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하시는 일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22일)
  • 요 9:1-7
  • 설교자: 김영만

030622
제목: 하나님의 하시는 일
본문: 요한복음9: 1-7 요절/ 요한복음9: 3 

<요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설교>
오늘 말씀에는 소경이 나옵니다.  또 이 소경을 놓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야기하면서 나눴던 소경에 대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러면 과연 소경은 어떤 사람일까를 한 번 생각해 볼 것입니다.  또 그 소경을 놓고 제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했으며 예수님은 그 소경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볼 것입니다.  끝으로 결국 소경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살펴보기
원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세상에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 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
웃을 때도 있었지만 슬퍼 울 때도 있었습니다.  사랑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외로움이 밀려 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기뻤던 일은 잠시 같은데 슬펐던 일은 이에 비해 많은 것 같고 기뻤던 일 보다 슬펐던 일 들이 더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남이 나를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능력 없음을 지적 받기도 했습니다.  경쟁에서 밀려 보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치여 보기도 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실수도 하였습니다.  외국 삶 속에서 정처가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 중에 한 사람 오늘 본문에는 소경이 나옵니다.  그러면 소경은 누구입니까?  그는 물론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더구나 그는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봐 본 적이 없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으면
어떠할까요?  캄캄할까요?  답답할까요?  불편할까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요?  그는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는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들을 봐 본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소경은 보지 못하는 자이고 두 번째 소경은 슬픔의
사람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을 길 가실 때에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경
앞에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제자들이 이 소경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여기서 우리는 이
소경과 이 소경을 두고 질문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입니다.  더구나 8절에
보면 이 사람은 길거리에서 얻어먹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놓고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게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소경이요 거지 되게 했습니까?  부모입니까? 자신입니까?  아니면 그의 인생에 관여했던 어떤
스승이나 지도자입니까?  세상 때문입니까? 
최소한 소경 자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경이 되리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소경이 되는데 무슨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책임질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는 지금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행 중에
태어나서 앞으로도 불행하게 소경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어떤 것들은 나에게 주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내가 선택해야 될 것들도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나
자신 중에 나의 외모일 수도 있고 내적인 성격 등 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생기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생기고 나의 자아
중에 깊은 부분 그런 부분을 내가 어떻게 하고자 해서 그런 내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것입니다.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부모님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 때문에 부모님들이 속 상할 때가 많지만 부모님들
때문에 자녀들이 상처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가난한 가정에 태어납니다.  또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깨어진
가정도 있습니다.  또 주어진 것 중에는 생명도 주어진 것이 될 수도 있고 건강도 주어진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어진 것들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불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생겼을까?  왜 나는 남들처럼 능력이 없을까?  왜 나는 하필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  왜 우리 아버지는 허구 헌 날 술만 마시고 왜 우리 부모님은 매일 같이 싸우기만 하실까?  나는 왜
이런 남편 이런 아내를 만났을까?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행복하지 않다면 누구 때문일까? 내 죄 때문일까 부모님이
죄가 많아서 그럴까?  이렇게 생각되실 때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소경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선택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선택 중에 하나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일 겁니다.  직장도 본인이 선택을 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체코라는 나라에 와서 사시는 분들인데 이것도 하나의 선택이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많은 선택 중에 혹시 본문의
소경처럼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해 보지도 못하고 선택한 경우는 없습니까?  그 선택이 그렇게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 그래서 우리에게 그 선택이 아픔이 될 때 우리는 또다시 본문의 소경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러면 이 소경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제자들이 왜 이렇게 질문했을까요?  다르게 말 할 수는 없었을까요?  예를
들어 제자들은 이렇게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저 소경이 너무 불쌍합니다.  주님께서 고쳐주소서”  왜냐하면 제자들은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을 직접 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자들은 38년 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소경이 나음을 입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소경이 저렇게 된
게 뉘 죄로 인함인지 물었습니다.  “참 소경이 불쌍은 하다 그런데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저렇게 되었을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생각하기를 잘 합니다.  주위의 어떤 누가 좀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그것 봐라 그러면 그렇지 내가 뭐랬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별로 은혜를 못 받다가 주위의 어떤 사람들이 좀 힘들어 지면 그 때 은혜 받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고난이 무엇을 잘 못 해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생각에는
