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일꾼들의 주의사항

  • 한인 예배 (2002년 09월 22일)
  • 마 20:1-16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0922 (열 일곱번째 삼위일체 주일)
설교자: 다빗 유레흐
본문: 마태복음 20:1-16
제목: 포도원 일꾼들의 주의사항

사랑하는 자매와 형제여러분,


도원 비유의 하나님의 일꾼들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설명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 나오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찾는 집 주인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이었습니다. 일하는 시간은 동쪽에 해가 있을 때 시작해서
해가 서쪽으로 질 때까지 입니다.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집 주인은 일꾼들과 품삯을 협상하였습니다. 구두계약은 유효하며 협상한
봉급을 지불해야 될 책임이 있고 일꾼들은 일을 해야될 책임이 있었다. 데나리온은  서로 협상한 정확한 금액을 나타내며 관례에 따라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포도원 주인은 제 삼시(요즈음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들 시간으로
아침 6 시부터 시간계산을 합니다.)에 다시 장터에 나가 아직도 일이 없어 고용자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발견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새 일꾼들을 불르러 간 이유를 우리들은 모릅니다. 이른 아침에 일꾼들이 충분하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일이 많아서 일꾼들이 더
필요했는지 우리들은 모릅니다. 여기서 그들과 품삯에 대해 협상을 하지 않고 4절에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리라“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첫번째로 온 일꾼들의 품삯을 기준으로해서 약 3/4 데나리온은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포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주인은 제 육시와 제 구시에(요즈음 시간으로 정오와 오후 3시에) 불러서  제 삼시때 고용한 사람들처럼 적당하게 지불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그래서 그들은 1/2이나 아니면 1/4를 받을 것을 상상하였을 것입니다.)


지어 하루가 끝날 무렵인 제 십일시(오후 5시)에도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장터에서 발견을하였습니다. 질문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대답하길: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주인은 그들을 자신의 포도원에
보내면서 품삯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않았습니다. 이들 역시 하루 품삯 가운데 극히 일부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일하는 시간이 한시간이라도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포도원 주인은 세 종류의 일꾼들이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품삯으로 구분하면 1) 한 데나리온 품삯 일꾼들(아침부터 일한사람들), 2) 적당한 품삯을 약속받은 일꾼들(제 삼시,
육시, 구시부터 일한 사람들) 그리고 품삯을 전혀 약속하지 않아 단지 하루 품삯 가운데 일부만 기대하는 일꾼들(제 11시부터
일한 사람들) 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여기서 일꾼 채용에 대한 비유의 첫번째 장면이 끝납니다. 하루 종일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을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는 장면에서 포도원 주인의 선하심이 드러납니다. 비유의 두 번째 장면에서 주인의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저녁이 되는 제 십이시, 하나 둘 뜨는 하늘의 별들은 하루의 일하는 시간이
끝남을 알렸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모든 일꾼들을 먼저 온자들로부터 나중온자들까지 구분하지 말고 모두 똑같이 품삯을
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구약의 율법(레위기 19:13, 신명기 24:15)에 따라 일한 후 저녁에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가장 가난한 자들과 일용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관리 방식이 독특합니다. 직접
일꾼을 찾아다니며 고용하는 사람이 주인이고 단지 품삯을 시키는데로 지불하는 사람이 청지기입니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품삯은 모든 이들에게 지불될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특별히 처음과 마지막에 채용된 일꾼들과 포도원주인이 주연이고 다른 이들은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라마틱한 세개의 관점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우리들에게 이 비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있습니다. 품삯 지불은 제일 나중에 채용된 자들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이 처음이 되었습니다.

모든이들이 한
데나리온씩 똑같이 받았습니다. 한시간 일한 사람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도 똑 같이 받았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임금 지불이었습니다. 나중에 채용된 사람들 보다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처음 채용된 사람들이 받은 것보다 실제로 나중에
채용된 사람들이 더 많이 받은 셈입니다. 그래서 처음 채용된 사람들이 주인에게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우리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견딜수 없는 더위에서 하루종일 어떤사람들은 일했고 그리고 어떤사람들은 해가 지는 서늘한 저녁에 단지 한시간을
일했습니다. 그래서 형평성 문제로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법적인 면으로 따지자면 분명히 정의롭지 못하고 우리들의 상식도 그것을
동의하기 힘듭니다.

