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베네쇼브

베네쇼브(Benešov)

얼마 전에 베네쇼브(Benešov)를 다녀왔다. 오전 9시 30분에 약속이 있어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아침 출근시간을 감안하여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8시경 프라하 4, 콩그레스(Kongres)를 지나 1번 고속도로로 진입할 무렵 마주 오는 차선에 시내로 향하는 승용차들이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 줄지어 서있었다. 한참을 달려도 마주 오는 차선에 서있는 차량들의 꼬리가 끝나지 않았다. 프라하 경계를 알리는 큰 아치 조형물을 2-3 키로미터 정도 지나서야 차량 행렬이 끝났다.
도로 보수공사나 교통 사고 없이 이렇게 길게 줄을 지어 서있는 차량 행렬을 10년을 살면서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프라하를 40 키로미터 정도 벗어나 베네쇼브, 린쯔(Linz오스트리아 도시) 표시가 있는 출구를 타고 국도로 들어섰다. 자세히 보지 못하면 지나칠 듯 서있는 국도변의 베네쇼브 지경을 알리는 흰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원을 그리듯 급커브에 좁고 웅덩이가 패인 아스팔트 길을 따라 비스듬하게 하늘을 가르키는듯 땅을 가르키는듯 애매하게 매달려있는 시내 방향 표시 판을 암호 해독하듯 하며 길을 찾았다. 꼬노삐슈떼 (Konopiště) 성과 호수를 몇 차례 찾았을 때 그냥 지나치면서 한번도 들러 보지 않은 도시였다.
베네쇼브는 사자바(Sazava) 강과 신화의 블라닉(Blánik)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13세기 중반에 처음 수도원이 생기면서 차츰 도시로 발전하였다. 후스 전쟁 시대에 얀 쥐쉬까(Jan Žiška)가 이 도시를 정복하였다. 1415년 개혁파의 왕 이지 뽀제브라디(Jiří z Pořebrady)와 황제 실비오 피오코로미니 (Silvio Pioccolomini)와 교황 피우스 2세(Pius II )가 만나 협상을 했던 도시가 바로 이 베네쇼브였다. 이와 같이 체코 보헤미아 역사에서 보듯 베네쇼브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9시 30분 예정된 만남이 교회당에서 시작 되었다. 서로 간단한 인사와 소개를 나누고 시내로 향하던 출근길의 길고 긴 차량 행렬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그 교회 목회자가 „30분 마다 있는 열차로 프라하 중앙역까지 1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승용차로 출근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 그리고 업무 시간이 끝난 젊은 직장인들은 저녁 시간을 대부분 프라하에서 보내고 있어 일과 시간이 끝나면 오히려 베네쇼브 거리는 한가해 진다.“고 그 목회자는 덧붙여 말했다.
역사와 전통이 서려있는 인구 약 10만 명의 작지 않는 도시가 급격하게 가까운 대도시 프라하로 그 생활권이 편입이 되고있다. 그 목회자의 말을 빌리면 비단 베네쇼브뿐만 아니라 대도시에 인근한 중소도시들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경제가 급속하게 붕괴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현상의 주된 원인으로 „소비 지향적인 사회 풍조“를 지적하였다.
1989년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바뀌면서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거칠고 거무틱틱한 화장실 휴지가 부드럽고 하얗게, 이곳 저곳을 드나들며 구입하던 일상용품과 식품을 거대한 창고형 슈퍼마켓에서  ‚한 방에 날리고‘, 주말 오두막집에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텃밭을 일구던 사람들이 주말 심야 극장가로 모여들고, 늦은 시간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던 선술집은 새벽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화려한 까페와 디스코장에 밀려나고, 대중교통이 뜸한 주말에나 움직이던 낡은 승용차들은 업그레이드 되어 아무 때나 시내를 질주하고있다. 그토록 한국 매스컴에서 자주 들어 익숙했던  „향락 산업“  „소비 문화“ 라는 말들을 이 땅 체코에서 다시 듣게 될 그날이 가까이 있음이 느껴진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2003년 11월호 32호나눔터

