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벽 속의 성 마르띤 교회

11. 벽 속의 성 마르띤 교회 (Kostel sv.Martina ve zdi)

교회의 이 독특한 이름은 중세 교회 형태와는 다른 모습과 관련이 있다.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던 성 마르띤 채플은 예전의 성 마르띤 우예즈드 (움푹 파인 길이라는 뜻:역자주) 지역에 있었다. 바츨라프 1세 집권 시절인 1232년 구시가 성벽이 완공된 이후 채플의 남쪽 벽이 성벽에 포함된다. 1350년 고딕 양식으로의 재건축이 끝난 이후에도 신 교회는 계속 성벽의 일부로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후스개혁 시대에는 양종성찬 교회로 흡수된다. 이 곳에서 얀 후스(Ja Hus)는 사제 서품 이후 첫 설교를 하게 된다. 지역 교회의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베들레헴 채플의 완공 후 마르띤 교회는 베들레헴 채플과 \"동등한\" 지역 교회가 된다. 그래서 1414년 가을, 당시 신부였던 흐라데츠의 얀(Jan z Hradce)은 후스 이후 베들레헴 채플을 담당하던 야꼬우벡(Jakoubek)의 부름을 받아 일반 신도들에게도 성배가 주어지는 양종 성찬을 시작 할 수 있었다.

이 성찬 방법(라틴어로 sub utraque parte – 양종 성찬법)은 야꼬우벡(Jakoubek)에게 1415년 봄 콘스탄츠 감옥에서 보낸 응답으로 후스가 승인 한 것이다. 베들레헴 설교관에서 나온 이 개혁적인 소식은 성찬식에서 성배를 모든 이가 함께 공유한다는 의견에 대한 큰 강조였다. \"평신도 성배\"는 일찌기 다른 교회에서도 이루어졌다. 후스의 순교 이후 바츨라프 4세는 프라하 사람들에게 프라하의 8개 다른 교회에서도 양종 성찬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벽 속의 마르띤 교회는 베들레헴 채플의 지역 교회로 반 개혁 초기시절, 즉 양종 성찬의 마지막 목사였던 야꿉 야꼬비데스(Jakub Jakobides)가 1621년 프라하를 추방 당했을 때까지 역할을 다하였다. 1678년 교회는 차츰 화재를 당하였지만, 약 100년 후 바로크 양식으로 조금씩 바뀔 즈음 재건될 수 있었다.

바로크 시대 교회 옆에 그의 조각으로 프라하를 장식하였던 조각가 가족인 브로꼬프家(rodina Brokoffů)의 사체가 안장되어있다. (교회의 북쪽 측면에는 F.M. 브로꼬프 초상이 부조되어있는 현판이 잘 보존되어있다.)

요제프 개혁시대인 1784년 마르띤 교회는 없어지고, 계속 가게 창고로 쓰여지다가 나중에는 야간 카페로도 쓰인다. 1904년 프라하 자치 당국은 낡은 교회 건물을 사들여 1905-6년까지 건축 공사를 하게 한다. 그 당시 내부 공간 안에 있던 성물 안치소가 발견 되어 원래의 로마네스크 양식대로 복원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세워지고 프라하 시는 영어 예배를 위하여 감리교단에 이 교회를 대여한다. 나중에 교회는 저녁 학생 청년 예배를 위하여 체코 형제개혁교단에 위탁된다. 체코 형제개혁교단은 1975년 교회 공사에 관여하게 되는데, 몇 번의 공사를 더 거친 후에는 교회 내부에 오르간도 설치한다.

교회 재단 뒤 반원형으로 된 부분에 펼쳐진 성서와 함께 있는 성배상은 체코 개혁의 기본적인 상징이다. (상징은 이 책 표지에 나와있다.) 지붕 아치에 있는 두 문장은 중요한 두 후스파 시대의 가문의 문장을 의미한다: 블까노프家(Vlkanov, 반은 개, 반 늑대 – 오른편)와 끄볘뜨니쩨의 홀레츠家 (Holec z Květnice, 왼편의 백합 문장).

벽 속의 마르띤 교회 뒷편 연와조 건물안에 나로드니 트지다(Národní třída)로 통하는 복도가 두 개 나 있다. 이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20m정도 넓은 복도와 쁠라띠스 마당까지 올라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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