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들

  • 한인 예배 (2004년 01월 10일)
  • 창 3:1-11
  • 설교자: 이종실
  • 참고: 교회창립기념주일

2004-01-10 교회창립 기념예배
본문: 창세기 3: 1-11
제목: 믿음의 사람들

<본문>
1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2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3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설교>
오늘 이 본문은 4년전인 2000년 1월 둘째주일(9일)에 이곳에서 한인들이 매주 교회로 모이는 첫번째 예배에서 <인간 아브람과 믿음>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던 바로 그 본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갈등으로 서로 자기 갈 길로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면서 저는 교회로 모인 교우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믿음을 가졌는가?”

프라하에 유일했던 한인 교회, 1994년 나의 첫 사랑 나의 첫 목회지 프라하 한인교회, 불과 짧은 일년의 목회기간 이었지만 무려 일곱분의 교우들이 학습과 세례를 받았던 몹시도 뜨겁게 신앙의 길을 갈구했던 프라하 한인 교회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을 성령의 일을 위해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자신의 목회자들을 목회로부터 자유롭게 했던 안디옥 교회처럼 부족한 종을 체코교회에 보내준 그 교회, 그때 그 사랑을 잊지 못해 프라하를 떠나 한국에 가서도 또 다른 나라로 스페인으로 홍콩으로 근무지를 옮길 때 마다 저와 프라하 한인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때로는 헌금으로 마음을 함께 나누던 그 교회 교우들, 그들의 사랑이 지금까지 있기에 그들이 함께 모여 이루었던 프라하 한인 교회를 위한 남모를 애정과 책임을 더 크게 느끼고 살았습니다.

그 애정과 책임은 인간의 단순한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더 올바르게 섬겨 받들어야 겠다는 목회자의 순수한 책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오랫동안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 체코의 한인 사회의 비웃음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질문을 프라하의 기독교 한인들에게 던졌습니다.

저는 첫주일 첫번째 설교에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지금의 프라하 한인교회와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가 누가 아브라함이고 누가 롯인가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이 갈림의 선택에서 저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든 프라하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믿음을 가졌는가?”

이 질문은 곧 하나님의 약속 즉 교회를 신뢰하는 신자의 자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서클이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정말 믿음을 가졌다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게 던진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해야하는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을 믿는 다면 우리는 롯의 눈에 보인 인간적인 모든 조건들을 양보하고 버리야 합니다.

바로 이 버림에서 나의 첫 사랑 첫 목회지 프라하 한인 교회는 프라하 꼬빌리시 야곱의 사다리교회에서 새롭게 출발하게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교회답지 못했던 모든 모습을 자복하는 회개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저의 설교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고집스럽고 허물이 많은 존재들인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알자,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의 눈이 열린다. 그 신앙의 눈으로 우리의 이웃과 세상을 한번 바라보자. 그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감격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숨은 봉사의 삶을 하게 되고 그 입술의 말은 부드럽고 온화하여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말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4년 동안 끊임없이 이 강단에서 흘러나온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신앙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생활 목표로 삼았습니다.

2001년인가 2002년인가 정확히 기억을 못하지만 한번 지금 프라하 한인교회의 박상욱 목사님이 만나자는 요청이 있어 홍콩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한적이 있습니다.
그때 진심으로 박목사님께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가 나뉘어지는 것도 어렵지만 다시 만나는 것도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박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듯이 박목사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를 테니 우리가 목회를 통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마음을 비운 하나님의 종들인지 서로 보여주고 그리고 교우들을 신실하게 잘 목회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기회들이 오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신앙인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처럼 치졸하고 야비한 인간이 없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사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지시할 땅>이 어딥니까?
당시에 지도도 없는데 창세기 12장에 지명 이름이 자세히 나옵니다.
우선 4절부터 7절 상반절까지 함께 읽어 보십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이 본문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미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12장 10절을 보시면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지시한 땅,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 가나안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고 해서 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인간의 땅, 우상의 땅 애굽으로 갔습니다.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도 믿음의 조상이란 별명을 갖는 사람이면 굶어 죽어도 그 땅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브람도 먹을게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이고 뭐고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우리들에게 위로가 됩니까?)

