나님의 특징을 세상속에서 드러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낭비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욥은 그 후에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습니다.
이로써 영광의 조상들과 결합됩니다. 욥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그에대해서 듣는 사람은 욥처럼 구원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후손을 보았습니다.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습니다.
아들도 손자도 없는 사람들, 육신의 후손으로 어떠한 미래도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식탁을 함께 한 수 소망을 가진 자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욥이 기한이 차서 죽었습니다 – 아름다운 욥의 생애의 이야기입니다.

주 늙어서 오래되어 그리고 기력이 쇠진하여 고통스럽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질적으로 만족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완벽한 성취를 이룬 생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기한이 찬 죽음을 맞이하기에 죽음을 만족하게
맞이합니다. (번역자-체코어로 기한이차다는 단어와 배가 부르고 만족하다는 단어가 어원이 같다.  그래서 기한이 찼다는 뜻은
만족하다는 의미로 이해가 가능하다.) 아멘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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