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고뇌가 우리의 고뇌가 되기를

  • 한인 예배 (2012년 08월 19일)
  • 롬 9 : 1-3
  • 설교자: 이종실

제목: 바울의 고뇌가 우리의 고뇌가 되기를

본문: 로마서 9장 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1
기독교는 민족사랑을 강조하는 신앙전통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에스더의 경우이고 신약에서는 바울이 그 예입니다.
왜 기독교는 민족사랑을 강조하고있고, 기독교의 민족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 바울의 경우를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2
바울은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들 식으로 이야기 하면 바울은 교민 2세입니다.
바울은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유대민족에 국한하지 않고 헬라 세계 다른 민족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한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이 일로 바울은 자신의 동포 유대인으로 부터 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 바울이 오늘 로마서에 보면 자신을 박해한 동포를 향한 깊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신의 동포를 향한 바울의 사랑의 표현은 절정에 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모든 사회적 기득권을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리고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상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과거의 모든 기득권을 다 버린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살아야 하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이고 미래에 살아햐 할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토록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끊어지더라도 자신의 동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 끊어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볼 때, 우리 기독교의 민족사랑의 동기가 문화적 우월심이나 민족적 자긍심이나 한국 민족 전체가 함께 성취한 역사적 경험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배설물처럼 버려야 하는 것들입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동포를 사도 바울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희생시키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심장이 된 사람입니다.
4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 기독교의 민족사랑은 이웃사랑의 출발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웃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대표적인 가르침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이 사마리아 비유이야기를 하시게된 계기가 한 율법사의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질문에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두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율법학자가 <자기를 옳게보이려고> 예수님께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누가 이웃인가>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웃사랑의 계명인 레위기 19장 18절은 그 당시 율법학자들도 잘 알고 있는 이웃사랑의 강령이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의 대상은 <동포 친척>입니다.
구약의 에스더와 신약의 바울의 동포 사랑은 곧 이웃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누가 이웃인가>질문한 율법학자도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한 것을 보면 분명히 자신은 동포를 위해 율법을 가르치며 동포를 사랑하고 있다는 자기 소신을 예수님으로 부터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사마리아인 비유를 설명하면서, 이웃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이웃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너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유대인의 가장 이웃이 어야 마땅한 유대 종교 리더들이 이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혈통이 제대로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이 그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보편적 인류사랑에 대한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자기 동포도 사랑하지 못하는 종교인, 우리 기독교인들을 책망하시는 불편한 이야기 입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설교는 제 자신을 위해 준비했고 제 자신을 향하여 하고 있습니다.
20여년 긴 해외생활을 하면서 점점 더 체코의 한인사회에 대해 닫혀져 가는 마음을 느끼고 있어 마음의 번민이 커지고 있습니다.
한인동표에 대해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저의 마음은 목회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고, 뿐만아니라 저의 인격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실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체코사람이나 다른 나라사람들과 마음과 감정을 나누는 사회적인 만남의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해외에서 같은 동포에 대해서까지 폐쇄적인 마음을 갖게되면 우리의 삶은 자폐적인 삶이 되고 맙니다.
아무와 관계하지 않고 유령처럼 살거나, 좌충우돌 인간관계를 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거나, 자기과시를 하기위해서 관계를 하면서 살거나, 자기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관계를 하게될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비정상적인 인격형성의 요인이 됩니다.
이와 같은 삶의 가능성과 유혹이 있는 것이 우리들의 해외 교민생활의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처음 오시는 분들은 해외에서 한국사람을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분들의 염려가 실제로 틀리지 않습니다.
한국사람들을 만나면 원치않는 마음의 상처를 받게되고, 한번 마음이 상처를 받으면 극복을 하기가 쉽지않습니다.
그래서 체코에서 살아가는 동안 가급적 같은 동포와 인간관계에 얽히지 않기 위해, 아예 만남 자체를 피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우리 크리스천들도 교회생활도 마음 맞는 사람들하고만 하고싶은 유혹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6
만약 우리가 체코의 한인동포들에 대해 폐쇄적인 마음이 있다면,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이며 이웃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의 자랑스러운 신앙의선배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설교를 마루리하겠습니다.
적어도 동포끼리는 무저항주의를 쓰자.
때리면 맞고, 욕하면 먹자, 동포끼리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자.
오직 사랑하자.
사랑, 이것이 인생에서 밟아 나갈 최고의 진리요
가정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사랑을 믿고 사랑을 품고 사랑을 행하는 그 사람은
비상한 화평 속에 있으므로 
남이 헤아리지 못할 무한한 행복을 받을 것이오.
너도 사랑을 공부하고 나도 사랑을 공부하자
남자도 여자도 우리 다 서로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그래서 우리 민족은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
(아멘)