하나님의 땅에는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고 인간의 땅 저주의 땅 애굽은 먹거리가 풍족합니다.
인간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 먹거리를 좇아 애굽에 간 아브람이 수치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람의 인간 됨됨이가 밑바닥까지 만천하에 공개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집트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아브람은 거대한 권력을 쥔 바로 앞에 자신이 무방비 상태임을 깨닫고, 살아남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14절에 따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매우 미인이었습니다.
자기 살자고 예쁜 아내를 권력자 바로에게 팔아 넘긴 것입니다.
16절에 보시면 바로가 아브람이 누이로 속인 아내 사래를 취하는 대가로 아브람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주었습니다.
집을 사기 위해 남편과 합의 하에 부인이 매춘을 한 사건이 제가 체코에 온지 얼마 안되어 체코사회를 떠들썩 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아브라함도 이런 사람인데 하물며 저와 여러분 그리고 프라하의 한인 기독교인들이 인간적인 면에서 아브라함 보다도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들이 우리들이라고 그 누구의 우리도 그렇게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12장에서 먹거리를 위해 약속의 땅도 팽개치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까지도 팔 생각했던 이기적인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 13장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여 애굽의 바로로부터 얻은 막대한 재산이 늘어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재산을 가지고 네겝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의 조카 롯도 그와 함께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네겝에서 얼마 살지 않고 그곳을 떠나,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베델 부근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의 베델과 아이 사이에 있는 아브라함이 예전에 장막을 치고 살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다니던 롯에게도 그의 몫의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 너무 좁았습니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 함께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 주변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적대적인 이방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 조카 롯과 갈등 가운데서 지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불러 그들은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고 했습니다.

12장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전혀달라 당황스럽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12장과 13장의 아브라함의 너무 다른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만약 12장의 아브라함의 인간된 모습이 선입견으로 우리의 기억을 붙잡고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파렴치한 모습을 가진 한 인간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언제나 굴곡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성경은 실망하지 않고 그 변화를 끝까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백일흔다섯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아브라함의 모습을 끝까지 추적합니다.
그의 죽음이 창세기 25장에 나오는데 24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제 나이가 많은 노인이 되었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는 일마다, (그의 마음에 들어) 복을 주셨다.”(1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의 아비 친척집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인간됨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보았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도서 7장 14절 말씀처럼 “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전에 자기 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지만 어려움을 겪을 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말씀드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그 회복을 간구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2장의 아브라함의 모습이 13장의 아브라함의 모습으로 바뀐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다고 우리는 신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정에 이끌려 살 때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인 인간 안에 있는 믿음의 씨앗을 봅니다.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우리 한인공동체의 4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지난 4년 동안 우리들 자신들이 바로 믿음의 증거를 보여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완고한 고집대로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우리는 믿음이 있기에 생각을 하였고 그래서 그때마다 궤도를 수정하면서 회개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우리들만의 믿음의 잔치가 민족의 경계를 넘어갔습니다.
또 다른 고귀한 믿음, 또 다른 신앙의 열정의 모습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행사와 친교에 많이 사용되던 교회의 예산이 연약한 형제들이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쓰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운동을 가로막는 교회의 조직들을 과감히 없애고 변화시켜 초대교회의 성령 공동체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더구나 다른 이민사회와 비교해서 체류기간이 짧고 유동성이 강한 체코의 한인사회의 특수성안에서 일반 조직 교회의 형태의 한인교회는 체코 한인사회의 특수성을 감당할 수 없고 오히려 복음의 운동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저희들은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철저하게 복음이 운동하는 교회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목회자인 제 자신이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섬겨 받드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보의 앞면이나 뒷면에 대문짝만하게 담임목사 이종실 이란 인쇄를 한번도 하지않았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직 섬기는 자의 모습을 가지기 위해 여러분과 구별되는 목회자 가운을 입지않았습니다.
그리고 강단의 앞 자리에 앉지않았습니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저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양들인 여러분 교우들 앞에서 제 자신이 누구인가를 스스로 늘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로부터 받는 생활비는 곧 우리 꼬빌리시 교회 한인공동체 여러분들의 헌금이라 여겨 이중으로 생활비를 받지않았습니다.
선교사의 물질과 시간과 경험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함께 공유해야 된다는 것이 저의 신앙의 신념이며 고백입니다.
제가 고백하는 한인 교회는 체코의 한국인 기독교인들이라면 이단을 제외하고 믿음을 따라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함께 받들어 섬기려는 모든 이들의 모임입니다.
철저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중심과 믿음의 고백을 어여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선교사님 세 가정을 보내주시고 함께 교회로 모이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교회적으로만 아니라 우리 개인들의 신앙모습으로도 지난 4년간 믿음의 증거들이 나타났습니다.
교우들 사이에 다툼과 분쟁이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교회 일로 날카롭게 감정이 대립되는 교우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교회 일을 자제시키고 심지어 금하기 까지 했습니다.
성도들 간의 교제보다도 그리고 교회일 보다도 우선되는 것이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교회 일을 서로 미루고, 피할 수 없는 교회 일에는 가급적 쉬운 일을 서로 선택하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이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서로 맡아 하려고 하고 설거지 일에 언제나 빠지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저의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맺힙니다.
신앙은 크고 위대하고 폼나는 일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늘지고 어두운 곳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그곳에서 빛으로 나타납니다.
교우들 사이의 언어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가시박히고 가시돋힌 말들은 제 귀에 들을 수 없습니다.
걱정과 염려와 애정과 사랑이 담긴 말들이 들립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의 언어들도 달라졌습니다.
영적교만에 찬 말들은 사라지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고백을 합니다.
털어놓기 어려운 마음의 고민들을 서로 나누는 참된 성도의 영적교제가 나타납니다.
중보기도반 모임을 처음 가졌습니다.
한 집사님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남편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남편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 집사님 처럼 우리 교우들의 신앙생활의 언어는 영적교만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대한 고백입니다.
집사님들의 공중예배 기도의 내용도 달라졌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담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목사의 설교가 이제 교인들의 삶에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는 증거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되는 교회의 징후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의 성경공부가 우리 교회의 말씀의 큰 불을 일으킬 줄 믿습니다.

