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

  • 연합 예배 (2006년 11월 05일)
  • 계 2:8~11
  • 설교자: 에르딘게르

본문:요한 계시록 2,8~11 요한일서 4:1~6

사랑하는 꼬빌리시 성도 여러분,

한국, 체코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오신 형제 자매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여러 교회에 보내진 편지 덕분에 우리는 또 다른 도시, 이번에는 서머나에 오게 되었습니다.

서머나는 높은 수준의 상업과 경제 도시였고, 부가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또한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서 우리는 서머나가 아주 근대화 된 도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머나는 짧은 기간에 부흥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잡목들과 숲들, 포장된 도로들- 이러한 것은 당시에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미와 부, 부와 미. 이 둘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서머나는 상업을 꽃피우고, 뇌물이 성행하며, 사람의 가치가 돈지갑의 두둑함으로 평가되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또한 정치적으로도 잘 질서 잡혀진 도시였습니다.

즉 서머나는 로마에 충성을 다하는 도시였습니다.

로마에 경의를 표하고 이를 통해 더욱더 강한 도시가 되고자 도시에 신전을 세웠으며, 그래서 이곳에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서머나는 로마를 후원하는 도시요, 이를 통해 어떻게든 도시의 제정과 도시의 이미지를 좋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서머나에는 유대민족뿐만아니라 여러민족이 살았으며 식민지 중에 아주 파워가 있는 식민지였습니다.

서머나는 또한 그곳에 있는 크리스찬들을 쉽게 타락하도록 만드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점을 놓치지 맙시다.

이는 바로 서머나에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 크리스찬 모임이 있었습니다.

크리스찬들은 위에서 제가 말씀드렸던 그런 세속적인 환경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서머나교회 크리스찬들은 남을 딛고 올라서는 것이 당연시 되고, 성공과 부와 권력을 쫓는 그런 삶만을 인정해 주는 그런 환경속에서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권력과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명예와 비굴이 결정되었으며, 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상대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며 삶의 질과 멋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서머나에서 관용에 기초하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이런 곳에서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크리스찬의 삶은 상당히 다른 가치체계를 갖고 있으며, 다른 삶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크리스찬들이 권력과 부와 성공만을 쫓는 공동체에서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크리스찬들이 유대인의 적대감에 맞서서, 또는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서머나의 세상풍조에 맞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버텨 나갈수 있을까요 아니면 굴복하게 될까요?

세상풍조에 굴복하며 주위환경을 탓하는데 익숙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들의 하나님께, 구원의 주이신 예수그리시도를 견고하게 붙들며, 그 분을 충성되게 섬기게 될까요?

이 모든 것을 서머나에 보내진 편지에서 우리는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서머나에 보내진 편지에서, 또한 서머나의 환경과 비슷한 곳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삶의 용기와 방향을 줄 수 있는 그 편지에서 우리는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들어 봅시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을 지칭하는 몇 가지 별칭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늘 가까이 계신 분이시요, 삶의 닻이요 방향이요 목적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피조물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자신을 낮추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자,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을 없애고자,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자 부활하신 분이시요,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시니, 하나님과 화해한 당신 또한 살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꼬빌리시 성도이신 당신 또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 속의 많은 주제들과 관련해서 여러 질문들을 던져 줍니다.

가난이란 무엇입니까, 가난은 단지 돈의 부족함을 말합니까?

반대로 부함이란 큰 소유를 뜻하고,
소유의 풍족함, 안정과 같은 것을 뜻합니까?

고통은 사람을 어디로 인도하며, 무엇을 보여 줍니까?
고통은 사람을 단지 억압하기만 하는 것입니까?

고난은 단지 부정적인 그 무엇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고통이란 단어를 단순하게 사용하며, 고통이란 단어의 진정한 개념을 모를 때가 많습니까?

소비적인 세상, 상업적이고 부패하고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크리스찬이 믿음중심을 지킬 수 있습니까?

크리스찬으로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늘 위협받고 있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하고자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좀 더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사람의 부함은 그의 믿음안에 있습니다,

그가 받고 주는 사랑안에 있습니다.

