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자수 감소 그러나 군소교단과 종교단체 신도수 증가

기독교 신자수 감소 그러나 군소교단과 종교단체 신도수 증가

체코의 무신론주의는 점점 더 심화되고 기독교 신도수는 감소하고 있다. 최근 인구 조사에 따르면 체코의 59퍼센트가 무신론자들이다 (1991년에 39.8퍼센트 였다)
체코통계청의 통계는 이러한 경향이 주로 전통교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소수교단과 종교단체는 과거보다 교인수가 더 늘어났다.

가장 큰 세 개의 기독교단(로마 카톨릭, 체코개혁교단, 체코슬로바키아 후스교단)의 신도수가 2001년에 330,000명으로 전체신도수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91년에 소수교단의 교세는 모두 합해서 120,000명에 불과하였다. “통계의 분석을 부인할 수 없지만 깊은 역사를 지닌 체코형제개혁교단이 내일 문을 닫게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1990년 교회의 붐이 있은 이후 지금 우리교회는 활기를 되찾고있다”고 교회 대변인 이바나 베네쇼바가 말했다.

통계에 따르면 만명이 넘는 교세를 지닌 몇 개의 교단이 군소교단 가운데 널리 알려져있다. 동방정교회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개혁교회이다. 체코에서 토대가 없는 교회들 가운데 네번째 큰 교회로 23,000명의 교세를 지닌 여호와증인 종교단체가 대표적이다. 인구조사에서 여호와 증인은 8,000명의 신도가 증가하였다.

체코비숍회의 대변인 다니엘 헤르만은 전통교단들은 지금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처를 해야만 한다고 지적하였다.
교회들은 자신의 활동에 대해 숙고하고 그 도전에 대해 응답을 해야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활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소수교단(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종교단체)의 신자들이 증가하는 이유를 사회학자 얀 스뽀우스따는 “큰 유럽교회들은 역사적으로 국가의 지원에 익숙하여 예를 들어 미국의 기독교들 처럼 그렇게 활동적이지 않다”고 분석하였다.
체코 무신론자들은 전체인구의 3/5이다. 여성 기독교 인구가 약 57%로 남신도보다 많다. 시골이 도시에 비해서 그리고 저소득층이 고소득층 보다 기독교인구가 높다.

체코의 4개의 가장 큰 기독교 교회 및 단체
로마 카톨릭 2,700,000명
체코 형제개혁교회 117,000명
체코슬로바키아 후스교회 99,000명
여호와의 증인 23,000명
(위의 신도수는 인구조사의 통계이며 실질적인 종교활동인구는 대체로 위의 통계의 1/10로 어림잡고있다.)

[강의] 체코 공화국의 기독교인들

2003년 06월 24일 프라하
Josef Smolik (요셉 스몰릭 교수)

체코 공화국의 기독교인들

우리가 한국 그리고 체코 기독교인으로서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만날 때 이 만남의 순간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쁨과 감사를 올리게 하는 많은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에 교회를 존재하게 하고, 여러분들의 나라에 복음을 선포할 선교사들을 보내시고 정치 문화 언어가 다른 우리들을 이끌어주신 성령의 능력의 분명한 증거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기적을 있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할렐루야 찬송하게 하는 복음은 우리의 공통의 토대입니다.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들의 특별한 상황 속에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그리고 여기서 우리 교회들이 다른 시대에 다른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9세기 (863년)에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이 우리나라에서 읽혀졌고 성만찬이 배설되었고 하나님 영광을 찬송하였습니다. 이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그 은혜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에 교회는 이미 국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었습니다. 교회와 국가와의 밀접한 관계가 313년 콘스탄틴 황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15세기에 교회의 심각한 타락을 초래하였습니다. 교회는 유럽에서 대단한 권력과 부를 가진 기관이 되었습니다.교회가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동참을 하였습니다. 교회의 권력투쟁은 결국 교황이 세 명이 존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 당시 유럽의 황제는 찰스 4세로 프라하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황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완전히 붕괴되고 복음이 상실되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교회의 개혁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설교자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혼란하게 하고 그리고 성경과 일치하지않는 거짓 가르침을 하나님 말씀인 것 처럼 하게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노출된 교회의 위험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위험은 극도로 심각하고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개혁자 얀 후스를 불러 말씀대로 교회를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후스는 교회의 남용과 그리고 이 남용에 동참하는 사제와 비숍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프라하 베들레헴 채플에서 설교하였습니다. 후스에게 교회는 권력 기관이 아니라 신자들의 교제입니다. 후스의 설교는 성직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로마(교황청)은 후스를 고발하였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의 가르침을 취소할 것을 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후스는 공의회의 신부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이 이단인 것을 성경을 통해 논증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신부들은 논쟁 없이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취소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후스는 거절하였고 1415년 7월 6일 화형장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매년 국가 공휴일인 그날에 그의 죽음을 기념합니다.

