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구시청사
후스 동상에서 구시청사로 돌아오도록 하자. 젤레즈나(Železná) 거리쪽으로 10미터 정도 내려와서 광장 바닥에 철로 된 „프라하 정오선“ 표식이 있는 곳에서 멈추도록 하자. 몇 미터 더 아래에 있는 둥근 돌은 이전에 „마리아 여제 기념비“ 가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이 둘은 미리 앞의 서론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프라하가 도시들과 체코 개혁의 어머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카렐 4세 때 지어진 탑이 있는 전형적인 구시청사와 베이식의 윈도우가 있는 고딕식의 교회는 특히 체코 개혁 시대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또한 주요한 사건들도 일어나게 된다. 고딕식 베이 아래 있는 두 현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왼편의 작은 현판은 후스파를 이끈 사람의 한 명인 얀 젤립스키(Jan Želivský)의 두상과 연관된다.
현판 위에 써 있는 글은 (사회주의 시절에 제작된) 젤립스키를 „눈 속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설교자로도 활동하며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운 프라하 후스 주의자들의 급진파 대변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프라하에서 부르주아지들의 반동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그로 인하여 1422년 3월 9일 구시청사 앞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젤립스키에 대해서는 신시가를 여행하며 더 이야기 해보자.)
오른편의 시청 벽에 있는 큰 현판에는 반합스부르크 봉기를 주도하다가 1621년 6월 21일 시청사 앞에서 처형당한 27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맨 위에 적혀 있는 이름은 독일 개혁주의 파의 선두에 있었던 야힘 슐릭(Jachym Šlík) (이에 관하여서는 살바토르 개혁 교회 순례 때 자세히 알아보자.), 체코 형제애단을 이끌었던 바츨라프 부도베츠(Václav Budovec), 체코 양종성찬 주의자 폴쥐체의 크리슈토프 하란트 (Kryštof Harant z Polžic) 등이다. (이에 관하여서는 말라 스트라나 편에 더 설명된다.)
기념현판에 적혀져 있는 이름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흔히 사용되는 „27인의 체코 귀족 처형“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위에 언급한 세 귀족의 이름들 이외에 7인의 기사들, 그리고 프라하를 대표하였던 17인의 시민들의 이름들이 있다. 민족을 이야기 하자면 (이러한 구분은 그 당시 딱히 특별한 의미도 없었다.) 처형당한 사람들 중에 5명의 독일인들이 있었다! – 종교적인 구분으로는 16인의 양종 성찬주의의 후스파 사람들, 7인의 형제애단, 4명의 루터교도 순이다. (이들과 함께 가톨릭인이었던 후데니체의 디비쉬 체르닌(Diviš Černín z Chudenic)도 처형당하였다. 1618년 프라하성에 침입한 폭동자로 궁정 부집정관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 죄목이었다.)
구시가에 있던 처형장은 오늘날 보도에 모자이크로 새겨넣은 27개의 십자가로 나타나 있다. 왕관 모양이 있는 칼의 십자 교차 형상은 우리에게 처형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카트 미들라즈 (Kat Mydlář)는 다른 기구들 이외에도 4개의 칼이 사용되었음에도 새벽 5시에서 9시까지 4시간이 걸렸다 한다.)
시청 감옥은 꽤 자주 사용되었었다. 얀 젤립스키의 추종자들 뿐 아니라 양종 성찬주의자들의 대표들, 이를테면 프라하티체의 크쥐슈땬(Křišťan z Prachatic), 성 미할 교회의 믈라도뇨비체의 페트르(Petr z Mladoňovic), 성 일리 교회의 프지브람의 얀(Jan z Příbramě), 플젠의 프로코프(Prokop z Plzně) 목사도 이 감옥을 거쳐갔다. 1452년에는 과격한 타보르파의 일원이었던 플젠의 바츨라프 코란다 시니어(Václav Koranda starší) 목사도 감금된다. 이 곳에서 또한 프로테스탄트 대표자들은 1621년 처형당하기 전 날 밤을 보낸다. 모든 성직자들은 종교적인 정신적 지지로서 신 양종 성찬 주의자들과 독일의 루터파 교도들에게 보답할 수 있었다. 형제애단 지도자들은 그들의 성직자들을 부를 수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하였다. (바츨라프 부도베츠는 예수이트들의 신부들을 불러 주겠다는 제안도 완강히 거부 하였다.)
후스 시대에 시청사의 큰 회의실에서는 양종성찬 교단 감독 평의회뿐 아니라, 감독 선거도 이루어졌다. 이 곳에서 열렸던 가장 중요한 행사는 지역 영주였던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를 체코 왕으로 선출하였던 1458년의 선거였다. (시청사 회의실에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주는 바츨라프 브로직(Václav Brožík)의 그림이 있고, 그 옆에 콘스탄트 종교회의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얀 후스의 그림이 있다. ) 오늘날 큰 회의실이 있는 (폭넓게 장식이 된 창문으로 외부에서 볼 수 있는) 시청 부분은 전에 베들레헴 교회의 공동 설교자이자 상인이었던 바츨라프 크쥐즈(Václav Kříž)의 집이기도 하였다. 이 집에서 얀 후스도 자주 머무르기도 하였다. 이 집은 1461년 시청으로 편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