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종교개혁 유적지 순례] 2 – 성 하벨 교회와 멜랑트리히의 집

2 – 성 하벨 교회(Kostel sv. Havla)와 멜랑트리히의 집(Dům Melantrichů )

카롤리눔 앞마당을 지나 다시 오브츠니 트르흐(Ovocný trh) 거리 옆에 젤레즈나 거리의 끝으로 가보자. 오른쪽으로 본래의 로틀레프의 대학 건물의 정면을 따라 돈다. (여기는 중세에 다양한 간이 점포들이 있던 고딕식의 회랑이 있던 곳이다. 후스주의시대 말엽, 이 곳에서는 서점이 있었는데 특히 프라하의 유명한 얀 멜랑트리히(Jan Melantrich)와 그의 이웃인 벨레슬라빈의 인쇄업자들과 출판업자들의 성서 판매소로 유명하였다. 새롭게 단장한 유리문을 뒤로하고 건물로 들어서면 앞마당에 대학 가운을 입은 후스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카렐 리디츠키의 작품)
맞은 편 하벨 거리로 건너가서 왼편으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보통 프라하의 다른 본래의 고딕식 교회들이 그렇듯 바로크 식으로 신축된 성 하벨 교회(Kostel sv. Havla) 앞에서 멈추어보자. (17세기 후반 이 교회의 주인은 반개혁 시대의 카르멜회 수도사들이었다. 입구 왼편 청동 현판에서 알 수 있듯이, 카렐 4세 재위 시절 체코 종교 개혁의 두 선구자가 이 교회에서 활동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콘라드 발트하우저(Konrad Waldhauser)와 크로므녜지즈의 얀 밀리치(Jan Milič z Kroměříže)이다.

본래 독일의 아우구스틴 수도사였던 콘라드 발트하우저는 1358년 카렐 4세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다. 다수의 프라하 독일인들을 위한 \”참회의 설교\”를 하기 위하여 비엔나에서 프라하로 온다. 그는 설교 중에 프라하 전 계층의 사람들의 표면적인 종교적 믿음, 계속되어 가는 사치, 증가하는 도덕성의 상실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자주 교회 앞 광장에서 설교 해야 했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에게 그를 고발한 수도사들과 성직자들의 강한 항의에 설교 활동이 좌초된다. 7년 후인 1365년 성 하벨에 의하여 이제 막 완공을 한 ‘틴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Chrám P. Marie před Tynem)’로 옮겨간다. 그 곳에서 1369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활동을 한다.
크로므녜지즈의 얀 밀리치는 체코 설교자로서 발트하우저를 대신하였다. 왕궁 집무실의 유능한 관리였고, 참사 회원이자 집사 였던 밀리치는 발트하우저의 영향으로 그를 매혹시킨많은 캐리어들을 뒤로 하고 진정으로 하느님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또한 그는 설교에서 부유층에서, 또한 성직자들 특히 수도사 계급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폐단들을 비판하였다. 발트하우저의 죽음 이후 밀리치도 틴 교회에 있었으며, 그 이후 지인들에게 말을 배운다. 또한 하루에도 몇 번씩 설교를 해야 했었다. 1364년부터는 우리가 이제 가 볼 성 일리 교회가 그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된다.

