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종교개혁 유적지 순례] 5. 성 미꿀라쉬 교회당과 구 시가지

5. 성 미꿀라쉬 교회당(Kostel sv. Mikuláše)과 그 교회주변의 구 시가지

구시가 광장의 북동쪽에 마찬가지로 유명한 종교개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웅장한 바로크 건물 성 미꿀라쉬 교회당(구시가지의 이 교회당은 말로스트란스카의 같은 이름의 교회당과는 다르다 –IV/8)이 눈길을 끈다.
이 이름의 초기 고딕양식의 교회당은 상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던 뽀지츠(Poříč)에서 스따레 미에스또(Staré Město)로 1230년에 이주한 독일 상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14세기에 교회당은 정면의 탑과 함께 세 줄로된 좌석으로 재건축되었으며 그리고 띤 앞에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건축이 완성될 때까지 스따레 미에스또의 사제관 교회당으로 사용되었다(II/5). 까렐 4세 시대인 1364년 이후 성 일리(Jiljí) 교회의 얀 밀리츠(Jan Milič)가 여기서 자주 설교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대학 교구를 위해 그리고 체코와 독일 두 민족의 프라하 지식인을 위해 선포되었던 라틴어 설교(베들레헴 채플이 세워지기전)였다. 그러나 특별히 여기에 1381년부터 계속해서 체코 종교 개혁적인 설교가와 신학자이면서 끄로미에지쉐의 얀 밀리츠(Jan Milič z kroměříže)의 충실한 학생이자 추종자인 야노보의 마뗴이(Matěj z Janova +1389)가 활동하였다.

야노보의 마뎨이는 따보르 지역의 신자였으며 9년간 학업 후 대학의 마기스터 학위를 수여하는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때부터 그의 별명은 „파리 선생“). 프라하에서 그는 교회의 직책을 맡지 못하였으나 겸손하고 매우 학식있는 신학자로서 까렐 시대때 유명한 개혁주의적인 설교가이면서 소설가인 예쇼보의 보이떼흐 란느꼬바(M. Vojtěcha Raňkova z Ježova +1388)의 물질적인 지원을 많이 받았다. 성 미꿀라쉬 교회의 설교가로서 마뗴이는 – 많은 신부와 수사들의 반대자들을 비판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저항을 받으면서도 성경에 의한 하나님 말씀의 순복과 성만찬의 거룩한 공동체를 위해 완강한 십자군이 되었다. „신 구약 성경의 법칙에 대하여 (O pravidelech Starého a Nobého zakona)“라는 라틴어 작품들에 그의 열성어린 성경공부의 결과들이 들어있다. 신학적으로 그는 미스뜨르 후스(mistr Hus)와 야꼬우백(Jakoubek)의 후대 종교개혁의 노력을 위한 토대 마련을 도울 수 있었다. (그의 구호는 : „선한 삶을 위해 기독교인이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상화된 성화와 성골을 거부하였으며 이로 인해 교회 지도층은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미꿀라쉬 교회당을 1415년부터 후스파 양종성찬지지자들이 사용하였다. 1537-1552년까지 양종 성찬 지지자들의 돌르니 꼰지스또즈(dolní konzistoř – 번역자 주: 교회를 지원하던 제도)의 책임자가된 얀 미스또폴(Jan Mystopol)이후에 신부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양종 성찬 지지자들의 교회의 마지막 목회자인 빅토린 브르벤스끼(Vikorin Vrbenský)가 스따로미에스께(번역자 주: 번역하면 구시가) 광장에서 사형집행(번역자 주: 1621년 빌라호라 전투이후 개혁교도처형을 말함) 전에 시 감옥에서 사형수에게 성만찬 집례를 허락한 신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잠시 후 그는 다른 개혁파들의 설교가로서 프라하로부터 추방되었다. 반 종교개혁 시대 때 교회당은 엠마오 베네딕트에게 넘겨졌고 그들은 그 교회당을 자신들의 새로운 수도원으로 개축하였다. 1650 – 1660년에 교회당은 바로크 양식화되었고 1732년에 파괴되었다가 1735년까지 재건되어 오늘날까지 바로크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 미꿀라쉬 교회당의 다양한 재난은 이외에도 많았다. 요셉 2세(Josef II)의 개혁시대 동안 다른 교회당들과 수도원들처럼 폐쇄되었고 1865년부터 콘서트 홀로 사용되고있다. 1914-1916년까지 식당으로 사용되었으며 동방정교회에게 사용권이 넘겨졌었다. 1920년부터 체코슬로바키아 후스파 교회(Církev československé husitské)가 프라하와 전국교회의 본부 교회로 사용하고 있다.