[살며 생각하며] 나의 친구 나의 목사 이지 슈토렉

이름 없이 프라하의 한국인들을 사랑한
나의 친구 나의 목사

이지 슈토렉을 하나님곁으로 떠나보내며

1994년 2월 설교자가 없어 중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프라하 한인교회 교인 자녀들이 푹 머리 숙이고 카세트 녹음기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던 모습에 해외에서 절대 한인교회 목회는 하지않겠다던 나의 다짐이 무너졌다. 1년이 넘도록 자신들의 목회자를 찾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체코교회로 파송하는 마음으로 보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사실상 이제 교회를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었다.

단지 설교를 하였지만 설교자에게 교인에 대한 신앙적인 보살핌은 자연스럽게 설교와 함께 수반되는 일이다. 체코에 좀 더 깊이 뿌리를 내리려는 조급한 마음으로 그때부터 언어를 익히는 일과 체코교회를 출석하며 교회를 이해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때 체코교회에서 두 사람의 목회자와 한 사람의 평신도와 깊은 교제를 하였다. 그들은 내가 체코교회를 이해하는 관문이 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지 슈토렉 목사였다.

현재 필자가 소속되어 일하는 체코형제개혁교단의 해외교회협력부의 책임자가 선교적인 활동이 가장 왕성한 교단의 대표적인 목회자로 추천을 하여 그와 처음 만난 것이 1995년 가을 무렵 프라하 4지역의 이쥬니 므녜스또에서 열린 주일 저녁 예배였다. 프라하 지역에서 유일하게 슬럼화가 되어가는 프라하 4지역의 이쥬니 므녜스또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감리교회 침례교회 체코형제개혁교회 그리고 카톨릭교회 기독교인들이 연합해서 예배를 드리며 서로 일치하여 자신의 지역을 복음으로 섬기는 선교활동을 하고있었다. 이 에큐메니칼 선교활동의 주창자가 바로 이지 슈토렉 목사였다.

몇 차례 그 예배와 활동에 참석하면서 그를 더 깊이 알게되었다. 카톨릭과 개혁파들 사이의 오랜 종교전쟁으로 분열된 체코 교회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무신론적인 사회에 가까이 가려는 그의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종교적인 도움을 배척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관리하는 수용환자 800명, 의사 직원이 천명이 넘는 대단지 마을을 이루고 있는 프라하 8지역에 있는 보흐니쩨 정신병원과 지역 목회자로서 깊은 신뢰를 형성하여 병원에서 임명한 환자상담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그는 지역사회에 눈에 보이지않게 무신론적인 사회분위기와 기독교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무는 일들을 하고있었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세우는 그의 활동은 역설적이게도 오랫동안 생존을 지상과제로 삼은 소수파 체코개혁 기독교회가 스스로 사회를 향해 쌓아놓았던 벽과 동시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체코교회의 문제를 안팍으로 직시하고 있던 그에게 서로 다른 민족의 기독교회들과의 일치와 연대에 대한 필요성과 그 중요성에 대한 나의 설명이 그리 어렵지않게 이해되었다. 당시 나는 찰스대학의 개혁신학부 박사과정을 하면서 체코형제개혁교단에서 체코교회의 경험과 한국교회의 경험을 상호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프라하 8지역의 꼬빌리시 교회의 담임인 이지 슈토렉 목사와 이웃하고 있는 프라하 7지역의 프라하 연합한인교회(이전 프라하 한인교회) 담임인 오형석 목사에게 두 교회가 한 달에 한번 연합예배를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양쪽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각각 당회와 제직회에 의견을 물어보기로 하였다.