지난 4년 동안 묵묵히 우리들이 신앙에 정진한 결과가 신앙의 큰 성숙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파렴치한 아브라함을 본 것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믿음의 아브라함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라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나이 50이 다되어 가지만 아직도 미성숙한 부분이 많은 사람입니다.
완전한 목사의 기준으로 저를 보시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이종실 목사는 날이 갈수록 더 성숙해진다는 칭찬을 여러분들로부터 받고싶습니다.
부족한 면을 꾸짖고 비판하지 마시고 부족한 면을 고치려는 노력과 그래서 더 좋아지는 그 모습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주홍글씨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 입니다.
한번 실수한 이야기는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돌려가며 씹습니다.
그리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벽에다 붙여 났다가 생각나면 다시 떼어서 입에 넣고 씹습니다.
한번실수가 그 사람의 본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실수로 하나님이 계획하는 그 사람의 미래까지 판단해 버리는 그런 잘못을 해외생활에서 범하기 쉽습니다.

최소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의 한인교우들 여러분들 만큼이라도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없앨려고 노력하십시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변화될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해줍시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결국 유황불로 심판을 받게될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룻의 교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익을 더 추구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들으리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
우리의 삶의 원칙은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우리는 돈으로 안되고 우리의 힘으로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내년 이맘에 다시 교회창립 기념예배를 드릴 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모든 것을 더 받는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의 증거를 간증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소식 이후의 예수님

  • 한인 예배 (2003년 12월 28일)
  • 마 2:13-23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31228

본문: 마태복음 2:13-23

제목: 성탄소식 이후의 예수님

<본문>

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가 믿는 루터교 전통은 카톨릭 전통과 똑같이 교회력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해의 모든 주일과 기독교 기념일이 구체적인 성경 본문 말씀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강단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거나 예배 때에 설교가 되어집니다. 