주인은 매우 부드럽게 대답합니다. 원망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주인은 친구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개해서 그가 포도원의 주인이란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주인은 처음에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였기에
잘못을 하지않았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약속한대로 받았다면 누구도 불평을 할 수 없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자신의 품삯을
받았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뜻대로 그리고 자원해서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 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지불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이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채용된 사람들은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품삯을 받아 돌아갈 수 있지만 자신의 입장 때문에 힘들어 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좋은 마음씨 때문에 질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평을 하면서 질투심에서 자신들만의 성공을 인정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꼴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평함에 대한  의미만을 생각했지 주인의 선한 뜻은 물론 자신의 이웃의 필요에 대해 고려하고 있지않습니다. 한 데나리온도 안되는
품삯으로 그들의 가족이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주인은 선함과 자비함을 베풀었습니다. 주인은 인간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근무시간에 따른 품삯의 차등 지급을 반대하고 일률적으로 지급하였습니다.  처음 채용된 사람과 나중에 채용된 사람들의 차이점이
없습니다. 나중에 일하러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건 없이 일하러 왔습니다. 평가의 순서가 달라졌습니다. 다른 일꾼들과
달리 처음에 특별하게 계약을 하여 채용된 첫번째로 일하러 온 일꾼들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오늘 본문의 비유의 배경은
포도원이 아니라 장터입니다. 장터는 기다림의 장소이며 포도원은 약속된 장소입니다. 장터와 포도원 두 장소를 주인이 연결하고
있습니다. 고용된 일꾼들의 노동시간과 규칙에 대해 우리들은 알지못합니다. 비유에서 일꾼들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 중심부에
있습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가라, 내가 너희들에게 공정하게 주었다. 그러나 무엇이 공정합니까? 여기서 두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공정함과 주인의 공정함입니다. 공정함이란 말에서 우리들은 노동의 시간과 일꾼의 능력에 따른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주인은 그러나 우리들이 상상했던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공정함은 그에게 다른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일꾼들에게 지불한 후 그들이 주인의 일을 평가할 때, 그리고 그들이 주인의 품삯
지불과 고용방식에 불평을 할 때 제일 먼저 주인은 일꾼들의 노동을 평가합니다. 어떻게 불평을 하겠는가라고 주인이 우리들을
꾸짖습니다. 주인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목전에서 나중 온 사람들에게 지불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좋지않은 아들이 분에 넘치게 많이 받은 탕자의 비유를 연상시킵니다. „포도원의 일꾼에 대한“ 이 비유는 „선한 고용주에
대한“ 비유로 이름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포도원 주인은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행위에 대해 ,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에 대해,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그리고 당신의 사랑의 초월적인 권능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꾼 고용은 실제 삶에서 나온 생생한 현실 이야기 같고 일꾼의 품삯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형식화된 이야기 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사람들의 관례와는 다르게 행하셨습니다. 품삯 지불 과정에서 이 주인처럼
행하는 것은 단지 전지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에게 공정성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불공평한 주인의 행위는 실제로 누구에게도 불의를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법적인 공평성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월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잣대는 인간의
잣대와는 완전히 다르기때문입니다.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있는 차별을 꾸짖는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이며 그리고 새롭게 차별을 만드는 인간의 악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이
어떤 공로나 업적 없이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을 감사하지 않을 때 인간의 악의는 나중된 자가
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어떤 권리를 하나님과 흥정을 원하는 사람을 비판합니다. 먼저 고용된 일꾼들의 일이 하나님
나라와의 관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 초청을 받았을 뿐 어떠한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특별히 자신의 종교적인 집착에 대한 정당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러한 정당성으로 다른 이들을 무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위험합니다. 교회에서 우리 모두가 빚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신실함
위에 기초를 둔 우리 모두에게 거울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들의 자기 의와 자기 공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심지어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인간의 자기주장까지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들의 생각과 다른 것은 모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인간의 잣대를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권리의 특징위에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이 있습니다.


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의 법적인 계산과 관습과 관련이 없는 주님이심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행위는 법의 경계를 넘어가며 불의를 향하지
않으며 선한 뜻의 불공평함을 지향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모습으로 하나님은 기분에 따라서 그리고 정의를 왜곡하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랑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사랑은 선행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하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의 자비하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선한 뜻인
자비로 모든 이들에게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품삯은
하나님의 자유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의 행위이며 그래서 구원은 인간의 어떠한 공적보다도 높은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구원 그 이상의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들 사이에 구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구원의
하나님의 선물은 모든 이들에게 똑 같습니다. 각 사람마다 공적이 서로 다루지만 모두 똑같이 선물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받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여 그
이상 더 가질 수 없습니다. 한 데나리온을 얕보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부터 멀어지지않도록 모든 사람들이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특별한 품삯을 요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을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구원의 선물의
소유자이시기에 우리들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닌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길 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유롭게 구원의 선물을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모든이들에게 선물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포도원의 일꾼들이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불평할 모든 경우를 경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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