이 제안을 계기로 이지 슈토렉 목사는 체코의 한국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한번은 대우 아비아의 직원의 자녀가 어려운 질병에 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질병 때문에 의료보험 연장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이지 슈토렉 목사는 자기 일처럼 나섰다. 의료보험회사의 책임 있는 사람을 만나 그 자녀를 위해 보험회사가 마련한 특별기금으로 보험처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정을 이끌어 내기까지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그 자녀의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더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단 이 일 만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체코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함께 아파하고 그리고 힘써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그는 언제나 노력하였다.

그는 췌장암이란 판정을 1년 반 전에 받고 금년 6월 28일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년 반 동안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그 시간들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크게 배운 시간이었다. “이 목사, 의사 선생님이 이제부터 내 인생이 이전 보다 더 좋아진대.” 중요한 내장 기관에 퍼진 암을 떼어낼 수 없어 그대로 봉합을 하고 나온 후에 한 그의 농담이었다. 영문을 모른 나는 수술이 잘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 내 인생은 이전 보다 질적으로 훨씬 좋게 될거야.” 매주 월요일마다 검사를 받고 화요일마다 항암치료를 반복하였다. 항암치료로 힘이 들면 쓰러져 누웠다가 다시  한 줌의 힘이라도 생기면 일어나 목회 일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그에게 이전과 다른 일상생활이 있다면 병원에서 치료 받는 일이었다. 질병이 그의 육신을 죽어가게 하였지만 그의 일상생활과 그의 마음과 정신은 더 생동감을 느꼈다. 언제 부턴가 그는 욥기 42장 5절에 나오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는 욥의 고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설교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의 눈으로 이해한 성서의 깊이에서 흘러나왔다. 때로는 마치 누설된 천기를 듣는 것과 같아 전신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언제부턴가 팔 다리의 모든 근육이 풀어져 걷거나 설 수 없게 되어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설교를 하고 성만찬을 집례하고 세상을 떠나기 한달 전 사랑하는 막내딸의 결혼식을 집례하였다. 이미 자신의 시간을 예상한 듯 6월 29일 마지막 주일날로 예정된 결혼식을 한달 앞당긴 것이다. 그 날 결혼식을 마치고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한국인 교우들이 모인 곳을 찾아왔다. 결혼식 때문에 늦어진 예배시간을 사과하였고 딸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언과 같은 몇 마디를 자신의 한국교우들에게 남겼다. “여러분들은 우리 체코교회의 천사들입니다. 이곳은 여러분들의집입니다. 이 교회를 지켜주십시오. 다른 곳으로 떠나지 마십시오.” 세상을 떠난 그 주간 월요일 6월 23일 그는 당회에 참석하여 세시간이 넘게 중요한 일들을 마무리하였다. 마지막으로 당회에 교회 정원에 생길 납골당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안건으로 내어 당회는 그것을 결정하였다. 7월 첫째 주 체코 한국 연합예배 준비를 위해 그와 내가 만난 6월 25일이 마지막 이었다. 그 날 그는 “나는 고향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 보다 한국형제 자매들이 있는 이곳에 남고싶다.”고 하였다.

다음날 그는 숨찬 목소리로 전화를 하였다. 아무래도 7월 첫째주 설교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일단 그 예배를 이번에는 취소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다시 의논하자고 하였다. 그 다음날 그에게 손님이 있어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그의 방에서 나왔다. 그의 목회자요 선생님이었던 분이 방문을 하였다. 그는 그에게 축복기도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날 잠이 든 후 다음날 아침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장례절차를 모두 유언으로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6월 28일 토요일 오전 8시 숨을 거둔 직후 하늘과 땅을 소통하는 야곱의 사다리처럼 세상을 섬기는 그와 우리의 꼬빌리시 교회의 상징인  사다리 탑의 종(* 종 제작은 비뜨 성당의 종을 관리하는 체코의 유명한 종 제작 가문의 마노우쉑이 하였으며 이지 슈토렉 목사는 그 종을 <천사>로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이 종탑과 종은 한국 형제 자매의 헌금으로 세워졌다.)을 오랫동안 크게 울렸다. 천사의 종소리는 밀납처럼 누워있는 그의 침대 위로 평화롭게 그리고 나의 두 눈의 눈물로 흘러내렸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2003년 9월호 제31호 나눔터>