교회력에 따라 예배와 강단을 만든 사람들에게는 2가지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성경 말씀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 본문 말씀이 전체 교회 연도 안에 조화롭게(균등하게) 할당이 되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두번째는 그러한 모든 성경 본문이 하나님에 관한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예배 참석자들을 복음 전도로 부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스웨덴 루터교회의 예배와 강단에 따라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성경 본문 안에는 우리를 위한 메시지가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유대 땅은 헤롯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날 거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헤롯은 태어난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유대 땅의 왕이었던 헤롯은 그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거나, 그의 자리를 요구하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베들레헴에 태어난 두 살 아래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했습니다. 헤롯의 명령에 따라 모든 사내아이들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 대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아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대 학살의 명령이 떨어지기 바로 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였고, 마리아와 아기예수를 데리고 안전한 때가 올 때까지 애굽으로 피신해 있으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주의 사자는 헤롯이 계획했던 위험이 닥치기 전에 요셉에게 미리 경고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때가 밤이었지만  곧바로 일어나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요셉은 헤롯왕이 죽을 때까지, 주의 사자가 다시 꿈에 나타나 안전한 때가 와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을 말해줄 때까지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다시 주의 사자가 말하는 그대로 행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으며, 하나님을 믿고 그 분 안에 자신의 인생을 세워 나갔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첫눈에 보기에 그렇게 재미있거나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는지를 묘사한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이야기에는 우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잠시 살펴봐야 하는 몇가지 재미있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오늘 본문 말씀과 관련되는 이야기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꼬빌리시 교회 이름의 일부이기도 한 야곱의 아들 요셉도 오늘 본문 말씀의 요셉 처럼 애굽으로 가게 되는 우연의 일치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형들은 요셉을 없애버리려고까지 했습니다 .

그러나 요셉을 죽인다는 것은 너무했는지 형들은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신앙심과 올바름으로 애굽 제국에서 파라오 다음으로 높은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친척들이 그를 따라 애굽으로 이사해 왔으며, 그렇게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에는 존경 받는 손님이었지만  요셉이 죽은 후에는 애굽 사람들과 동등한 백성이 되었고, 그리고 결국 끝에가서는 애굽 사람들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파라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다스리게 될까봐 겁을 먹었고, 자신의 권력과 자리를 뺏기게 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딸 덕분에 히브리의 한 사내아이가 살아 남게 되었습니다. 파라오의 딸은 강물 속에 떠내려가는 그 사내아이를 불쌍히 여겨 건져주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모세 였고, 그 이름의 뜻은 „건져낸다“ 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자유의 삶으로  „ 건져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자 마자 죽어야 할 운명이었던 아이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으로 자신의 민족을 인도해 냄으로 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생활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자유의 사람들이 되는 이스라엘 전환기 역사 속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들의 유사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본의 아니게 애굽으로 가게 된 것처럼, 신약의 요셉 또한 유대 땅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되어 애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통치자가 예수님과 모세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는 생각에 그들을 죽이려 했을 때, 예수님은 물론 모세도 그 죽음의 위협 바로 앞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냄으로 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죽음을 이겨내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던 두 아이들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해 낸 다음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바로 앞에 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의 죽음의 때와 장소를 결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 일개 세상의 통치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는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했을 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자신의 이웃을 위해 죽었으며, 그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을 헌신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과 삶과 그리고 바로 자기 자신을 주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승리하며 탈출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애굽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징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자신의 복음서 첫부분에서 부터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보호아래 애굽으로 피신 할 수 밖에 없었던 연약한 아기 예수님이 결국 모든 인류를 노예생활로부터 자유로 구원해 내시는 예수님이 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예수님의 귀환은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앞으로 행하게 될 위대한 행적(사역)을 미리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

그리고 정말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무엇에 인생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노예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빠지게 되는 여러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 노예생활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구할 수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위한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의 진정한 삶을 위해 쓰도록 자신의 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마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들 입니다.

