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 한인 예배 (2003년 07월 13일)
  • 시 90:1-17
  • 설교자: 오지훈

2003. 7. 13. (삼위일체 넷째주일)

본문: 시편 90편 1-17절

제목 :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설교자: 오지훈 전도사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풀은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사라지고,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들추어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분노의 위력을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주님의 진노의 위세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체코 형제 교회 성도님들을 만나게 된 것을 참으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견습 선교사로
파송되어 약 1년이라는 기간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이렇게 여러분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픈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90편입니다. 이 시편의 제목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가 드리는 ‘기도시’ 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드린 이 기도문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세가 드린 기도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영원하신 하나님’, 5절부터
11절에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연약하고 유한한 인생’, 12절에서 17절, 끝까지는 ‘은총을 간구하는 소망’ 크게 이렇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 제가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이것이 1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이 기도 시를 썼을 당시에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광야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였을 겁니다. 광야 생활을 할 때는 편안한 집이 없었습니다. 천막을 치고 텐트 생활을 한 거지요. 1절에 나오는
‘거처’라는 단어는 여행자가 잠시 머무는 장소, 안정감을 느끼는 곳을 의미합니다. 나라와 집, 거주하는 땅 없이,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오직 하나님 만이 거할 곳이라고 모세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아니
언제나 착각을 하고 삽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도 착각을 하고 사는데, 체코인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얘기를 잠시
하면, 1년여의 생활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를 떠나면서 짐을 싸게되었습니다. 근데, 짐을 싸면서 너무나도 머리가 복잡하고 아팠습니다.
왜 이리 쓸데없는 짐이 그리도 많은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가야 하나? 오스트리아에서 겨우 1년밖에 생활을 안했는데도
생각보다 짐이 꽤 있었습니다. 저 역시 착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의 생활이 이제 다 끝났는데,
이곳이 마치 나의 영원한 거처인 양 생활을 했구나! 이것이 저의 작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가
가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곳이 영원한 거처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저부터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모세의 고백처럼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바로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인간들은 티끌에 불과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
맘을 괴롭게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제 맘이 속상해서 심히 괴로워하는 중에 주님께서 이렇게 위로를 하시더군요.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바로 3절이었습니다. 3절에 뭐라고 써 있습니까? ‘너의 인생들은 돌아가라’ 라고 되어 있지요? 그 때 이 말씀이 제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를 지금 괴롭히는 그 사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그 사람,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가 없구나! 왜냐하면, 언젠가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죽을 거지만, 그 사람 역시
죽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맘에 큰 위로가 되더군요. 혹시, 여러분 주변에 누가 여러분을 속상하게 한 일이 있거든, 시편
90편 3절을 깊이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아! 그 사람, 나를 괴롭히고 나의 맘을 상하게 한 그 사람! 언젠가는 티끌로 돌아
갈 거야. 이렇게 한번 맘을 먹어보십시오. 그렇게 맘을 바꾸면 갑자기 그 사람이 불쌍해 질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전보다는 덜할 겁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자, 곧 영원한 하나님 아래서, 우리는 다 같은 피조물이라는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게 됩니다. 유한한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중 불교는 윤회설을 주장합니다. 돌고 돌고, 또 돌고…. 시간의 끝이
불교에서는 없습니다. 니르바나, 즉 열반에 들어갈 때까지는 불교적 시간관은 계속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시간입니다. 바로, 원적인
시간관입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이와는 현저히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라고 시작됩니다. 처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이 존재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처음과 끝이 명확합니다. 직선적인 시간관을 갖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시간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시간을 뛰어넘으시는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간 또한 친히 창조하고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곳 유럽 지역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처음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영원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전도서 12장 1절부터 2절을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을 기억할 뿐 아니라, 유한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기꺼이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5절부터 12절까지 말씀을 다시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오늘 설교 제목이 뭡니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다 함께 따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여러분! 방금 전에 제가 우리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착각인가 하니,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인양 착각하고 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되십니다. 우리가 늘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착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90편에 전체적인 주제인 ‘시간’과 관계된 착각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생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군생활을 할 때 장교로 생활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남북한으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저는 군대 시절을 휴전선을 지키는 소대장 생활을 하고 중위로 전역항였습니다. 군 시절에
삽질을 비롯하여, 밤에 잠 안자고 함께 근무 서는 병사와 장기두기, 말 지지리도 안 듣는 부하들 열심히 혼내주기 등등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배웠지만, 그 중에 배운 가장 유익하고 좋은 것은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중에 군에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군에서 휴가를 나갈 때, 그냥 휴가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옷도 다리고,
구두도 닦고 모자도 빠빳하게 데리고… 무엇보다도 휴가증이 있어야 휴가를 갈 수 있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부대에서는 병사들 휴가
내보내기 전에 휴가 계획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몇 박 며칠 휴가기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계획서를 제출해야만
제가 내용을 확인하고 휴가증을 주었습니다. 근데 이것을 뭐라고 불렀냐면 꺢캤린宛퉬이라고 불렀습니다. 단어 뜻을 풀어본다면 겣  후
자, 걸음 보 자, 붙여보면 꺏斌?퐚 좀 유식하게 영어를 써서 표현하면  꺕  스텝 플랜  정도 될 겁니다. 꺏米  걷는다 
라는 뜻이죠. 계획서는 이렇게 작성됩니다. 몇 박 며칠 휴가라고 할 경우, 돌아오는 날부터 계획서는 작성됩니다. 즉 복귀일로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작성을 하는 겁니다. 이를 뭐라고 부른다고요? ‘후보 계획’이라고 합니다. 후보계획은 복귀일부터 시작하여 휴가
출발일로 끝나게 됩니다. 이 계획서에서의 시간은 거꾸로 흐릅니다. 어떤 병사는 후보 계획을 알차게 세웁니다. 세세한 시간까지 적어
넣으면서 알차게 세웁니다. 왜냐하면 휴가 시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귀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제대를 얼마 앞둔 말년들은 어떻습니까? 형식적으로 대충 대강 적어서 제출합니다. 휴가를 다녀 온 병사들에게 휴가 기간 잘
보냈느냐 라고 물어보면 후보계획을 잘 세운 병사와 후보계획을 대강 세운 병사의 대답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형식적인
것처럼 보여도 귀한 휴가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한 병사의 시간과 대충대충 후보계획서를 작성한 병사의 시간은 질적으로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한한 인생을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영화속에 수퍼맨만 앞발을 이렇게 내밀고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신속히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삶을 보람 있게 보내려면 우리 모두는 ‘인생의 후보계획’을 잘 작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는 인생의 계획을 ‘지금’이라는 시점을 기준으로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중에는 앞으로 살 날이 지금껏 살아 온 날보다 그리 많지 않은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태어난 것은 순서가 있어도 죽는
것은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 죽을 것인가? 과연 나는 언제 죽을 것인가?