사랑은 인간소통의 언어

<사랑은 인간소통의 언어>

이세상에 그토록 다양한 언어들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한번쯤 스스로 질문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성경의 창세기 저자도 아마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고 그 대답을 하고있다. 그것이 바벨탑 이야기이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서로 다른 말이 생겨난 까닭을 설명하고있다. 처음에 언어가 하나뿐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여 힘을 합해 도시 문명을 건설하였다. 하늘 위에서 신이 의사소통을 하며 힘을 합하면 못할 일이 없을 인간의 능력에 놀라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계획을 저지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인간의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이 다른 언어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저자는 인간의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을 신의 개입으로 묘사하고있기 때문이다. 단지 언어가 의사소통의 문제라면 굳이 신의 간섭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신의 개입은 인간사회의 소통의 장애를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절망이 깔려있음을 의미한다.

인류역사상 인간사회에서의 소통 장애는 늘 존재하였다. 그리고 인류는 인간사회의 소통의 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회적으로 민주사회를 발전 시키고 기술적으로 통신을 발달시켰다. 현대사회는 신분과 계급보다 소통에 의해 그 사회의 성격과 질이 결정된다고 한다. 소통 장애는 소외를 낳고 소외는 불법과 폭력으로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을 위해 그 제도와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의 열린 마음과 관심이다.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랑이다. 마음이 통하는 체코친구와 이야기하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필자의 어눌한 체코어도 잘 이해하여 더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는 틀림없이 전혀 다른 한국음식도 맛있게 먹는다. 반대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 체코인과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쉬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들을 경험한다. 그래서 주눅이 들어 대화를 더 이상 할 수 없다. 물론 그는 타문화와 습관도 이해를 못하고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놀라운 것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같은 언어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심지어 왜곡되어 전달되고 전혀 달리 이해하여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사회적으로 기술적으로 소통의 제도와 기능이 발전하더라도 인간의 마음 안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나눔터 플러스를 통한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체코와 한국 두 사회의 만남이 서로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관심이 우리들 마음에 사랑을 풍성하게 해줄 것을 기대한다.

이 종 실

* 나눔터 플러스 2호 기고글

나눔터 플러스 창간에 붙여…

나눔터 플러스 창간에 붙여…

한국인들에게 체코는 그들의 인생의 목적지가 아니라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거쳐가는 곳이다. 각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정기간 거주한다. 대체로 체코의 한국인들은 20대 후반 부터 40대 초반의 활발한 인생의 시기를 체코에서 보낸다. 이 중요한 인생의 시기에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이상을 거주하면서 체코 사회를 가슴으로 느껴보지 못하고 귀국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그러니 자신이 숨쉬고 살던 사회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중부유럽의 조그마한 나라 그까짓것 잘못 이해하면 어떠하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체코의 삶을 내가 원했던지 아니면 원치않았던지 그리고 그 기간이 길든지 짧든지 나는 이미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고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숨쉬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존재가 형성되어간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곧 그 사회에 대한 자신의 존재의 모습이 된다. 우리가 자신의 사회를 바르게 이해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나 자신의 존재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체코의 한국인들을 위한 비정치적 비상업적 순수 생활 정보지 나눔터가 탄생하였다. 체코의 새로운 법령과 생활정보를 알리고 체코생활의 경험의 공유를 목적으로 하는 체코의 유일한 한국어 소식지이다.

소식지의 이름처럼 나눔터는 바르게 체코사회를 이해하고 유익한 해외생활을 이룩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삶의 나눔의 장소이다. 이제 이 나눔의 장소를 우리 한국인들만이 아니라 체코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장소로 발전하길 원하여 나눔터 플러스를 발간하게 되었다.

