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8. 체코형제개혁교회의 탄생 1918년

8. 체코형제개혁교회의 탄생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의 설립 직후 오랫동안 갈망해온 체코개혁교회들의 연합이 가능하게 되었다. 3백년동안 체코 개혁전통의 후예들이 “조상의 믿음”을 온전하게 선포할 수 있었다.

관용의 시대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두 개의 교회(번역자 주 – 여기서 교회는 교단을 의미하며 하나는 루터의 신앙고백을 한 그룹과 다른 하나는 스위스 개혁신앙고백을 한 그룹이 각각 교단을 형성하였다. 이하 교단은 ‘교회’로 그리고 교단소속의 교회들은 ‘개교회’로 표기함)와 17-18개 개혁교회들이 1918년 12월 프라하에서 총회를 열고 연합을 하였다. 당시 개혁교회는 126,000명 교인들과 루터교회 34,000 교인들이 있었다. 체코의 개혁전통 특히 형제단의 전통으로 연합된 교회의 설립은 체코형제개혁교회(Ceskobratraska cirkev evangelicka)로 이름이 붙여졌다. 연합된 교회의 상징은 “성경”(형제단의 전통)위여 놓여있는 “성찬잔”(후스의 전통)이 되었다.

풍부한 역사적인 뿌리 때문에 교회일치는 단지 연합의 차원을 넘어 에큐메니즘의 정신을 형성시켰다.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고백(예;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구 후스파 신앙고백 “1420년의 프라하 4개 조항”외에 루터 신앙고백인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 “1535년의 형제단의 신앙고백”(1662년 얀 아모스 꼬멘스끼의 번역본에 따름), “1566년의 두 번째 스위스 개혁신앙고백” 그리고 체코개혁전통의 초기 에큐메니칼 기원이 되는 문서인 1575년 체코개혁교도의 첫 번째 연합인 “체코신앙고백”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연합된 교회는 특히 선교활동의 가능성의 기회를 갖게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로마로부터 탈퇴”(Pryc od Rima – Los von Rom)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체코국민의 거의 18%가 로마 카톨릭교회를 떠났다. 대부분 그들은 합스부르크 군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여러 면에서 신용을 잃게된 카톨릭 교회에 실망하였다. 처음 10여 년간 약 100,000명의 로마 카톨릭인들이 체코형제 개혁교회에 등록하여 120개 교회 250,000명의 교인을 이룬 가장 큰 체코개혁교회가 되었다.

이 개종운동으로 다른 교회들도 많은 교인을 얻었다. 약 10,000여명이 19세기말 체코 영토에서 활동을 시작한 소수 개혁교회들에 가입하였다. 회중교회인 “체코형제교회연합”, “연합침례교회”, “개혁감리교회” 그리고 일부의 “구 카톨릭 교회”등이다. 이 외에도 1920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교단이 세워졌다. 민족교회로서 부분적으로 동방정교회와 관련이 있으나 대체로 후스 전통과 관련이 있다.(나중에 후스 전통에 근거한 교회임을 강조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후스 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카톨릭교회가 아닌 교회들 가운데 제일 큰 교회로 750,000교인의 교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체인구의 77%를 이루고 있는 로마 카톨릭교회는 여전히 체코 공화국에서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주고 있다.

첫 20년 동안 연합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복음화(특별히 체코 서부지방)와 교회개척에 집중하였다. 초기에 개교회들 간의 신앙고백의 차이들은 특별히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전 루터 교인들은 자신의 예배예전을 되찾았고 반면에 대다수인 개혁파들은 칼빈의 교리를 지나치게 주장하지 않았으나 장로교회 전치와 제도를 유지하였다. 목회자들과 그들이 섬기는 개교회들이 서로 다른 신앙고백의 전통에 있어도 목회자들이 임명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지역교회의 회원권은 주로 거주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관용에 의해서 세워진 전통적인 지역교회들이 이 외에 자유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적인 신학의 영향에 따라 새로운 개교회들이 생겨났다. 독일 개혁교도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내에 120,000 교인의 자신의 개혁교회를 갖게되었다.

1919년 초기에 목회자 교육을 위해 프라하에 “후스 개혁 신학부”가 세워졌다(후에 1953년에 “꼬멘스끼 개혁 신학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새 신학부는 초기에 연합된 교회의 지도자들과 밀접하게 협력이 되었다. 연합된 교회 – 체코형제개혁교회 – 목회자 출신가운데 신학교 교수들이 배출되었다. 신학부 사역의 초대 책임자는 비엔나 신학부에서 프라하로 임명이된 스깔스끼(G. A. Skalsky)교수였다. 교수 첫 세대 가운데 후스 신학부에 유명한 교수들이 있었다: 교회사의 흐레이사(F. Hrejsa)와 바르또쉬(F.M. Bartos) 구약학의 다ㄴ(S. Danek), 신약학의 쥘까(F. Zilka), 교리학 교수 흐로마드까(J.L. Hromadka)였다. 다음 세대로 역사학자 지찬(R. Rican), 구약학 비츠(M. Bic), 신약학 소우ㅊ(J.B Soucek), 교리학과 윤리의 도비아쉬(F.M. Dobias), 실천신학 베드나즈(F. Bednar), 노보뜨니(A. Novotny) 그리고 예슈께(J.B. Jeschke)이다. 다음 세대로 교리사 몰나르(A. Molnar), 조직신학 로흐만(J.M. Lochman), 브로쉬(L. Broz), 구약학 헬레르(J. Heller), 신약학 뽀꼬르니(P. Pokorny), 실천신학의 스몰릭(J. Smolik)과 파벨 필리피(Pavel Filipi), 사회윤리 트로얀(J. Trojan), 오포첸스끼(M. Opocensky), 종교이론 온드라(J.N. Ondra)이다. 신학부는 자신의 총대를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에 파송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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