제가 좋아하는 한국의 위인 중에 일제 시대 살았던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분은 일제 암흑기 시절에 어린
학생들을 계몽하는데 애를 쓰신 교육자였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사상가인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었고, 도산 학교 2대 교장을
지내시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거의 도가에 나오는 도사처럼 사신 분입니다. 그분의 기이한 행적 중 이 시간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정하고 사셨습니다. 하루에 잠도 겨우 4시간밖에 주무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식사를 단 한 끼만 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절제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기차를 타고 두 시간 가야 할
거리도 걸어 다니셨다고 합니다. 밤 8시부터 12시까지가 그분의 취침 시간이었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깨어서 활동을 했습니다. 밤
12시에 일어나면 그 한밤 중에 성경 말씀과 여러 서적을 읽고 주로 기도와 묵상을 했습니다. 동이 틀 때까지 말씀을 보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한 도인이었는데, 절제와 규칙적인 생활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자신이 죽기로 작정한 그날에 결국 죽지 못하고 몇
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자기가 정한 기한 내에 죽지 못했습니까? 죽기를 작정하고 하루하루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오래 사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은 하루하루가 종말론적인 삶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똑바로 살기
위한 몸부림이 매일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일 당장 죽는다면? 아니, 이 예배가 끝나자마자 죽는다면? 여러분!
다시 12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 모세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혁 신앙의 숭고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체코 나라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연약함은 더 큰 성숙으로 나아가는 원인이 됩니다. ‘아,
내가 바이올린을 참으로 못하는구나’ 깨닫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열심히 해야지’ 이런 각오와 결심을 갖고 바이올린을 합니다.
근데, ‘아, 난 바이올린을 참 잘해’ 이런 교만한 사람은 오히려 그 이상의 발전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부족함은 우리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 즉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정된 시간을 주셔서 근신하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회 신부였던 헨리 나우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한데, 이런 내용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가장 큰 선물이다” 죽음이 선물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유한함을 깨닫고 겸손히 그분께 나아갈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유한함, 즉 허무함을 깨달을 때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13절에서 17절을 제가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이 단락은 앞에서 살핀 두 단락의 내용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 단락 6절을 살펴보면, 우리 인생의
덧없음을 뜨거운 태양 아래 금방 시들어가는 풀의 꽃에 비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분위기가 강렬한 소망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급작스러운 반전은 하나님의 시간을 깨닫는 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흔히 신학에서는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나는 크로노스 적인 시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 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라는 것은 시간의 양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카이로스의 시간은 시간의 질적인 개념입니다. 크로노스는 그냥 일상적인
시간입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카이로스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학교 수업 시간을 상상해 봅시다. 그것도 밥을 방금 먹은 오후의 첫 수업시간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시간은
졸음도 오고, 매우 졸린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이 크로노스적인 시간입니다. 학생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흘러가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업 마칠 즈음이 되어 교수님이 시한폭탄을 투척하는 발언을 합니다. 이런 말씀을 합니다.
“자, 다음 주 이 시간에 시험을 보도록 하겠다. 그 시험에서 점수가 시원찮은 학생은 모두 낙제시키마!”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졸음을 깹니다. 그것도 그냥 깨는 것이 아니라 확 깹니다. 그 때부터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의미 없던 시간이 의미가
생깁니다. 무의미하던 시간이, 양적인 시간이 질적인 시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교수님의 선포 이후, 학생들에게는 시험 보는 그
날까지 일분일초가 소중한 시간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다함께 고린도 후서 6장 1절에서 2절을 한 목소리로 찾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시간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전반부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은총을 소망하며 간구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고 그에 반하여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한계를 지닌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만든 지혜가 그에게 이러한 소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주님의 은총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혼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모세의 기도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한 기도입니다. 모세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라는 표현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바로 ‘우리’ 입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은 이후의 시간, 즉 카이로스 적인 시간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시간은
‘나’를 넘어서는 시간입니다. 나를 넘어서 그것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미국 영화중에 ‘나홀로 집에(Home
Alone)’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아주 어린 꼬마애가 크리스마스 휴가기간 동안 집에 혼자 남겨져 집을 지킨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전 그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나홀로 천국에(Heaven Alone)’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에 있는 사람들은 ‘나홀로 천국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천국에(Heaven All Together)’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 누가 복음 19장 8절에 삭개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을 만난 ‘그 시간’ 이후, 그 ‘하나님의 시간’에 삭개오는 이런 놀라운 선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과거에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다가 비로소 남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 즉,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그림을 보러 미술관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뭉크가
누군지는 몰라도 공포 영화 ‘스크림’을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절규’라는 작품은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런 그림입니다. (표현을 해준다.) 아무튼, 그런 그림을 그린 화가인데, 이 화가의 그림을 쭉 감상하는 중에 말년에 그린 작품 중
하나가 제게 너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작품은 마침, 전시실 출구 나가는 곳 끝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그의 인생
여정을 헤아린 미술관의 사려깊은 공간배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작품 제목은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입니다. 그림을
보면 왼편에는 뭉크자신보다 커다란 괘종시계가 있습니다. 그 괘종시계에 시침과 분침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가운데에 늙은 노년의
뭉크가 두 팔을 내리고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고 그냥 서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그 방 뒤편에는 하얀
문이 열려 있고 그 사이에는 무수한 그림들이 걸려 있습니다. 뒤에 걸려있는 그림들이 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 자신이 화가였으니까요. 문이 하얀 것은 아마 천국을 향하는 자신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머리 속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늙은 뭉크가 손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축 내려놓고 있습니다. 옆에는 시계가 있는데 시간은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침대가 있습니다. 침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성경에도 죽음을 ‘잔다’ 라고 말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괘종시계에 시간이 명확히 나와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침대, 바로 죽음은 직시하지만 언제 죽을지
시간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뭉크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았기에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어두운 면,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 소외감, 죽음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이 특별히 제게 와 닿았던 것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중에 12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에게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시간의 유한함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의 삶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는 그분의 지혜입니다.