무지와 적의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이성과 과학의 진보 속에서 인간의 야만성을 경험한 것이 지난 세기의 우리들의 경험이다. 그 잔인한 야만성을 극복하기위해 인간은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하고있다. 그 노력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체코와 한국은 서로 부분적으로 알고있다. 필자가 만난 많은 체코인들은 한국에 대해 분단과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반대로 많은 한국인들은 공산주의 국가 체코슬로바키아를 기억하고있다. 서로를 모르면 서로를 업신여기게 된다. 외모로 사람과 나라를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체코와 한국 두 사회가 폭 넓고 깊은 상호교류로 사회적 존재양식이 더 발전하여 인류의 평화발전에 기여하기를 소망하면서 이 일에 나눔터 플러스가 조그마한 초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종 실

* 나눔터 플러스 창간호 기고글

<나눔터 플러스는 이종실 목사가 발간한 체코의 한국인들을 위한 정보월간지 나눔터를 년간 두차례 즉 성탄절기와 부활절기에 발간되는 나눔터를 나눔터 플러스라 하여 체코어와 한국어로 발간됩니다. 나눔터 플러스 역시 별도로 정부의 정기간행물로 등록하였습니다. 나눔터 플러스를 받아보기를 원하는 분들은 연락을 교회홈페이지 또는 나눔터 홈페이지를 통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살며 생각하며]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

[살며 생각하며]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



얼마전 서울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교회의 청년들 20여명이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단기 선교”라는 이름아래 청년 교인들에게 선교의 길도 열어주고 더불어 해외에서 많은 경험을 얻고 새로운 도전을 받도록 배려하는 프로그램을 재정 형편이 가능한 교회들이 계획하고 있다. 이미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교회들의 이러한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선교의 개념이 너무나 다양해서 단순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선교의 중심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긴급히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의 제자와 따르는 이들에게 한 마지막 부탁이었다. 이것을 “위대한 위임(委任)”으로 기독교인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은 이 위대한 위임을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도 각오하고 있었다. 이것을 수행하려는 그들의 충일한 열정과 헌신에 어느덧 선교현장에서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는 선교사인 필자 자신이 크게 도전을 받을 정도였다. 복음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망과 헌신을 보면서 한국교회와 나아가 민족의 미래의 희망을 느꼈다. 자기철학과 이웃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미래를 담고있는 그들의 열정과 헌신은 재기 발랄하였고 생동감과 창의력과 진취력이 넘쳐 났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과 헌신이 독선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어떤 일본 신학자가 기독교를 “교사(敎師) 콤플렉스를 가진 종교”로 표현하였듯이 기독교의 교리는 타 종교에 대해 우월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 기독교인들의 열정과 헌신이 자칫 열광주의와 독선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열광주의와 독선에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인간의 모든 역사를 이끌어가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열정과 헌신에 충일한 20여명의 젊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펼치고 싶은 일들을 잠시 접고 한 주간동안 체코교회와 슬로바키아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천년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자신의 교리를 전파할 기회 대신 오직 생존을 목표로 고난의 역사를 넘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신앙의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였다. 가난한 교회재정 때문에 겨울철 난방은 엄두를 내지 못해 영하 10도가 넘는 교회당에서 하얀 입김을 뿜으며 신앙을 대대로 이어가고 있는 이들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다른 모양의 열정과 헌신 속에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은 그들에게 새로운 눈(眼)의 열림이었다. 자신들의 열정과 헌신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자기 자신의 무지(無知)에 대한 앎이었다.

노자(老子)가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고 했다. 이 귀절이 기억될 때 마다 카톨릭의 종신(終身)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분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말의 깊은 뜻을 필자는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근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미 문 밖에 나와있는 필자 자신은 어쩌면 천하를 알려고 하기 보다 천하를 얻으려는 마음의 욕망이 앞섰던 것 같다. 문 밖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안고 다시 문안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의 여정이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어려운 질문으로 다가온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나눔터 제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