거짓과 속임의 세상속에서 바른 것으로 남고자 하는 용기속에 있습니다.

사람의 부함은 유혹에 굴하지 않는 곳에, 힘있는 사람에게 굽신거리지 않는 곳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나 지위에 빌 붙어 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사람의 부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붙드는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한 자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크리스찬의 부유함 앞에서, 모든 권력, 부, 보물, 재산 이 모든 것은 다 색 바랜 것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부유함은, 누구도 당신을 위해 대신 준비해 줄 수 없고, 또는 누구를 의지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부유함은 심지어 당신 자신도 준비하거나 생각해보지 못 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진정한 부함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 희생하시고 부활하신 바로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어떠한 고난도 어떠한 외적 가난도 신실한 크리스찬들에게 동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가장 심각한 대적자였던 유대인들 조차도 신실한 크리스찬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위해 우회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사단의 회니라. 유대인이라 불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행함은‘ 이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전통과, 선민, 남과 구별됨을 내세웠지만, 악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에 집착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였습니다.

그들은 불화, 아픔, 억압을 씨뿌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악의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경건한 생각들은 그들의 행함과 달랐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유대인의 열매는 신 것이 되었으며 독이 들어 있는 열매로까지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전통을 지키거나, 지난날 행했던 선함이나, 특별한 역사 등이 진정한 믿음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현재에, 살아있고 희생하는 믿음에, 풍성한 사랑에- ‚바로 지금 여기에‘에, 달려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주님께 초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선교 도구가 됩니다.

반면 전통에 얽매이고, 경건의 형식에 치우치거나, 명목상의 또는 기술적인 믿음은 누구에게도 영향을 줄 수 없고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찬과 교회는 모든 경건함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자 힘써야 하며 악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자는 되어질 일을 두려워해서는 않됩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고난은 헛된것이 아니고, 또한 고난의 시험은 열흘간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왜 하필 열흘간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고난, 고통, 아픔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무한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고난의 끝에 대해서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욥을 시험할 것을 하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욥은 그 모든 환란을 견뎠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는 곳에, 그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당신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서두에서 시편 27편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기자가 말한 것처럼 비슷하게 우리는 서머나에 보낸 편지에서 이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외에 누가 가장 가치있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믿음과 사랑, 주님안에서의 부함이 있다면 어떻게 세상 가치관이 서머나교회 크리스찬들을 삼키며 또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을 삼킬 수 있겠습니까.

자, 우리 이제 약속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네게 주리라“

이 의미심장한 말씀- 우리가 성경공부시간에 늘 외었던, 또는 영성시간에 늘 요절로 배웠던-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끄랄릭 성경에는 이와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어떤 환경속에서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 가치 순서를 세상권력과 부함, 그리고 성공에 두지 않는 자, 신실함을 늘 간직하는 자는 승리의 면류관을 쓸 것입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승리자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었듯이, 주님께 충성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씌워질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이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진 월계관과 다른 점은 생명의 면류관은 월계관처럼 시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다국적인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선포하며, 성만찬을 거행하고, 함께 기도하며, 필요한 것을 서로 돕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워진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믿음으로 세워진 가치체계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꼬빌리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서로간의 모든 불편함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상업화 되고 세속화 되는 위험을 죽을 때까지 늘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의 면류관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아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한인 예배 (2004년 11월 21일)
  • 눅 10:29-37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41121

본문: 누가복음 10장 29-37

제목:

<본문>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자료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 27키로미터였고 걸어서 약 여섯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해발 750미터이고 여리고는 해저 250미터여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려면 해발 총 1000미터를 넘어가는 셈입니다.

가끔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분들께서는 이 길이 대충 어떠할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리적인 조건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주로 내리막길 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 길은 두 도시를 오가는 길에서 여행자들이 겪는 마지막 장애물이 아닙니다.

물건을 팔고 이익을 남긴 돈을 가지고 그리고 특별히 구입한 물건을 가지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돌아 옵니다.

