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종교개혁 유적지 순례] 3. 구시가 광장의 후스 동상

3- 구시가 광장의 후스 동상

구시가 광장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은 광장 북동쪽에1915년 후스 화형 50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후스 동상이다. 마치 큰 횃불 속에서 살아 남은 듯한 얀 후스 상은 두 상징을 지닌 그룹 사이에 우뚝 서있다. 그의 왼편에는 성배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방패를 들고 있는 후스 전사들이 있고, 오른편에는 반 개혁시대에 조국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움츠리고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얀 아모스 코멘스키가 그의 작품 „유언“을 통해 나타낸 희망을 상징하는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상이 있고, 동상 뒤 쪽에는 이런 문구가 씌여 있다. : 민족이여 일어나라, 주권이 당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 동상 앞면에는 후스가 콘스탄트 감옥에서 신의의 모든 체코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진리를 갈망하십시오“.
후스의 대학내에서의 활동은 이미 카롤리눔(1) 편에서 알아보았고, 그의 설교 활동은 베들레헴 교회(8) 편에서 듣게 될 것이다. 이 곳 동상 앞에서 이 작품을 만든 작가 라디슬라프 샬로운(Ladislav Šaloun)이 작품에 대하여 이미 코멘트 하였던 그의 생각을 상기시켜보자.:

„콘스탄트에서 타올랐던 불꽃 속에 강인했던 후스는 전보다 더 강해졌었다. 그의 육체는 타버렸지만, 그의 정신은 살아 남아 체코 역사 속의 정신뿐 아니라 생명이 되었다. 후스의 순교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진리로 향하는 인식과 길이 열리게 되었다…. 후스 봉기는 최초의 대혁명이었고, 그 안에서 인류는 중세의 종교적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는 이상과 정신적 유산을 위한 작은 민족의 거대한 승리의 싸움이었고, 새로운 삶으로 나가는 힘있는 첫걸음으로 서방에서는 이 모든 근대적 진보에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이 안에서 작은 체코 민족은 진보를 일구어 내기도 하였지만 나중의 패배의 원인과 뿌리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세했던 중세 유럽 가톨릭 세력과의 싸움에서 힘을 다 소진하고 200년 후 결국 적들의 지배에 무릎을 꿇어 1620년 마지막 투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일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15년 후스 동상건립에는 전 체코인들의 후원이 뒷받침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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