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기독 사상가] 보이떼흐

체코의 주요한 기독 사상가들

보이떼흐 슬라브닉 – 선교사와 유럽인

보이뗴흐 슬라브닉은 956년 뽀뎨브라디 옆의 리비쩨에 위치하고 있던 유명한 슬라브닉 왕가에서 출생하였다. 972년에는 인문학 공부를 위하여 주요한 교회 및 전도 활동의 중심지였던 마그데부르그로 떠나, 그 곳에서 9년간 머문다. 그 곳의 아달베르트 대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으며 아달베르트라는 이름을 얻는다. 공부를 거의 마칠 무렵 성직 수임의 첫 단계를 받아들여 부제(副祭)가 된다. 프라하로 돌아와서 교회 성직자 단에 입교하여 사제 서품을 받는다. 982년에는 레베 흐라데츠에서 프라하에서 두 번째로 주교로 선출되며 983년에는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주교청에서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수임장을 독일 황제인 오타 2세로부터 받게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클뤼니의 개혁 운동가 대표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사상에 깊은 영감을 받는다. 곧바로 마인츠의 대주교였던 빌링기스에게 새로운 프라하의 주교로서 서품을 받는다.

교회에서 타협 할 수 없는 기독교의 원칙들을 고수해 나가는데 그의 역할을 다 하였고, 교회와 사회의 악법을 철폐하는데 앞장섰다.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노예 매매, 다처제, 근친혼, 이혼, 폭식, 알코올 중독, 장사로 인한 주일 신성모독 등. 그러나 그는 지배자로부터, 혹은 성직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홀로 고독해진다. 이러한 거의 대부분의 온건한 노력들에도 988년 결국 조국을 등지고 로마 교황 요한 15세에게로 길을 떠나고, 그 이후 몬테 카시나의 수도원, 그리고 마침내 로마 옆 아벤티나의 성 보니파스와 알렉시아의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간다. 그 곳은 종교적 삶의 치유와 교회의 강한 개혁에 힘을 쏟고 있었다. 보이뗴흐는 이 곳에서 수도 생활을 할 것을 결심하고 992년 베네딕트 수도사의 선서를 한다.

조국에서는 그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였고, 기독교의 원칙을 고수해 나갈 것을 약속하였다. 보이뗴흐 주교는 992년 기쁨과 희망으로 요청을 수락한다. 왕자는 그에게 권력을 선물하고, 보이뗴흐는 브제브노프에 993년에 축성 받게 되는 베네딕트 수도원을 건립한다. 순풍시대도 오래가지 않고 나라 안과 교회 내에서도 이교도가 도로 득세한다. 994년 보이뗴흐는 성 이지 수도원에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간통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여인을 목도하고는 두 번째로 조국을 등지게 된다. 다시 아벤티나의 수도원으로 행하였다. 996년 새로운 교황 제호즈 5세에게 황제관을 수여받기 위하여 그 곳으로 젊은 독일 황제 오타3세가 온다. 보이뗴흐가 전적으로 지지하였던 후기 기독교 양상의 로마제국의 혁신에 관한 계획을 알린다.

일년 후 보이뗴흐는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국으로 온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지배자에 의하여 거부당한다. 이교도 속에서 그는 기독교 정신을 설파하는 선교자로서 헝가리에서는 파논할마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폴란드로 옮겨가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다. 이후 수행원으로서 이교도의 땅 프러시아로 향한다. 그 곳에 도착해서는 겨우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였다. 열정을 다하여 설교하였지만 그 곳의 사람들은 성서 말씀에 완강하였다. 997년 4월 23일 보이뗴흐는 난폭한 이교도들의 창에 찔려 순교한다. 이교도들은 홀린 성 내 성벽쪽에 그의 머리를 도끼로 잘라 말뚝머리에 달아놓고 선교자들에 대한 경고로 보여준다. 그의 몸은 조각조각 잘린다.

999년 보이뗴흐는 성인으로 추대되고 1000년부터는 폴란드의 주요성인으로 추앙 받는다. 그는 또한 헝가리인들에게 주요 성인인기도 한데, 그 이유는 994년 나중에 헝가리 황제가 되는 슈뗴판 1세에게 세례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골은 성 비투스 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그는 프라하 대교구의 주요 성인이다.

보이떼흐는 학식있고, 헌신적인 인물이었으며 그의 품격있는 성품은 모든 회의에서 빛났다. 지칠 줄 모르고 신의 영광과 찬미, 영적 구원을 위하여 싸웠다.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한 기초로서 도덕적 원칙과 더 높은 가치를 옹호하였다. 대륙의 정신적인 일치를 강구하였으며, 칼로서가 아닌 기독정신으로서 유럽의 일치를 꾀하였다 그의 지성적 싸움의 장이자 고향은 바로 유럽이었다. 그가 스스로 기울였던 노력의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로 이끌었지만 그의 과제를 다 이루었으며 이후 세대에게 또한 역할을 전수하였다. 그의 유산은 화해, 융합, 일치의 유산이다. 그리고 또다른 유산은 유럽의 정신적 중요성과 더불어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인 것이다.

( 슬라브닉 가문의 보이뗴흐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신 분들에게 비판적 시각과 객관성, 정확성으로 그에 대하여 기술하려 노력한 여러 도서들을 접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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