가장 물건이 많고 가장 값이 저렴한 물건들이 있는 곳은 수도나 대도시입니다; 이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방에서 살면서 빨리 부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좋은 생각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 강도들이던 간에 아니면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단체이던 간에 오늘날
주저함이 없이 테러를 자행하는 사람에 대해 그리고 자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간단히 말씀드려 이들 모두가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폭행하는

그런데 어떤사람, 그는 분명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여행을 하다가 강도를 만나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거반 죽게 때렸습니다.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고 길에 쓰러졌습니다. 이 상황을 누가는 <반쯤  죽여놓았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순찰하는 경찰도, 긴급구조대도 없었고 그를 도울 수 있는 어떤 기관도 없었습니다.

거반 죽게된 여행자는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의 혹시 있을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부상당한 여행자는 왜 상황에 의존하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여행길이 이니었기에 그의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그를 도와줄 사람이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압니다.

고장난 자동차가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차를 세울 시간이 없고 그리고 자동차 수리할 줄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차를 세우고 그를 도와줍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일상의 경험이 오늘 본문의 상황을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연히 제사장이 그 부근을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회당의 제사장은 여리고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일주일 일하고 몇 주간 휴가를 보냈습니다.

회당 일로 지쳤고 게다가 힘든 여행 길이 더욱 그를 피곤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거반 죽게된 여행자를 보았을 때 그를 피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놀랄 수도 있고 아니면 놀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사장, 유대사회의 특별한 계층의 구성원인 제사장은 거룩한 것을 취급하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거반 죽게 되어 누워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에 의해 제사장은 돕지않았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는 여행객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십시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도움을 받을 그의 희망은 점점 적어졌습니다.

해는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도움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반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할 다른 여행자가 가까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레위 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예수님 당시에 낮은 지위의 제사장 계층이었습니다. 오늘날 체코교회 안에 있는  디아코니아 조직에 해당되는 그런 계층이었습니다. 

레위 인들도 제사장들 처럼 교대로 근무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레위인도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으며 매우 지치고 피곤해 있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 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 만큼 업무가 과중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은 얼마든지 부상당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렇지 못했습니다.

거반 죽게 된 사람 가까이 가서 그를 보고도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태야“, 아니면 „누군가가 그를 도와 주겠지“ 아마 레위 인은 그렇게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두 번째 희망이 빠르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들이 오고 가고 있을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아마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간 자신의 생들이 주마관등처럼 스처지나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강도에 대한 원망, 자기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을 존경하였던 유대인으로서 그가 자신의 종교지도자들을 후회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최소한 그는 분명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잠시 후에 도움의 손길이 다가 왔습니다.

끄랄리쯔까 성경은 <사마리딴>이라고 번역되어있는 <사마잔> (우리 한국 번역에는 사마리아인)이 그 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인에 대해서는 히브리어 성경인 구약 전체가 아닌 단지 모세 오경에만 잠깐 언급될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멸시하였고 심지어 이방인들 보다 도 더 못한 부류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단 한 줄 일지라도 그들에 관해 기록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증오는 이성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욕으로 생각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로부터 받은 음식이나 물건들은 돼지고기와 같이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인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강도 만난 유대인도 분명히 사마리아 인들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만진다면 유대인은 곧 부정한(더러워진)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의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 사마리아 인은 매우 사려깊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위험에 처한 이웃에 대한 착한 사랑은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반 죽게 된 사람곁에 가까이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싸매주고 자신의 나귀에 그를 앉혀서 그를 돌보아 줄 수 있는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튿날 상태가 조금 나아졌을 때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고 들어갈 비용을 미리 지불하였습니다.

맡긴 두 데나리온은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당시에 1/12 데나리온이 하루치 식대였습니다. 

이 사마리아 인을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예루살렘과 여리고로 자주 오가는 상인이었습니다.

그가 주막을 잘 알고 있었고 주막 주인과의 좋은 관계가 그 증거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인과 그가 상반된 모습으로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고 있었고, 그래서 당장 처리해야 되는 긴급한 일이 없었기에 도움을 줄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그에 비해 사마리아 인은 장사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자신의 고객들과 신속하게 정확하게 약속을 지켜야 되는 것은 장사를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기대하지 않던 상황에서 그는 거반 죽게된 사람이 자신의 편안함과 이익보다 우선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비교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을 돕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보다 도 못하게 여기는 사마리아 인이 유대인을 도왔습니다.