예수님의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각자 개인 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 선물이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포장도 풀려 있고, 다만 우리가 받아들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에 성경과  그밖의 기독교 관련 역사를 배우는 그룹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어쩌면 어떤 분들에게는 그러한 모임들이 겨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나 초대 교회의 역사 또는 유럽 교회 역사에 대한 부분적인
정보를 얻게되는 시간으로만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귀한 시간을 내기에 불필요하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도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첫인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분명하게 보여주듯 전체 66권의 성경말씀은
서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정보차원이 아닌 우리가 알아야 하는 내용들이 모자이크처럼 연결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지식은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인생의 폭을 더욱 깊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치없게 느껴지는 시간도 결국 의미있는 쇼핑이 가져다 주는 이익과 같이 뭔가를 얻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행적도 예수님이 태어나자 마자 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대중 앞에서 그 사명을 실천하시기 까지  3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아마 자신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간은 다가왔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설교후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구세주 탄생에 대한 기쁜 소식이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선물에 대해,  죄 사하심과 구원의 사랑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사랑의 비밀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아기 예수님 안에 우리의 구원자시며 모든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의 인생으로 그분을 섬기며 따라갈 수 있도록,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살아있는 믿음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어둠까지 비춰주는 구원의 빛과 새로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와 화해, 그리고 기쁨을 가져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처럼 기뻐할 수 없는 병들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어린이들과 청년들, 노인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세상의 버려지고, 슬프고, 경직되고, 절망적인 곳에 당신의 빛을 비춰주시옵소서. 용기를 잃은 사람들에겐 격려를 주시고,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새로운 희망으로 채워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진리와 사랑, 은혜의 빛이 이 세상 모든 곳에 비춰지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진실된 기쁨 속에
„ 주님께는 영광, 땅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선함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기쁜 날들을 주님께서 친히
축복해 주시옵소서.  아멘

시므온의 꿈

  • 한인 예배 (2003년 12월 21일)
  • 눅 2:25-35
  • 설교자: 이종실

031221(대강절 네번째주일)

시므온의 꿈

누가복음 2: 25-35

<본문>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설교>

사람들 누구에게나 꿈이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꿈이 있습니다.

꿈은 한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민족 공동체에도 꿈이 있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죽은 백성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고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우리 체코의 한국민 공동체는 어떤 꿈이 있습니까?

하루 하루 사는 일도 급급해서 그런 꿈 꾼다는 것이 사치입니까?

사업을 하는 분들은 돈을 많이 버는 꿈,

예술을 하는 분들은 좋은 작품을 남기는 꿈,

공부를 하는 분들은 좋은 학교에 진학하거나 논문을 완성하는 꿈,

저와 같은 목회자는 큰 교회를 이루어 보려는 꿈,

자기를 실현해보이고 그로 인해 인정을 받고싶은 현실적인 꿈들이 누구나 다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신의 꿈을 실현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는 꿈은 실현했을 때 보다 실현해 가는 과정이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일단 꿈을 실현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공허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불철주야 애를 썼던가?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길래 이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노심초사 했는가?

자문자답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꾸는 꿈들은 참된 꿈이 아니라 욕망을 꿈꾸기때문입니다.

산마루턱에 올라가면 아래에서 보이지 않던 더 높은 산마루턱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욕망은 이루고 나면 충족과 희열감이 아니라 더 크고 높은 욕망이 기다립니다.

욕망을 꿈꾸면 우리는 계속 목이 마릅니다.

매우 깊은 우물에서 간신히 한 두레박 물을 길러올려 목을 적시고 나면 또 다시 우리는 두레박을 깊은 우물로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삶의 여정은 마치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다가 적당히 좌절하거나 자신과 타협을 하고 말게 됩니다.

신기루를 꿈꾸며 아까운 우리의 인생의 시간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꿈꿔야 할 그 꿈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충족하게 하고 기쁨에 넘치게 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꿈은 마치 사랑과 같습니다.

줄리엣과 로미오가 사랑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듯이 우리의 꿈의 그 대상을 바로 찾아야 목마름의 긴 여정이 끝이 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어느 민족 보다 일찍이 민족 공동체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민족적 수난에서 그들을 결속시켜주고, 그들의 동질성을 상실하지 않게 한 근본 원동력이 바로 그러한 민족적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꿈은 메시아에 대한 꿈이 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메시아에 대한 꿈은 매우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꿈이 특별히 바벨론 포로와 같은 민족적 수난 시기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자기 백성들이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이 메시아에 대한 꿈을 더욱더 강하게 상기시켜 주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메시아에 대한 꿈은 그들 자신의 생의 목적이며, 그들의 존재 의미며, 그들의 운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꿈은 그들이 살아야 할 이유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민족 공동체의 꿈이 한 개인의 생애에서 실현되는 것을 목격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이스라엘 민족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던 메시아의 때를 개인적으로 간절히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의미, 목적이 모두 메시아에 대한 꿈에 집약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노년을 맞이해서도 건강을 유지해 가면서 살았던 것도 그러한 간절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가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그 메시아를 그의 생전에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시므온이 평생 살아온 삶의 이유, 그의 삶의 실현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위로의 시간이었습니다.