후스는 화형을 당하였지만 진리 즉 후스가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는 불타 죽지않았습니다. 이 진리는 체코 민족의 가슴에 혁명을 일으키는 불이 되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십자군을 파병해 전쟁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체코인들이 후스의 이단 유죄판결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스의 추종자들은 후스를 옹호하는데 결연히 맞서 싸웠고 체코영토에서 십자군을 추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체코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후스파 혁명 프로그램은 프라하 네 개 조항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첫째조항은 그리스도에 의해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선포할 교회의 자유, 이전 신부들의 가르침의 형태 안에서 자유롭게 성경을 해석할 교회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체코어 성경번역은 온전하게 복음을 선포할 자유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두번째 조항은 떡과 포도주, 둘을 취하는 성만찬 배설을 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sub utraque이며 그래서 후스파들을 우트라퀴스트들 이라고 불렀습니다.) 후스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강조하였고 오직 사제들과 성직자들만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허락한 교회의 잘못을 꾸짖었습니다. 평신도들을 위한 잔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의 표시이자 하나님 나라에서의 종말론적인 기쁨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다음 두개조항은 경제 개혁과 세상 안에서 교회의 위치에 관한 것입니다. 세번째 조항은 교회가 가난해야만 되는지 아니면 정치적 권력이 없는 가난한 교회가 되는 것이 더 좋은 상태인지에 대해 질문하였습니다. 네번째 조항은 사제들과 비숍들의 면책특권의 지위를 거부하였고 그들의 범죄도 시민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만 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후스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외교협상을 통해 후스파들을 보수파와 급진파 둘로 분할하였습니다. 이것은 후스파 운동의 약화를 초래하였습니다. 급진파의 신학에서 형제단의 작은 교회가 시작되었고 후에 망명할 때 그들을 모라비안들로 불려졌습니다. 나의 체코형제교회는 개혁 장로교회 전통과 매우 가까운 이전 형제단의 유산을 다시 찾았습니다. 이미 15세기에 형제단은 사도권 계승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는 역사적으로 사도의 지위와 함께 시작하는 계승권을 신성시한 비숍이 있는 곳입니다. 형제단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은 비숍의 역사적 계승과 관련이 없고 사도의 복음과 그리고 사도의 신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직 계승의 거부는 박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형제단은 이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형제단의 가르침의 다음 특징은 정치권력과 경제착취에 대해 비판적 접근이었습니다. 교회가 정치적 구조의 통합된 부분이 되어서 안되며 교회는 권력을 가진자와 부유한자의 편에 서서 안되며 식민지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도 안됩니다. 형제단의 마지막 비숍인 얀 아모스 꼬메니우스(꼬멘스끼)는 경제 식민지주의의 해로운 결과 앞에 놓여있는 유럽국가를 경고하였습니다. 체코 영토로부터 추방된 후 형제단의 명맥을 이어간 교회 즉 모라비안들은 선교에 대해 특별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노예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노예들이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15-17세기 상황은 카톨릭교도와 개혁교도들 사이에 전쟁상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전쟁은 체코 공화국 지경에서 개혁교도들이 완전히 제거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단지 불법적으로 비밀스럽게 개혁교도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체코왕국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합스부르크 카톨릭 왕조의 통치를 받고있었습니다. 비엔나 카톨릭 황제는 국가의 절대다수를 의미하는 체코 개혁교도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황제의 조약협정을 어긴 예수회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의 반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유럽에서 발발하고 30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체코 프로테스탄트들은 1618년 백산에서 패배를 하였습니다. 27명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 프라하 구시가지광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개혁교도들은 국가의 진보정당들과 함께 매년 이 처형을 기억하고있습니다.

