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터 35호 (2004년 3월)
멜 깁슨의 복음
죽음을 기억하며 인간의 죄를 깨닫는 “재의 수요일” 즉 기독교의 예수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절 절기가 시작되는 날에 미국과 캐나다 전역 4,000여 개 극장에서 개봉된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 리얼한 폭력
장면으로 최근에 세간의 관심을 끌고있다.
유대인 단체는 “영화가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시키고 있다”고 비판을 한다. 그리스 정교회 수장인 흐리스토둘로스 대주교 역시 십자가 처형의 폭력 장면들이 반유대주의를 다시 유발시킬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였다. 1977년 “나사렛의 예수”란 명작을 직접 만든 감독 제피렐리(81)는 피와 유혈싸움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영화로 평을 하며 이 영화가 “쏟아진 피가 유대인들의 잘못이라는 것 말고 관람객들 특히 젊은이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겠는가”고 반문했다.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의 증오를 선동하는 이런 영화는 이스라엘에서 상영금지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기존의 예수 영화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이적 등을 거룩하게 묘사한 뒤 단지 고난과 죽음은 부활이라는 클라이맥스를 위한 긴장으로 묘사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수난”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그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완성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영화라고 평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상반되는 의견을 이끌어낸 영화의 폭력장면을 한번 직접 본 사람들은 “참혹한 영상이 2시간 7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잔혹한 폭력 앞에 고결한 예수는 없었다.” “가장 잔혹한 새디스트 집단에 의해 학대 당하는 한 인간을 묘사하였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뒤에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정도였다.”라고 말한다.
그 동안에 예수를 주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있었다. 1992년도의 영국 버밍험에서의 경험이니 10년이 넘었다. 예수를
주제로 한 영화를 모아 20세기 이후 최고의 종교학자이자 사회학자로 알려진 하비 콕스 (Havy Cox, 1929. 5. 19 -)가 영화 속에 나오는 예수의 모습이 각각 다른 이유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B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외국 학생들과 복음서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에 대해 토론을 한적이 있다.
영화 속의 전통적인 예수의 모습은 온순하면서 저항적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직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예수의 모습은 “몬트리올 예수”에서 완전히 무너진다. 수염이 없고 젊고 힘이 넘치며 저항적인 예수를 상상케 한다. 그리고 “마지막 유혹”에서의 예수는 신 같은 존재가 아닌 유혹을 받고 또 그 유혹에 빠지는 고민을 하는 그런 우리 인간과 같은 모습이다. 이와 같이 영화 속의 예수의 모습이 각각 다른 것은 영화가 상영되는 그 당시의 사회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하비 콕스의 주장이다.
이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한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 멜 깁슨(Mel Gibson)은 왜 가장 수난 받은 예수의 마지막 생애 12시간을 2시간 7분짜리 영화로 만들었을까? 왜 수난 받아 고통 당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토록 생생하게 재현하였을까?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성장하였고 그곳에 있는 카톨릭 학교를 다녔다. 전통적인 라틴어 미사를 지금도 주장하며 성경본문 그대로의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번 영화는 이러한 그의 보수적인 신앙과 무관하지 않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영화를 영어 자막 없이 아람어와 라틴어만으로 상영하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영상을 통해 인간의 죄를 스스로 감당한 예수가 실제로 고통을 받았던 것을 보여주길 원하였다. 그는 어거스틴이 참회록을 쓰던 그 마음으로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영상으로 옮겼다고 한다.
영화 제작의 동기가 단지 개인의 신앙의 체험과 영화의 작품성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수난”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는 영상은 선악을 구분하여 폭력, 테러, 갈등, 전쟁, 분쟁을 스스로 정당화 하는 우리 인간을 향한 복음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신을 대신 하거나 신을 부정하려는 인간 세상에 보여주는 신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