시므온에게 그 때는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야 했던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어느 날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성전에 들어갔을 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유대 전통에 따라 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전통적인 유대법에 의하면 모든 남자 아기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 아기가 장남일 경우에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예식으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율법에 정한대로 행하기 위해서 성전안으로 들어 왔을 때 시므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로 한 여인의 품에 있는 아기가 그가 그 때까지 기다려 오던 바로 그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시므온은 만났습니다.

그는 드디어 그의 생의 실현의 때를 맞이했습니다.

시므온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실현의 순간에 경험한 것은 공허, 허탈감이 아니었습니다.

충만, 환희, 기쁨이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시므온은 아기를 그의 팔에 받아서 안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것은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그 아기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도록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을 받는
표징으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꿰뚫을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이 아기로 인하여 다가올 요동칠 역사입니다.

이 아기가 장차 자라서 그가 한 역사적 인물로 그에게 부과된 그의 사명을 수행해갈 때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무관심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그가 미쳤다거나, 귀신들렸다며 냉소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유대 전통사회 질서를 교란 시키고 파괴한다하여 적대시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시므온과 같이 평생 추구하고, 갈망해오던 자신의 생의 꿈의 실현자로 맞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 아기 예수를 시므온과 같이 자신이 기다려 오고 있던 바로 그 사람으로 맞아들일 때 그의 생애에는 매우 중대한 전환점이 생깁니다.

예수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의 글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두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가에 서 있는 사람은 건물 돌출부로 인해 시야가 막혀 있으므로 밖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이 천년이 지난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창가에 서있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연발하는 감탄사를 듣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와 복음서가 파생시킨 수 많은 책들과 몸짓과 언어를 연구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목을 길게 빼고 들여 다 보아도 육신을 입고 살았던 예수 그분 자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어갈 때 그러한 느낌을 받습니다.

시므온이 무엇을 보았길래 무엇을 경험했길래 저렇게 환희와 기쁨에 차 있을까?

도대체 그가 안고 있는 아기는 누구인가?

그가 점쟁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 아기의 운명에 대해 예언할 수 있는가?

그가 만난 아기 예수는 도대체 나와 나의 운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역시 창가에 서서 목을 길게 내빼고 거리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대해 하나의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지르며 환호하는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우리가 목마르게 찾고, 갈망해 오고 있는 바로 그분입니다.

우리의 꿈의 내용의 실재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참된 행복과 인생의 충족감을 느끼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비로서 피곤하고 고달픈 방황의 생을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가 처리하지 못한 복잡한 지난 날의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가 되어가야 할 참 인간의 길을 발견해 가게 됩니다.

그 분은 나의 구주, 나의 생명, 나의 미래, 나의 희망입니다.

교인이 된 사람과 신자가 아닌 친구가 만나 함께 나눈 대화입니다.

“그래, 자네 교회 나간다면서?”

“그렇다네.”

“그럼 예수에 관해서 많이 알겠군. 어디 좀 들어보세, 예수는 어디서 태어났지?”

“모르겠는걸.”

“몇 살 때 죽었지?”

“몰라.”

“설교는 몇 차례나 했나?”

“모르지 뭐.”

“아니 교인이 되었다고 하고선 예수에 관해 아는게 없잖아!”