4반세기 이후 성 하벨 교회에서는 후스도 경험삼아 설교를 하고, 1421년부터 콘스탄츠 종교의회에서 후스를 비난한 사람들 중 한 명이자, 악명 높은 후스파 반대자 슈테판 팔레츠(Štěpán Páleč)도 설교를 하였다. (그는 체코 민족의 분노로 폴란드로 도망갔다.)
1421년부터 이미 하벨 교회는 양종 성찬 교회에 속하게 된다. 후스파의 다음 세대 대표들 중 바츨라프 코란다 주니어 (Václav Koranda mladší)도 이 곳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양종 성찬 교회의 행정을 책임졌으며 (얀 로키찬(Jan Rokycan), 이후), 1519년 이 곳에 묻힌다. (그러나 교회 지하실에 있던 그의 유해는 재 카톨릭화 시대에 제거된다. 친 카톨릭왕 블라디슬라프 2세 야겔론스키(Vladislav Ⅱ Jagelonský),는 유명한 후스주의 성직자인 바츨라프를 주님 몸의 날 행사 때 성배주의자들의 데모에 참석했다는 죄목으로 하벨 교회에서 잡아들여 1480년 카를슈테인 황실 감옥에 감금시켰다. 하벨 교회는 백산 전투때까지 양종 성찬 교회로 남아있었다. 마지막 복음주의 전도사 비트 야케쉬(Vít Jakeš)는 이 1621년 가을에 추방됨이 이 곳에서 알려진다.

이제 구시가 광장의 유적지들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하벨스카(Havelská) 거리 끝에서 멜랑트리호바(Melantrichova) 거리로 꺾어진다. 거리 이름 때문에라도 오른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10번지 집 앞에 멈추도록 하자. 그 안에 중요한 후스주의의 과거가 숨겨져 있다. 원래의 고딕건물 뒷 쪽 익면에 아벤틴의 이지 멜랑트리히(Jiří Melantrich z Aventina)와 그의 후계인 벨레슬라빈(Veleslavín)의 인쇄소가 있었다.

이지 멜랑트리히(+1580)는 카렐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에 유학을 갔었다. 우선 비텐베르그에서는 필립 멜랑트리히(Filip Melantrich),에게, 바실리에서는 도서인쇄업자인 프로베니오(Frobenio),에게 인쇄기술 사사받는다. 프라하로 돌아와서는 소직에 있는 양종 성찬 주의자였던 인쇄업자 바르타 네톨리츠키(Bárta Netolický, +1552)와 손을 잡고 체코어 성서를 출판한다. – 나중에는 ‘멜랑트리셱(Melantrišek)’이라 불리웠다. 멜랑트리히의 출판 활동은 그의 사위이자, 후스주의 역사가인 벨레슬라빈의 다니엘 아담(Daniel Adam z Veleslavína, +1599)과 그의 아들 아담 사무엘(Adam Samuel, +1627)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백산 전투 이후 신교주의 인쇄소는 예수이트들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클레멘티눔 기숙사로 이전되었다.

멜랑트리히라고 이름지어진 거리를 지나 좁은 중세 풍의 길을 따라 구시가 광장으로 향한다. 프라하 방문객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구 시청사 남면에 있는 구시가 천문 시계(Staroměstský orloj)일 것이다.

정교한 메카니즘의 총체인 천문시계는 1410년에 만들어졌다. 15세기 말 하누쉬(Hanuš)에 의하여 재시공되었고, 나중에 몇 번의 공사를 더 거치게 된다. 천문 시계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윗 쪽의 숫자는 태양과 달의 궤도 및 일조시간을 나타내며, 몸체부분은 일년의 월과 날을 나타낸다. 1866년 요세프 마네스는 구력판은 신판으로 교체하고, 열 두달을 나타내는 12개의 원형 그림을 그려 넣었다.(농촌에서의 농사 절기를 표현. 원판은 박물관에 보관되어있고, 지금은 카피본으로 교체되어있다.) 1945년 5월 8일 프라하 봉기 당시 천문 시계는 나치주의자들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 되어 전면 재시공을 하게 된다. – 매 시간 천문 시계 윗 부분의 창이 열리면서 12사도들이 움직이고 죽음의 해골이 종을 울린다. 허영에 가득찬 사람이 거울을 보며 서 있고, 탐욕의 유태인은 돈 자루를 들고 있으며, 투르크인은 이마를 찡그리며 머리를 흔든다. 마지막에는 닭이 홰를 치며 우리 인생의 매 시간은 아주 짧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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