도움 받은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어쩌면 그가 도움을 받아야만 되는 그런 처지가 아니었더라면 부정 탄다고 믿는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주막에 누워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람의 도움으로 지금 그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구사일생한 것은 바로 그 사마이라 인의 사랑과 선행 덕분입니다.

그런 경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과거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주막을 떠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중요합니다.

제사장과 레위 인의 행위입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삶에서 그와 같은 행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어디까지 입니까?

누가 이웃입니까?

모든 사람입니까? 아니면 단지 우리들, 같은 민족,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까?

사람들의 관계는 사람이 무언가 응답을 해야 되는 상황을 만듭니다.

동시에 이웃에 대해 도울 만한 가치가 있다 없다 판단하지 않고 우리들 각자의 태도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생각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질문하지 않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고 있는지, 상심한 이들 누구에게나 내가 이웃이 되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랑은 편견 없이 모든 경계선을 넘어갑니다.

종교, 민족, 인종의 차별 없이 모든 이들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자비를 베풀라. 그것은 실천에 대한 분명한 강조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단지 그 고통을 함께 느낀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용기있고 실질적인 도움과 자신의 편안함과 시간의 포기와 물질적인 손실을 요구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실천을 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며 사랑의 실천을 위한 힘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의 길로 이끌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 없이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며 힘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사랑의 우리의 삶을 전해 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집으로 돌아가시 길에 생각하실 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9장 52-56절

52  그는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는데, 그들이 가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53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54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주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55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사랑의 사람,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었습니다.

제일 먼저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을 거부한 직후에 사마리아 인이 상처 입은 유대인을 치료하기 위해 받아들입니다.

편견이 무너지고 가치없는 경계선들이 끊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증언의 학교입니다.

두번째 묵상의 말씀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삶의 문제를 율법이 해결한다는 믿음안에 살았습니다.

강도만난 여행자들의 예는 율법이 절망적인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구원은 기대하지 않게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사마리아인에게서 왔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가 사마리아인이고, 우리들은 거반 죽게된 강도만난 사람들로 우리들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으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구원에 대한 복음의 소식입니다.

사마리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도울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그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람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다시 생각해야될 아주 헛된 희망에 대한
상징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기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한인 예배 (2004년 09월 19일)
  • 요일 4:7-12
  • 설교자: 빠벨 뽀꼬르니

19.9.2004

Text: 1 J 4,7-12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안에 온전히 이루느리라

하나님은 사랑이다  – 성경에 이해하기 쉽지 않는 많은 비유들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와 비유는 우리들이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인들의 삶의 자리와 경험에 얻은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

많은 성경귀절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는 이 말씀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체코에서 (특별히 체코개혁교인들에게) 성경 말씀들을 그림대신 벽에  붙여 놓것이 하나의 습관이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매일같이 눕고 일어나도록 침대 위에 말씀을 붙여놓거나 아니면 들어오고 나가면서 중요한 전달사항을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현관문에 붙여 놓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벽에 걸어두거나 붙여두는 성경 귀절 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한마디 말씀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바다처럼 명쾌하게 가장 근본적이고 마지막까지 남을 우주의 진리이며, 가장 본질적인 의미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이 필요로 하는  오직 한가지와 그 의미는 사랑하는 것이입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직장과 일상생활의 새로운 회기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우리들은 학업과 새로운 과제들에 전념할 것이며, 휴가기간이 끝나고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인생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감정이 아니라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작은 일로 매일의 삶의 노력으로 가능하며, 사랑하는 것은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에 의미와 나아갈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신학을 공부할 필요도,  대학입시자격시험을 치를 필요도 주일학교를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들도 이 말씀을 알고 그리고 실천합니다. (어쩌면 실천을 하는데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 보다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 이 말씀으로 모든 종교와 교회들의 경계선에 도달하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요한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 사회적 지위, 출신, 지식, 영적인 능력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사랑은 전 세계에 모든 문화와 종교들에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은 모든 이들 가까이 계시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간략하게 줄인 말입니다.