“자네 말이 맞아. 아닌게 아니라 난 아는게 없어서 부끄럽네. 하지만 삼년 전 난 주정뱅이요 빚도 많았고,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돼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걸 무서워했지. 그러나 이젠 술도 끊었고 빚도 갚았고, 우리
가정은 화목해 졌네. 저녁마다 아이들은 나를 목이 빠져라고 기다리게 되었거든. 이러한 나의 변화를 통해 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네. 이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꿈꾸고 시므온이 꿈 꾼 그를 만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것과 새것의 분기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야 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눈 앞의 현실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 해외에서 일년 이년 자기 정체성을 보살피지 않고 살아가면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허무와 지나간 시간들 뿐일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허무함을 감추어 보려고 허세를 부리고 과도하게 자기를 드러내어 결국 많은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자기상실, 방황, 무기력함이라는 인생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시므온 처럼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만나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는 영적 노력을 해야 합니다.

2003년 12월 25일은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분하는 인생의 큰 분수령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눈물

  • 연합 예배 (2004년 04월 04일)
  • 눅 19:28-44
  • 설교자: 이종실

종려주일

<본문>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설교>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 첫날을 우리는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환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2:13)

이 날을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하는 주님의 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날에 대해 사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비교해서 읽으면, 누가복음서에만 기록된 내용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내용입니다.

무리들은 기뻐 노래했으며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이러한 상반되는 모습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무리들의 환호에 흘리는 감격의 눈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몸보다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왜 “나귀새끼” 입니까?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행동의 배경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이에 대해 언급을 하는데 그 내용을 구약 스가랴에서 직접 인용하고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
9:9-10)

다시 말씀드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끌고오라는 명령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평화의 왕을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왕이 올 때

평화의 왕이 올 때

그는 나귀새끼를 타고 옵니다.

이 예언이 여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예수님이 이 예언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나귀새끼를 끌고 왔을 때 이어지는 그들의 행동 때문입니다.

이것이 35절에서 38절까지 나옵니다.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그들이 한 행동은 예수님을 왕으로 즉위 시키는 왕의 대관식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예후가 구테타를 일으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때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열왕기하 9장 13절에 나옵니다.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이 하는 모습이 이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던 그들의 노래로부터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들은 참된 왕의 오심을 환호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노래하였습니다.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대로, 우리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일제히 예수님의 왕위 즉위식을 시작하였고 그리고 그들이 기대한대로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19장 11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기(예수)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제자들)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1)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부풀었던 것은 예수님이 간 곳 마다 많은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능력있는 사람은 오실 왕이심에 틀림없다.

그는 스가랴에 기록된 왕이심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참된 왕으로 로마를 통치할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통치를 세우실 분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할 때 그를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39절과 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39, 40)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무슨 뜻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왕의 대관식과 관련되어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로마를 자극하여 군사개입을 가져올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만약 로마의 군사개입이 있다면 당신은 위험하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을 재앙으로 몰고 갈 것이다.”라는 경고이며 동시에 “그러니 그들을 멈추게 하시오”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관심은 자신들의 종교적 권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군사적 개입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 자신의 권력은 현재의 통치가 지속될 때 유지될것이며 그래서 유대교는 공식적으로 로마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고 그리고 만약에 소동이 일어나면 로마는 정치적으로 개입하여 자신들의 특권은 상실 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것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 11:47, 48)

이것이 그들의 진짜 감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의 그들의 요구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40)

진짜 왕이신 예수님을 어떠한 권력도 입을 다물게 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와 같이 왕으로 즉위하는 예수님의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후 70년에 즉 40년 뒤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파괴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 군대였지만 예수님은 로마 때문이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계속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평화>는 모든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예언자와 함께 그들의 마음에 그들은 예수님의 왕위 즉위를 선포하였으며 기뻐하며 축하를 하였던 많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과 참된 평화의 설립을 희망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권력을 전복시키는 힘을 희망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예수님을 위해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이유로 예루살렘에 이미 와 있던 많은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능력의 힘을 사용해서 참된 평화를 세우고 하나님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그런 같은 생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기
시작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한편 바리새인들 역시 평화를 원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반 로마의 입장을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완전히 군사적인 힘의 사용을 반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그들의 계획은 곧 평화를 추구하는 그들의 고의적인 행위 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찌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찌로다 (시 128:5-6)

이 시편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는 예루살렘의 파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우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시는 그 평화의 길을 사람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예언자가 나귀새끼를 타신 왕의 오심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알았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서의 첫부분입니다.