바른 성수주일

  • 한인 예배 (2012년 08월 12일)
  • 마11:28-12:8
  • 설교자: 이종실

2012년 8월 12일

 

제목: 성도의 성수주일은 세상을 살리는 일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11장 28절 – 12장 8절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
 주일 (안식일)은 기독교회가 자신들의 조직과 회원을 관리하기 위해 제정한 날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창2:3)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내리는 복이 무엇인지 알기위해서 안식일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2절 말씀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를 근거로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제 칠일에도 있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제 칠일에는 하나님이 안식(메누하)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쉼 즉 안식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쉬게한다>는 말씀은 <숨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때 처럼 그렇게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숨을 불어넣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숨(영)을 불어 넣는 날이고,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영을 숨쉬는 날입니다
2
왜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아니라 오직 인간에게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을 까요?
우리 인간이 노동에 대해 비극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내일과 미래에 대한 염려때문에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동에 대한 인간의 비극적인 태도는 인간사회의 경쟁회적 가치를 으로 부터 옵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이래로 20세기만큼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인간의 삶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5세기 소위 인도항과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 개척에 들어가고 식민지로 부터 막대한 부를 유입하면서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시대가 1차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종식됩니다.
그러나 식민지로 부터 막대한 부를 유입하던 서구 열강들은 다른 방식으로 부를 계속 유입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오늘날 중동전쟁의 배후에는 석유생산과 관련하여 서구열강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서구열강들은 세계에서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 증강은 필수적입니다.
서구열강들이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개발한 무기들이 이제는 인류공멸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을 만큼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은 기독교 문명국가로 인간의 가치관을 실현하는 사회인것 같지만 사실상 그 역사를 보면 대단히 호전적이고 야만적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유럽의 기독교 문명의 반복음적 성격을 체코슬로바키아 교회는 비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국가간의 경쟁은 외교 정치 경제 사회 등 사회 전분야에 영향을 주는 블랙홀이 되어 모든 사람들의 삶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희망에 없는 노동에 지친 사람들은 자살을 합니다.
쉼이 없는 노동의 문제는 결국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더 나아가 인류의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인간사회의 구조적 문제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아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셧습니다.
3
하나님의 안식일에 대한 명령은 개인의 축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사회적이고 인류적인 축복을 위해서 입니다.
안식일 법의 기초가 되는 4번째 계명은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백성을 통한 전 사회적인 전 인류적인 안식의 은혜를 누리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에 <자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잘 지켜야 됩니다.
주일날 예배 드리는 것만으로 하나님 앞에서 성수 주일의 의무를 다한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회당에서 예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지켜야될 많은 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법은 39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안식일 율법 가운데 한가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12장 1절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은 무릎 이상 키가큰 밀밭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삭까지 따 먹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행위를 했습니다.
12장 2절 말씀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비난을 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호하며 바리새파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어떤 종교적 행위보다 자비의 마음이 우선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안식일 주님의 날에 지녀할 태도는 자비의 마음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안식일에 즉 주님의 날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자비의 마음과 실천을 보시고 축복을 하십니다.
자비의 마음없이 그냥 예배만 드려서는 안됩니다.
찬양대로, 교회학교 교사로, 식탁봉사로, 집사직분으로, 구역장으로, 어떤 모양으로 섬기던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비의 마음이고 자비의 마음으로 섬기는 실천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교회로 모여 이 자비의 마음을 공동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모은 것이 주님의 날을 바르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분입니다.
율법과 예언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창조의 능력을 주시겠다고 거룩한 날에 우리를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약속의 초청을 믿고 의지하고 나오면 됩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 100퍼센트 새로운 삶으로 거듭날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4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 날에 복주시길 원하십니까?
우리들 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세상을 복음화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날을 제정하시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국가간의 경쟁으로 노동이 노동이 아니라 죽음과 절망과 죄를 생산하는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이 신앙이 성장하는 비결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는 주님의 거룩한 날로 부르심에 온전하게 순종하고 이 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날을 잘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자비의 마음은 하나님의 축복의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준비되면, 그때 예수님은 이 거룩한 날에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우리에게 능력과 창조의 축복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안식일의 축복과 거룩함이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제 후로는

예수님은 우리를
1. 나를 의지하던 삶에서 말씀을 의지하는 삶으로,
2.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3. 내 생존만을 걱정하던 삶에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이전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을지라도,
이제 후로는 이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복음 안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늘 진리, 성령, 사랑 안에서 자유의 삶을 살며, 참 자유의 길을 복음으로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 설교문 전문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