모든 줄인 말처럼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EU처럼 – 어디서나 누구나 바로 EU가 유럽연합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일부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들께 그게 무슨뜻이며  EU의 근본정신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말할 것입니다.

줄인 말의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줄인 말은 마치 암호와 같습니다.

줄인말은 남용될 수도 있고 바르게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 역사에서 그것이 몇 번이나 바르게 해석되고 얼마나 남용되었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몇몇 사람들이 교회가 어떻게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알았을 때,  그래서 그에대해 그들이 말하려고 할 때, „비판하지
마시오, 여러분들의 지도자들을 공격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침묵을 강요당하였습니다.

수없이 이 말씀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회의 아름다운 외모로서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이 뜻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안에서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다른 이야기를 즐기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이 즐기는 이야기의 줄인 말은 오늘날 베슬란입니다.

베슬란은 러시아 도시로 테러리스트들이 인질로 어린이들과 심지어 갓난아이들까지 붙잡고 있던 곳이며, 수십명의 어린이들이 공포에 떨고 죽음을 당한 곳이 베슬란입니다.

새 학년이 시작되던 베슬란, 벨슬란은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세상을 줄인 말입니다.

난폭하고 무자비한 세상, 사랑이 없는 세상. 그곳에 사랑이 없으니 하나님도 없습니까?

그러나 진심으로 우리들이 그 질문을 할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요한이 어떻게 기록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9, 10절 일부)

여기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악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악과 만나고 있습니다.

사랑은 피를 흘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잘 압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악과 싸우지만 악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 어떤 살기 좋은 섬과 악이 없는 세상 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들을 죄인들을 위해
보내고  그들과 한 식탁에 앉아 먹고 마셨으며 그들을 용서하고 소망을 주셨으며 그들을 대신해서 죽으셨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최후까지 남을 진리의 말씀으로 (모든이들에게 다가가는) 쉽게 걸어가고 쉽게 뛰어갈 수 있는 그런 넓은 길이 아닙니다.

복음이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말할 때, 복음은 우리들이 선한 뜻을 언제 어디서나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리고 언제나
사랑의 음성을 우리들이 듣게 되거나 아니면 우리들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우리들에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한 뜻도 사랑의 음성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없는 곳을 단지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언가 결핍된 곳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에 정복당한 우리들은 그곳에 파송을 받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여러분들에게 줄 것이 없는 사람들, 우리들의 사랑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자들로서  우리들이 받은 그 사랑을 전합시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현관문 앞에 적어두기도 하고

아니면 교회당 벽에 적어 놓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 아들 이야기에 대한 응답이며 그의 길에 동참하라는 초청임을 우리들은 압니다.

그 이상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들이 실천하는 것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요 새로운 힘을 공급 받는 휴게소 입니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뺀다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줄인 말이 아니라 우리의 목표입니다.

부활의 약속이 있는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사랑에 다다르게 합니다.

아멘

성령이 세우는 교회

  • 한인 예배 (2004년 07월 25일)
  • 행19:8-34
  • 설교자: 이종실

040725

본문: 사도행전 19:8-34 

제목: 성령이 세우는 교회

<본문>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3)시험적으로 2)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 뿐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이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34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시 동안이나 하더니

<설교>

체코를 포함하고 있는 슬라브 문화권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주후 800년대 부터 그리스 정교회의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고 그들에 의해 문자가 만들어 지면서 같은 계통의 언어와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나라들입니다.

슬라브 문화권은 현재 정교회, 로마 카톨릭, 이슬람이 각각 특정한 나라에서 매우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체코는 무신론적인 분위기가 강한 사회로 남아있습니다.

지금 슬라브 문화권에 통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외국 선교사님들과 한국선교사님들이 많이 들어가 활동을 하고 있고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좋은 교회들도 생겨나지만 그렇지 못한 부정적인 모습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님들이 비자문제로 가끔 프라하를 찾습니다.