미꿀라쉬 교회당으로 들어가는 중앙문은 다른 쪽(서쪽)에 있다.(왼쪽으로 돌아가자.) 그 뒤편에 교회당이 후에 시민들의 거주 주택으로 변경된 베니딕트 수도원 건물들과 연결되어있다. 소위 „탑 옆에“로 불리우는 그 건물의 끝에 독일출신의 유명한 유대인 소설가 프란쯔 카프카(Franz Kafka +1924)가 태어났다. 그 집은 1902년에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유명한 소설가의 흉상이 있는 문화재 표시판이 그 집을 장식하고있다.

스따로미에스께(구시가) 광장으로부터 성 미꿀라쉬 교회당을 따라 프라하 성 방향으로 말레(작은) 광장(Malé náměstí)을 거쳐 까렐 다리쪽으로 끄랄로브스까 체스따(Královská cesta 번역자 주: 번역하면 왕의 길) 거리가 있다.우리들의 첫번째 도보 코스는 그러나 여기서부터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않은 베들렘스까 까펠(Betlémská kapel 번역자 주: 베들레헴 교회 또는 채플)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쪽으로 가면서 몇 군데 들러야 할 곳이 있는 매우 흥미 있는 오래된 샛길과 골목길들을 거쳐가게 된다.

우 라드니쩨(U Radnice) 거리쪽 남쪽방향으로 돌아들어가면 프라하의 가장 오래된 장터 말레 광장(번역자 주: 번역하면 작은 광장)을 통과하게 된다. 광장 중앙에 16세기 중엽의 녹색 르네상스 철망이 있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그 주변의 집들은 아직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지하실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 „조그마한 광장“에서 우리의 도보 코스 방향으로 오른편에 특별한 문화재 주택 우 빌레호 르바(U Bílého lva 번역자 주: 번역하면 흰 사자 곁에) 2/145호를 볼 수 있다. 모로코양식의 외관에 후기 고딕양식 문 입구 위에서 사자가 보호하고 있다. 이 집에서 후스파 시대에 1487년 프라하에서 첫 번째 체코 책 – „다윗의 시편(Žaltář Davidův)“이 인쇄되었고 1488년에 소위 프라하 성경(Bible pražská)이 출판된 캄파(J. Kampa) 인쇄소가 있었다. 그 출판자들은 두 명의 열심있는 양종성찬 지지자들이었다.: 그 두 명은 이 집의 주인인 마뗴이 상인(kupec Matěj)과 옆 집 주인인 얀 삐뜰릭(Jan Pytlík)이다. 다른 두 명의 후스파 지지자들이 출판을 지원하였다. (프라하의 첫번째 체코어 성경 출판에 반세기 뒤에 얀 멜란트리흐(Jan Melantrich)과 그의 동업자들이 참가하였다. –I/2 참고). 16세기에 „우 빌레호 르바“ 집은 유명한 후스파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책출판업자 호디슈뜨꼬보의 미꿀라쉬 꼬나체(Mikuláš Konáče z Hodištkova +1546)의 소유가되었다.
말레 광장 에서 계속해서 남쪽으로 11/459호 건물의 샛길로 걸어가면 입구에 두개의 기둥을 따라 „리흐뜨로비 부부의 나다츠니 둠“(번역자 주: 번역하면 복지사회단체의 집이란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집이 복지사회를 위해 기부 된 집인지 아니면 복지사회단체의 사무실이었는지 확인을 못하였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공간의 낮은 마당을 가로질러 미할스까 거리(Michalská ulice)를 만나는 출구로 나온다. 여기서 바로 왼쪽으로 돌아가면 종교개혁의 역사가 있는 유명한 유적지 앞마당으로 통하는 짧은 샛길을 통과하게 된다.

Subscribe
Notify of
guest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