카톨릭과 개혁교회 서클과 일반 세속사회의 그룹들은 우리 역사의 이 사건에 대해 각기 다르게 해석합니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과제가 과거의 상호 부정의를 화해하고 많은 편견과 이데올로기 어프로치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 패배이후 개혁교도들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합법적으로 허락된 종교는 카톨릭 종교였습니다. (영국에서는 아주 반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개혁교도가운데 귀족은 나라를 떠날 수 있었고 일반 백성들은 노동력으로 남아있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강제로 카톨릭 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두개의 개혁교회들 즉 형제단 또는 후스파 신앙고백공동체를 제외한 개혁교회(칼빈개혁교)와 루터교회가 재카톨릭화후에도 생존한 남은자들로 자신들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1781년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칼빈개혁교회와 루터교회가 합스부르크 카톨릭 제국이 무너진 1918년에 체코형제교회로 연합되었습니다.

유럽의 기독교의 상황과 우리교회를 이해하기 위해 17세기의 약간 다른 정신적, 철학적 경향을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17세기부터 우리들은 설립된 교회의 교인수가 감소하고 사회적으로 불이익 집단 즉 노동자들 사이에 신뢰성을 점점 잃어가면서 유럽 기독교 지식인들의 진보적 경향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교회들은 기독교 문명과 문화의 나라로 자의식을 가진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나라에서 공적지위를 상실하고있었습니다. 세속화의 근본뿌리는 17세기 신앙고백(교리) 전쟁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귀족과 왕들 심지어 교회권력계층들은 자신들의 종교, 복음을 위해서 싸우지않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기독교 신앙은 단지 핑계였습니다. (우리는 북아일랜드에서 비슷한 상황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지식인들과 일반 백성들은 사랑과 화해의 복음에 대해 신뢰를 하지않았습니다. 새로운 운동이 유럽에서 강하게 일어났는데 그것은 계몽운동 이었습니다. 이 운동에서 이성은 진리와 철학과 실존주의적인 확신의 기초였습니다. 기독교는 비판을 받았고 기독교 교리는 거부되었습니다. 새로운 인본주의와 관념주의의 철학이 기독교 전통을 대신하였습니다. 문화와 연극이 교회의 예배 역할을 하였습니다. 계몽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통신분야를 목격하듯이 엄청난 과학 기술 발전을 출발시켰습니다. 많은 반종교적, 반기독교적 반교권적 요소들의 결과로서 계몽주의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들도 이런 상황들에 대해 반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건주의 신앙부흥운동, 새로운 성경연구들이 이러한 상황들을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복음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중심이 세속문화뿐 아니라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신학 안에서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방어적인 근본주의와 보수주의가 세속화된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것 없이 성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양차세계대전의 20세기 재앙이 있었습니다. 유럽교회들은 평화를 유지할 수 없었고 유럽 민족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다리역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도전과 교훈이 무엇입니까?

1. 교회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와 동일화할 때 교회는 정체성과 신뢰성을 상실합니다. – 정체성과 신뢰성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습니다. 교회는 권력 구조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유지하도록 요청받습니다. 신자의 시민권은 이땅에 있지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교회는 종말론적 실재입니다. 복음은 모든 권력과 공국(국가)를 초월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자유 안에서 살도록 그리고 세상의 조작과 도구의 희생이 되지않을 자유를 누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2. 유럽 교회들은 선교적 열정과 역동성을 상실하였습니다. 유럽대륙의 전통은 교회와 국가와 민족의 멤버쉽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속하였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모든 시민들은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오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의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경건주의자들과 신앙 부흥주의자들이 일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기존 교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상황은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거대한 선교의 장이 되었지만 선교활동과 사고의 전환이 총체적으로 결핍되어있습니다. 사고의 전환은 긴급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3. 체코 공화국은 유럽에서 가장 세속화된 나라입니다. 이것은 인구의 대부분이 외부의 강제적인 수단에 의해 카톨릭을 받아들여만 했던 반 개혁운동의 시대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카톨릭이 체코 백성들에게 이식되었으나 그들의 마음의 종교적인 깊이에 까지 영향을 끼치지못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베란 추기경은 이사실을 지적하여 공의회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 자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 처럼 복음이 다른 민족에게 이식될 수 없고 외국 문화로 포장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반면에 이 자유는 민족의 문화적 콘텍스트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 유럽연합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교회들은 자신의 삶에서 통합과 세계화의 과정에서 상실할 지 모르는 민족과 문화의 전통의 긍정적인 가치를 지킬 과제를 갖습니다.