스가랴 1장 1절부터 4절까지 말씀입니다.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1:1-4)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가 있었습니다.

 “내게 돌아오라”라는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조상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다시 말합니다. “내게 돌아오라”

회개의 경험을 통하여 그들은 평화의 왕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참된 왕이신 그 분이 있음에도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의 조상들이 했던 그 길을 따라 가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그들이 과거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를 원치않고 하나님께 돌아가길 원치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축복만을 바라는 그들의 모습에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는 자신의 적을 파괴하고 시스템이 변화될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하여 세상의 악의 축을 선언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가볍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선과 악을 구분하여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테러와 전쟁의 그림자가 길게 우리들에게 드리우고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타락의 시작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지금 2004년도를 살아가는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곧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그때 그 모습과 흡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의 눈물을 잊지 마십시다.

참된 평화의 길은 진심어린 회개입니다.

평화의 길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회개가 없을 때 참된 평화는 없습니다.

오히려 파멸만 가져 올 뿐 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평화의 왕을 환영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기적인 우리자신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그 뜻을 외면하는 고집스러운 우리 자신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이 세상에 세워주신 하나님의 교회를 이룬 우리들의 존재와 사명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들에게 말씀하는 동안 하나님의 초청의 시대입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분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 하나님께 돌아가고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멘)

내가 갈 길

  • 연합 예배 (2004년 03월 07일)
  • 눅 13:31-35
  • 설교자: 드로빅

<본문>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복음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해 조금은 의심을 하게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헤롯에 대해 경고를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고가 좀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복음서 다른 곳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논쟁을 한 사람들이며 예수를 도와주는 친절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논쟁하질 않고 그를 쫓아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준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을 쫓아내려고 합니다.

예상되는 헤롯의 위협을 예수님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헤롯을 쓸모없는 인간의 의미로 여우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최강의 동물이며 헤롯을 임명한 로마 권력의 상징인 사자와 구별됩니다.

예수님의 유머가 돋보입니다.

예수님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떠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가지고온 소식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헤롯에게 예수가 한말을 일러바칩니다.

분명히 헤롯의 권위를 무시하였다고 일러바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갑니다.

스스로 준비한 길을 갑니다.

그것을 이룰 자신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길에 초청을 받습니다.

우리들이 이 길을 이해할 것을 요청 받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에게 이 길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 길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스스로 악의 길을 피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생각과 마음이 치유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예수를 취하는 우리임을 고백하십시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목적대로 되지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을 우리들이 실패할 때, 우리들은 길을 잃습니다

아니면 그의 길을 모양만 본뜨게 됩니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 모든 경우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누가복음에서 이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주 의식적으로

예수님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어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지 잘못된 재판과 정의롭지 못한 판결의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쉬운 길이었으며, 인간으로서 내적 투쟁과 심각한 질문과 의심에 대한 대답을 찾을 필요도 없었던 그런 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의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다른 통치자에 대한 신뢰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신뢰, 그의 사명에 대한 신뢰의 결과가 죽음까지 걸어가야 했던 그의 길이었습니다.

그를 기다렸던 불행한 종말은 헤롯에 달려있었고 갈릴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극장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보는 “영화의 끝”이란 자막글자 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이 완성한 그 길로 나아가길 원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그길을 걸어가야 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디론가 인도하시는 길

우리 개인뿐 아니라 우리 모든 공동체를 인도하시는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꼭두각시 인형들이 아닙니다.

미리 결정된 대로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해 오늘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이와 같이 “아니오”하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라 말하는 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면 그에 뒤따르는 행동과 결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사람들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의 “아니오”때문에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좌지우지 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거하시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현존안에 살 수 있도록 하기위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길을 완성하셨고 악에 굴복하지 않으셨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않으셨으며 그러나 홀로 계시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안에 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 오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의 영광 안에서 종려주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축복의 왕이여 호산나” 찬양을 하였던 그들과 연합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들의 헤롯들의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며 그의 길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내일 모래 우리의 길에 고통과 죽음과 내적 갈등과 의심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연약한 믿음과 의심으로 뒤덮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에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