인과응보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인과응보적인 요소 하면 생각 나는게 욥이 고난 당하고 있을 때 욥의 세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이 죄로 인한 환란과 곤고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꼭 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것이 다 죄 때문이라면 구약의 요셉의 삶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까?  욥기에 욥의 삶은
어떻게 설명이 되고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삶은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둘째로 제자들의 생각 속에는 “할 수 없지 뭐 저렇게 된
거” 라는 체념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거라면 모를까 소경인데 그것도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거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저 사람에게 무슨 변화가 온다 든 가 저 사람이 어떻게 뭐 치료가 된다 든 가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깔려 있을 수 있습니다.  체념입니다.  저 사람 문제만큼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문제가 중하기 때문에 그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해결의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우리 주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소경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진 것이 아니라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한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납니다.  누가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까?  능력이 많으면 모를까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 받고 있는 사람이면
모를까 아픔이 많다면 가장 많은 사람을 통해 비천하다면 가장 비천한 자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보실 때 제자들처럼 인과응보적인 생각에 기초해서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소경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해서
할 수 없다고 생각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자 가장 상처가 많은 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자 소경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날 것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서 1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패하시고
이새의 아들 중에 사울의 뒤를 이을 사람을 예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새에게는 아들이 여덟이 있었습니다.  이새는 사무엘이
함께 하나님께 제사 드리자는 소리를 듣고 그의 아들들을 한 곳에 불러모았습니다.  사무엘이 모여있는 이새의 아들들에게 들어가 보니
엘리압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압은 용모와 신장이 준수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속으로 생각하여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압을 주목하여 보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들들인 아비나답,
삼마도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덟 중 일곱이 다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이
모두를 주목하여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 이상한 것은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은 정작 그곳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없었을까요?  아마 이새가 다윗을 부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에 다윗 쯤 없어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위로 일곱이나 있는데 용모와 신장이 준수한 엘리압도 있는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작
다윗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으로는 별로 귀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소경 한 사람을 지켜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의 삶에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소경의 삶을 주관하시고 소경의 삶을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소경의
모든 고난에 함께 하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서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소경의 그 동안의 모든
아픔은 소경의 그 동안의 모든 설움은 그의 모든 눈물은 그의 모든 상처는 이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속에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
속에 봄볕에 눈 녹듯이 녹아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경의 삶을 붙들고 계십니다.  크신 계획 속에 높은 경륜 속에 그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있으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는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고난이 무가치한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는 가치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목적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는 목적이 있습니다.  내게는
대책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대책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높은 경륜속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모든 아픔이 우리의 모든 상처가 치료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의미 없이 느껴지던 것에 의미가 부여되며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이래서 이랬구나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기대 할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경륜을 붙들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6절 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29절에서 두 소경의
눈을 띄워 주시는데 그들의 눈을 만지시면서 띄워 주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20장 34절에도 보면 소경들의 눈을 만지시며 그들의
눈을 띄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좀 다릅니다.  땅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리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이제 소경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눈에 이겨진 진흙을 바른 채로 실로암
못으로 갑니다.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8절 마지막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다 소경을 보셨는데 성전에서
실로암 못까지는 약 4 km가 된다고 합니다.  4 km라는 거리는 도보로 가면 건강한 사람에게도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더듬어서 실로암 못까지를 가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갈까요.  가다가 언덕을 넘기도 하고 개울을
건너기도 하고 논 둑을 따라 걷기도 했을까요?  실로암 못을 찾아 걷고 있는 소경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7절
후반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만 뜬 것이
아닙니다.  소경은 25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 이니이다”

소경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희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 김영만 선교사는 UBF 자비량 선교사로 현재 까렐대학 개혁신학부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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