그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러시아와 다른 나라의 선교상황을 접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와 구 소련 연방 국가들의 선교의 당면과제는 교회 지도자를 길러내는 일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체코는 슬라브 문화권 선교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1994년에 쭈리히의 국제침례신학부가 프라하로 이전한 것이 바로 새롭게 생겨난 동유럽 교회들의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였습니다.

체코가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정교회나 이슬람의 나라가 아니라 무신론적인 사회분위기이면서 매우 강한 개신교 전통이 뿌리깊게
남아있어 슬라브 문화권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교회들의 지도자를 교육하고 지원하는 일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순절 운동으로 생겨난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전통도 생겨나고 심지어 잘못된 길로 갈 때 그
교회를 다시 성경말씀으로 돌아가 새롭게 개혁하는 개신교회로 만들어 가는 움직임이 체코 개신교 전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체코 프라하 개혁교회 신학부는 구약과 신약을 연구하는 분야가 발전이 되어 있습니다.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공부를 학생들이 흥미 있어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한 적이 있는 뻬뜨르 뽀꼬르니 교수님은 신약신학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석학입니다.

로마 카톨릭 바티칸 교황청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 분의 책은 신약신학을 연구하는 학생들이 반듯이 읽어야 하는 교과서입니다.

체코에서 성서신학이 발달된 것은 자신들의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개신교 전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체코의 상황은 앞으로 슬라브 문화권에서 새롭게 생겨난 교회들을 건강하게 돕는 좋은 역할을 가능하게 합니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체코교회는 슬라브 문화권을 향해 자신들이 나누어야 할 신앙의 경험과 유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체코교회는 이것을 자신들의 선교 비전으로 바라 보고 있지 못합니다.

재정은 스웨덴 교회에서 감당하고 인적자원은 체코교회에서 발굴하여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한국선교사들이 세운 신학교에 교수로 파송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작업을 하였지만 결국 비전을 나눌 사람을 체코교회는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을 추진하면서 느끼고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그 일을 추진하면서 체코교회로 불러 함께 모이게 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꿈과 기대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의 관점에서 그리고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체코교회가 바뀌면 슬라브 문화권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체코교회 안에서 체코교회에 영향을 주며 체코교회를 바꾸어가려는 우리들의 존재의미가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존재의미(사명)를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음을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 여정을 통해 분명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고 없애겠다고 없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세워지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교회로 모이는 사람의 뜻과 경험대로 움직이려고 할 때 성령이 일하실 자리가 없어지고 그래서 교회는 인간의 모임으로 타락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만들어놓은 청사진을 따라 세워져 갑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세우려고 하면 그 계획을 성령께서 가로 막습니다.

처음에 사도 바울이 선교를 계획했을 때 그의 아시아 선교계획은 막히고 그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이차선교여행때는 에베소에 들리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체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3차선교여행에서 처음부터 에베소를 목적으로 갔습니다.

이차선교여행때처럼 지나가는 길에 잠시 경유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8, 9절까지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나에게 큰 문이 활짝 열려서,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대적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고전 16:7-9)

바울이 에베소에 어느정도 머물 계획을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 2년이 넘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와 같이 사도의 여행 길은 나그네 김삿갓처럼 자기 마음대로 다닌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쫓으라”(눅9:59)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을 제자들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제자들 뜻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정해집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도”로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면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도는 道, the way 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여행의 길, 성도들이 모인 모임인 이 교회의 길 역시 사도의 여행길 처럼 임의대로 자의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을 하던지 하지 못하던지 우리는 성령의 가르침대로 따라가는 생애입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한 일들이 19장 전체에 나옵니다.

성경에 기록된 순서대로 보면, 신앙이 부족한 신자들을 다시 가르쳐 주의 일꾼으로 양육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희들은 지난 주일에 함께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회당과 두란노에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였습니다.

이 강론을 통해 믿는 이들이 교회로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교회가 지역사회에 영향을 줍니다.

