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3년 11월 26일)
- 누가복음 3장 1-6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주의 길을 준비하라 - 눅3,1-20.docx
<누가복음 3:1-6>
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 그것을 복음이라 합니다. 이 복된 소식을 전하고 있는 성경의 네 개의 복음서는 모두 서두에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그의 역할이 작지 않았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꼭 필요한 부분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세례 요한, 그는 누구이며, 그가 걸어간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1:6-8)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빛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이 그러했듯, 세례 요한 역시 하늘에서 바로 내려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 태어나 자랐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된 것처럼, 세례 요한의 출생과 역할에 대해서는 사전에 예고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전례를 따라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고자 성전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아들을 약속하며 말하였습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1:17)
이후 요한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성경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복음 1장 말미에 다음과 같이 간략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1:80)
그는 왜 빈 들로 갔을까?
요한은 제사장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계에서의 출세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지향하고 소망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2)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요한에게 임했다는 이 말씀이 그가 빈 들로 들어간 이유를 역으로 설명해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빈 들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의 정치 권력자들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의 종교 권력들자들에게 임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를 비우고 오직 하나님으로 채워지길 소망하며 빈 들로 들어간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물론 그는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도 자라면서 많이 접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태어나기 전 천사가 그의 부모에게 전해준 얘기도 그는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더욱 확실한 한 말씀을 기다리며 빈 들로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그의 마음은 정해졌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그 질문을 가지고 그는 빈 들로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3절은 그렇게 빈 들로 들어갔던 요한이 다시 세상에 나와 행한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3)
그가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 한 일은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그 세례의 의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다 합니다.
그것은 죄를 사하는 효능을 지닌 세례가 아니었습니다. 그 물 세례는 다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질 수 있는 죄 사함의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을 향해 진실하게 돌이킬 것을 결단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4절에 말하듯, 물 세례의 의미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입니다. 물 속에 잠겨 들어갔다 나오는 행위를 통해 이전과는 다르게 살겠노라는 결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물 세례는 당시 이방인들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 입회시키는 절차로 행해지던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을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의미로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베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부심 강한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얼마나 거슬리는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요한에게서 느껴지는 권위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수많은 무리가 세례를 받으러 그에게 나아왔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요한은 선포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렇다면 요한은 왜 그 일을 행한 것일까?
빈 들에서 요한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에 그 답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에 인용된 이사야서의 말씀, 한동안 저는 이 말씀을 그저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이 구약성경 예언의 성취임을 나타내려는 인용문이라고만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수요성경모임을 준비하며 이 본문을 다시 묵상하는 가운데, 어쩌면 이 말씀은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던 요한에게 임한 결정적인 한 말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이 성경 속에 존재하지만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던 어떤 말씀이 어느날 문득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아지며 인식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 때 요한에게 경험된 일이 바로 그런 일이 아니었을까요? 이미 알고 있던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쓰인 그 말씀이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지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있게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4-6)
본래 이 말씀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게 패망하고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들어 전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아무 희망이 없다고, 여호와 하나님은 갈대아인의 신에게 패배했고, 더 이상 그분에게서 구원은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말씀하시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 하여금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외치게 하셨습니다(사40).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러 오시니 그분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왜 준비가 필요할까? 준비되지 않은 마음은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으나 모두가 그 구원을 체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셔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오시는 길에 이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로 하여금 외치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자로 마침내 임하실 때 좋은 마음으로 그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절망한 마음은 위로하고, 교만한 마음은 낮추고, 거짓된 마음은 바르게 하고, 모난 마음은 평탄케 하는 일을 수행하도록 지시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바로 이 말씀을 따라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자기 뒤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실 메시야, 그분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회개의 물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자기 뒤에 오실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사람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설 수 있게 돕는 사역을 행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이 그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요한은 매우 구체적인 대답을 줍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시오.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시오.”
세례를 받으러 온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답합니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마시오.” 군인들에게는 이렇게 답합니다: “사람에게서 강제로 빼앗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며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아시오.”
사실 그리 특별한 지시가 아닙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애깁니다. 그들이 이렇게 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사함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리란 뜻이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은 그리 대단한 선행이라 말할 수도 없겠지만, 그렇게 살지 않던 사람이 그렇게 살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회개의 표현일 수 있고, 구원의 하나님이 그에게 오시는 길을 곧게 하는 일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라!
이것이 요한이 인식한 자신의 사명이었습니다.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야의 길을 곧게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6)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증언하는 것, 그것이 또한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요1:33-34)
저는 세례 요한을 신성시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하는 것을 아마 요한도 싫어할 것입니다. 사명자로서 그의 초점은 오로지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참되게 증언하는 데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며 증거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그분을 어떻게 섬기며 증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결정적인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이 오셔서 행하실 일을 소망하며 그분이 오실 길을 곧게 하는 것,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속에 좋은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일, 죄 사함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일, 이런 일들은 우리가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기독교 선교 역사는 이런 일들을 우리가 스스로 이루려 할 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결과들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려 할 때, 그것이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좋은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겸손하고 선실하게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잘 살아간다면, 주님은 우리 삶의 자리에 오셔서 우리 모두를 위한 그분의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음식바자회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행사를 준비하고 참여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 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어려운 이웃에게 필요한 선물 전달하는 일 자체도 물론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마음에 가닿길 바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지길 바라지만, 그분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게 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들을 생각하며 행하는 우리의 작은 섬김과 헌신을 통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일일 것입니다. 음식을 준비하거나 여러 모양으로 행하는 수고들이 다 귀하지만, 그것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 모두는 그저 인간의 일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한 그 길을 따라 주님이 오셔서 그분의 일을 행하시길 소망하며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아니라 가정과 일터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행해지는 일들도 있을 테니까요. 내가 하는 어떤 일이 진정 하나님의 일이 되기 원한다면, 그 일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일이 되게 하십시오. 그곳에 주님이 오셔서 역사하시기를 소망하며 그분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일이 될 때,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요한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말라기 선지자가 오리라 예언한 그 엘리야가 바로 당신입니까?” 요한이 다시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당신은 누구란 말이요?” 사람들이 재차 묻자 요한은 대답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요1:23)
소리.. 이것이 그의 자기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소리.. 뒤에 오실 메시야를 증언하는 소리, 다만 그 소리로 남는 데 그는 만족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그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오리라 한 엘리야가 이 세례 요한이 맞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통해,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를 비우고 주님의 오심을 소망하며 겸손히 주의 길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