4. 교회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성도의 교제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통해 그리고 설교를 통해 수행하는 예언자적 역할이 있습니다. 복음은 민족주의, 문화, 정치 그리고 경제 권력을 상대화시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과 그 공동체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것은 개 교회 공동체의 예언적인 존재로서 예언자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교회로서 우리는 지금 유럽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고, 교회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그리고 선교 활동이 정체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낙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앞에서 회개할 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 장로회 신학대학 역사신학의 종교유적지 탐방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에게한 강의내용

체코공화국의 기독교 종교인구

체코공화국의 기독교 종교인구
(2001년 인구조사)

체코 인구 10,230,060명 가운데 종교인구는 3,288,088명 (32,1%)이며, 비 종교인구는 6,039,991 명(59%) 이며 무응답자는 901,981 명(8,8%)이다. 32,1%의 종교인구는 아래와 같이 정부에 등록된 교회와 종교단체에 분포된다.

A. 기독교
I. 카톨릭 교회 (cca 27%): 로마 카톨릭 26,8% (2.740.780명), 그리스 카톨릭 (7 675) 그리고 구카톨릭 교회(1 605).
II. 개신교회 (cca 1,5%): 체코형제개혁교회 1,1% (117 212), 칼빈개혁교회0,1% (14 885), 슬레스까 칼빈개혁교회 0,1% (14 020) 그리고 루터개혁교회 (5 412).
III. 체코슬로벤스까 후스교회 1.0%(99 103).
IV. 오순절 계열 및 기타 개신 교회 (cca 0,3%): 형제교회 0,1% (9 931), 기독교 공동체 (6 927), 사도교회 (4 565), 침례교회 (3 622), 형제단 (3 426), 감리교회 (2 694) , 신사도교회 (449).
V. 여호와의 증인 0,2% (23 162).
VI. 동방정교회 0,2% (22 968).
VII. 제7일 안식일교회 0,1% (9 757).
VIII. 일신교(유니테리언 교도) (302).
IX. 몰몬교 (1 366).

B. 유대인 (cca 0,01%): 유대인 회당 (1 515).

C. 기타 1,9% (196 712).
정부에 등록된 교회나 종교단체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오순절 계열, 기타 세계종교 즉 이슬람, 불교 또는흰두교이며 체코에서 활동중인 이단종파이다.

비종교인구가 60%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자료는 체코가 전통적으로 기독교 국가임을 보여주고있다. 기타 다른 종교인구가 절대적으로 적기때문이다.

체코의 기독교역사는 8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현재 1200년이 넘었다. 세계 기독교역사에 14세기에 시작하여 얀 후스 선생의 시대에 그리고 후에 형제단의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오늘날 교회의 약화의 원인을 카톨릭 교회에 의해 주도된 반 종교개혁의 시대(17세기) 그리고 공산독재의 시대(1948-1989)에서 찾을 수 있다. 교인숫자가 줄어들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언으로서 세상에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전 유럽의 기독교의 위기의 시대에 1989년 이후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다. 오늘의 상황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즉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대다수의 일반사회에게 이상하게 비춰진다. 하나님을 믿는 것 교회당에 다니는 것은 현대적이지 않다고 오늘시대는 말한다. 일반사회는 카톨릭교회의 정치적 발언과 재산환원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반면 카톨릭 개신교 교회들의 사회봉사단체들의 활동(양로원, 무숙자, 환자, 미혼모 등등)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고있다.

다빗 유레흐
* 나눔터 플러스 창간호 기고글

[체코사회] 체코인들의 직장관

체코인들은 직장 때문에 이사를 원치않는다.