마술사들과 신상을 만들던 사람들이 많았던 에베소 사회가 그들로 인하여 술렁거립니다.

마술사들과 심지어 제사장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어 귀신을 쫒아내려고 하는 일도 생겨납니다.

마술사들이 자신의 마술 책을 불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됩니다.

신상을 만들던 사람들은 바울과 그 추종자들로 인해 그만 경제적인 타격을 받게됩니다.

이것을 뭉뚱그려 우리들은 바울의 선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시 말씀드려 성령을 따라 가는 교회는 남을 먼저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부족한 교회의 모습부터 고쳐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웁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성령을 따라 가려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가르친 것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가르치고 배워야할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 가르치신것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의 대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문제만 가지고 회당에서 3개월 그리고 두란노에서 다시 2년을 강론하였습니다.

성경을 테마로 가르칠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론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이야기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수 없기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라 가는 교회가 함께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왜 오느냐?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 가슴속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과 알고자하는 욕망이 가득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주님앞에 개인의 문제들을 내어놓고 해결받는 문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해결이 목적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나 자신의 평안과 축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평안과 축복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큰 꿈에 나의 삶이 집중되어 있을 때 나의 문제가 중요한것이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더 큰 비전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이 없는 청지기에는 더 많은 것을 맡겨주시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아마 경험하실 것입니다.

회사의 미래에 대해 비전을 가지고 일하는 직원과 맡은 자기 일은 충실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직원을 대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결혼도 명예도 생명도 포기하고 다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보이면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겼습니다.

지금 아시아의 중심도시, 무역이 발달되어 온갖 진귀한 명물들이 쏟아지는 도시, 큰 도서관이 있을 만큼 학문이 발전되어 있는
도시, 경제적 부를 누릴 일할 기회가 많은 도시, 이곳을 찾아온 유대인들, 헬라인들, 아시아인들은 이민자들로 저마다 무엇이든지
최고가 되어보겠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 믿으니 그들의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썩어빠진 이 세상, 잠깐 있다가 없어질 이 세상, 아무리 수고하고 땀흘려도 대가도 돌아오지 않는 이세상, 대단한 꿈을 주는 것같이 처음에는 요란하고 찬란하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이 다 헛된 것 같이 보이는 이세상,

이것을 위해 사는 것 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자는 뜨거운 꿈이 생겨났습니다.

에베소 신자들 처럼 오늘 우리 교회가 살아 움직이려면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들 가슴속에 그들 처럼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가지면 내 직업에 대한 권태증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 내 직업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가정의 조그마한 문제가 그리 크게 대두되지 않습니다.

극복 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더 큰 것을 소유한 사람이기에 작은 것에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믿음과 욕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이 아니라 믿음이면 그리고 믿음의 열정이면 희한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바울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엊자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가나갑니다.

서양 사람들 손수건은 코를 풀어서 제 생각에 땀만 딱는 우리들 것 보다 더 불결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그 불결한 손수건이 무슨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땀을 흘린 사람의 손에서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20절 말씀을 보시면 “이적과 기적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 하지 않고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적과 기사가 드러나지 않고 주의 말씀이 드러납니다.

이적과 기사가 드러났다면 그것은 성령을 따르는 길에서 이탈했다는 뜻입니다.

이적과 기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에베소 도시에 소동이 일어납니다.

타락한 제사장의 거짓이 드러나고, 우상 만드는 사람이 사업이 안될 정도로 에베소 사회에 에베소 교회는 영향을 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의 여정은 우리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청사진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백하십시다.

우리를 체코로 보내주시고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는 체코교회 곁에 우리를 두신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하나님 앞에 질문하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 나라의 꿈과 그 나라를 이루려는 열정으로 가득 채웁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열정을 가진 믿음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개인이 변화하고 가정이 변화하고 일터가 변하고 학업이 달라지고 사회가 변합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며, 문제의식을 던져주며,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얻어 더욱 흥왕해지는 선교의 결실이 나타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에베소에서 당시 세계관으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 선교를 결심한 바울처럼 체코 프라하에서 슬라브 문화권 전체에 대한 세계 선교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