끝으로

어느 무명 시인의 시 한편을 낭랑한 목소리로 낭송하겠습니다. 바로 저의 시입니다.

제목 : 장례식 연습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난 자리에 눕는다

이미 지나가 버린

아직 남아 있는

곧 다가올 나도 모르는

수많은 일들을

살그머니 내려놓고서

난 자리에 눕는다

오늘 이것만큼은

반드시

해내리라 다짐했건만

끝내는 못 끝낸 일들

아쉬워하며 후회하며

반듯이 

자리에 눕는다

다리를 뻗고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고

하루 동안

지은 죄

그분께 아뢰며

그 나라에 가고픈

마음 속

깊은 열망 되뇌며

엄숙하고, 고요하게

오늘도

자리에 눕는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풀과 같이 연약한 우리를 기억하시고 극진히 사랑하셔서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간 감사드릴 것은 우리에게 시간의 귀중함을 깨닫게 해주셔서 우리를 겸손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영원한 주님을 붙들고
매일 매일 살게 도와주소서. 모세의 기도처럼, 우리에게 우리 날 세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참
지혜란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임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주님을 모시고 우리에게 허락한 시간 속에서 나
혼자가 아니라,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였던 모세처럼 그렇게 기도하며 살게 도와주세요.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오지훈 전도사는 장로회 신학대학(광나루) 신대원에 재학중 오스트리아 단기선교사 1년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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