직장에 따라 이사를 하는 것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 유럽연합국들과 다른 유럽연합가입후보국들에 비해 체코공화국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과 사회의 통계기관의 야로미르 꼬띠꼬바에 의하면 체코공화국에서 다른 유럽연합국들과 비교할 때 노동력 이동이 매우 낮았다. 그리고 다른 유럽연합가입 후보국 가운데서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체코의 장년층들은 직장 때문에 자신의 삶의 뿌리를 변경시키는 이사를 하지 않겠다는 통계조사가 나와 주목을 받고있다. 직장 때문에 이사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직장을 찾기를 원하고있다. „직장을 바꾸면 떠돌이가 된다. 그리고 직장을 바꾸는 일은 계속된다.“ 꼬띠꼬바가 말하였다. 젊은 세대는 직장에 따라 이사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젊은 세대는 직장 때문에 이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돈을 더 받는 것을 원한다. 그들은 대체로 가족이 없다. 그들은 대체로 4번쯤 친구들과 함께 세를 얻은 뒤 그 후 독채로 세 들어 산다.“고 그녀는 말한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체코 노동자들의 이동은 폴란드와 비교할 때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있다. 폴란드의 경우 대학 졸업자의 상당 부분이 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있다. „폴란드는 결과적으로 그들의 경험에 기대를 할 수 있지만 한편 이들이 폴란드가 유럽연합에 가입되면 다시 돌아 오지 않을 것이라는 위험도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노동력 이주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체코에서는 없다고 한다. 분석자료는 대체로 24세까지의 남성 젊은이들이 여성들에 비해 직장에 따라 이주하는 것을 가장 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직장으로 인한 이주에서 실업자들과 학생들의 고소득 그리고 장기 고용계약이 가장 많은 이유였으며 결혼에 의한 거주와 직장도 있었다.

꼬띠꼬바는 직장 때문에 체코인들이 프라하 이사가 가장 높다고 하였다. 학업 이후에 그대로 남아있는 대학졸업자들에게 프라하 이주가 자연스럽다. 그리고 프라하 이주는 실업률이 높은 지방의 사람들이 많다. 남 체코의 경우 30키로미터 안에서 다른 직장을 찾고있으며 북 모라바의 실업자들은 자신의 지역 안에서 직장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이 프라하에 모라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이유라고 그녀는 지적하고 있다.

(리도베 노비니)

체코교회의 디아코니아의 문제

마가복음서에 예수님이 어떤 집에서 말씀을 하실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어디에선가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곳에 데리고 왔습니다. 마치 기적처럼 예를들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디아코니아의 실질적인 필요는 예수님이 잘 설교하는 그곳에 가리워있습니다. (역자 주: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을 뜻한다. 한국교회는 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선교활동과 관련해서 사회봉사활동 즉 디아코니아 활동을 하고 있지만 체코교회는 개 교회의 활동과 디아코니아의 활동이 구별되어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을 „디아코니아“ 라는 교회단체가 전담을 하고있다. 글쓴이는 이 글에서 자신의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기위해 디아코니아를 조직과 교회의 활동의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설교는 마지못해 행사하듯 건성이 아니라 진지한 디아코니아 실천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실천은 세상의 평판의 척도입니다: 세상의 동서남북 네 지역의 대표들이 이름 모르는 한 집으로 옵니다. 누워있고 들려가는 그 한 사람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인류를 구하는 거대한 계획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연함과 놀람은 디아코니아 봉사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이름 모르는 이 중풍병자 한 사람의 경우가 광범위한 변화들을 일으켰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도덕적인 차원의 요청에서 디아코니아가 생겨났습니다. 도덕적인 차원의 요청은 결국 개인주의가 되어 그 디아코니아의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교회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않고 단지 열심있는 자원봉사자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단지 대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고 결코 건강하게 하지 못합니다.그러므로 교회들이 디아코니아는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의 일이라는 인식이 결여되어있는 것에 놀라지 맙시다. 모든 고통스러운 문제들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실패와 좌절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교회당 안 어디에 그들을 위한 눈물이 있습니까? 그러한 문제들과 실패와 좌절의 그들의 눈물이 디아코니아에 있습니까?

사람은 실패할 수 있고 우리들 각자는 결국 패배하고 죽게 되고 승리하지 못하며 빈 손으로 온 처음처럼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억은 우리들을 많은 억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것입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우리는 생의 희망의 도구로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게 되고 거기서 우리의 실패가 끝이 납니다. 거기서 우리는 세상 끝날 까지 패배의 위험을 감수하며 승리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심전력으로 우리의 교회를 열린교회로 그리고 예배와 디아코니아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입니다.

이지 슈토렉

* 5월 27일 한국여전도회 성가단 디아코니아 활동 지원을 위한 콘서트의 프로그램 인사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