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 한인 예배 (2003년 04월 27일)
  • 출 12:21-23
  • 설교자: 이종실

030427 (부활절후 첫째주일)
출애굽기 12:21-23
유월절

<본문>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4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25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26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28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설교>
지난주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소명을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 애굽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놓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전했을 때 바로는 모세의 말을 듣지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재앙을 하나씩 하나씩 내리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부터 해방을 시키도록 압박을 가합니다.
결국 10번의 재앙 끝에 바로는 그들을 해방시킵니다.
이 이야기가 12장까지 이어집니다.

아주 유치해 보이는 출애굽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당혹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근거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무고한 애굽사람들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시는가?

출애굽 8장에 파리떼 재앙을 내리실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출 8장)

무슨 근거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백성이라고 구별하시는가?
하나님은 인종 차별자이신가? 아니면 민족 차별자이신가?
애굽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차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편드시는가?

무엇보다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않게한 원인제공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가 고집을 부린 것이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언급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함정을 파고 그 함정 속으로 바로가 들어가도록 등을 떠밀고 애굽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셨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가치가 있어 하나님은 애굽사람들에 그토록 잔인하신가?
우리는 의문을 갖지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문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믿음의 관점에서 고민없이 그 의문을 해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하나님을 믿고있었고 애굽인들은 우상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편드신다는 것입니다.
바로와 모세 또는 바로와 하나님의 대결을 신앙과 불신앙의 불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즈음말로 표현하면 신앙의 우월성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것 그것 자체가 우리들의 신앙의 우월성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한번 자문해 보고싶습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지 수십년이 되어서 지금까지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을 회상하며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말한 내용이 여호수아 24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결심은 그들의 믿음때문이 아님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있었던 그 싯점은 그들이 애굽에서 애굽인들이 했던 것 처럼 애굽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 사람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었노라 그 날에 내가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 (겔20:5-8)

무슨 말씀입니까?
심지어 약속의 땅 구원의 땅 그곳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사람들보다 조금도 더 낫지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불신자들 보다도 타종교인들 보다도 더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바로와 모세, 애굽인과 이스라엘 백성, 사울과 다윗, 바리새인과 예수의 제자들, 유대인과 바울 이런식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을 해서 한쪽을 이기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해서는 안됩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이해하였습니다.(출3:7)
하나님이 그들을 본 이유는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들의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독자들로 인한 고통때문에 부르짖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시말씀드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무가치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를 소개한 책입니다.

그들이 제각기 자기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그들의 해방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와 그의 형제 아론은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 5:1)

바로가 대답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2)

이처럼 해방을 요구하는 하나님과 완고하게 거절하는 바로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10가지 재앙은 대단히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와 이와 파리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고, 가축에 전염병이 돌고 사람들과 가축들에 종양이 번지고 거대한 우박이 비오듯 쏟아지고 메뚜기떼가 자라는 풀들을 갈아먹고 3일동안 어두움이 전 애굽 땅을 덮었다.

오늘 본문은 10번째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 재앙들이 차례 차례로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건들 속에 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능력으로 심판을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목전에 벌어지는 충격적인 재앙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절정에 다다를 다가올 저녁에 대해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밤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애굽 전역에 짙은 안개가 깔리듯 펼쳐질것입니다.

그 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토록 갈망하며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들에게 역시 가장 큰 위기의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롭게 애굽의 전영토를 심판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심판을 피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구원을 찾는 그들이 자신들의 억압자인 애굽인들과 비교해서 그들의 억압자들 보다 더 의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구원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의로움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을 원하는 사람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모세를 통하여 당신의 자비와 용서를 기다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 모두를 불러 명령하였습니다.


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1-23)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칠해진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 집안의 사람들과 짐승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피를 본다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용서와 구원의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의 근거는 희생의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28)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인간적인 노력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집 문설주와 기둥에 피를 칠하고 집에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은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어린양의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하신 마지막 만찬이 유월절 축제의 식사였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축제가 예루살렘에서 진행되는 동안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진실로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유월절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찬예식때 하나님의 어린양 찬송을 부릅니다.
세상 죄를 끊으신 어린양 예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유월절은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전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 출애굽 사건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유월절은 조상들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하나님으로 불리우는 전환점이 되고있습니다.

출애굽 전야의 유월절 그날 저녁의 모습에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바른 출발을 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 각자의 의로움으로 모인 곳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모인 모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그 믿음이 다른 어떤 종교인들에 대해 불신자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집단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구원받을 가치도 자격도 없습니다.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피에 의지해서 묵묵히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작년 한인 송년의 밤 때 한글학교 발표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어린 자녀들이 나와서 모든 한인들 앞에서 발표를 하였습니다.
모두들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한 어린 학생이 말과 행동이 다른 교회 다니는 친구로부터 기독교에 대해 의문을 갖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목사로서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그리고 어린 학생에 대해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조용히 불러서 이야기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친구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어 미안하구나.
그런데 교회가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야. 좋은 점도 보려고 한번 노력해 보렴.
그 어린 학생이 싫었던 것은 말과 행동이 본이 안되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한 어린아이의 철없는 생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희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믿지않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조롱을 당하고 있는지 조금만 귀를 열어보면 금방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만심과 우월성을 극복하는 문제는 새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2차세계 대전이후 유럽교회들의 질문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면 세상의 마지막 때가 되고 그러면 그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한 기독교인들은 구원은 물론 하늘의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믿음으로 서구 기독교인들은 열렬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한 하나님 나라는 오지않고 대신 참혹한 전쟁의 체험만이 있었습니다.
1차세계대전은 카톨릭의 종주국인 이탈리아가 주도하였고 2차세계대전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나라, 개신교의 나라 독일이 주도하였습니다.
참혹한 전쟁을 체험한 서구 교회들은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기시작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신앙의 우월성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그래서 독일교회는 사회봉사단체를 교회가 이름없이 빛도없이 세상을 섬기기위해 막대한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대가없이 투자하면서도 교회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사회를 일으키는 큰 역할을 감당하게됩니다.
이슬람과 힌두교 등 다원화된 사회인 영국 버밍험에서 영국교회들이 타종교와 평화를 이루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화,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 백인 기독교와 흑인 기독교의 대화 각종 연구센터들이 생겨났습니다.
서구교회는 선교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고 했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과 참회의 실천의 내용이 지금 서구교회의 선교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인 까닭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흘리신 보혈의 피로 칠해진 십자가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아침까지 희생의 어린양의 피로 칠해진 자기 집 대문을 열지말고 그 안에서 기다려야 하듯 우리들도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을 기억하고 의지하며 구원의 아침까지 교회를 떠나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지않고 그들의 문설주에 칠해진 피를 신뢰하며 평화롭게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즐기는 동안 그들은 구원의 희망 안에서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는 것을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듯이 동시에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후 5:18)

이러한 교회의 삶이 유월절 축제요 구원의 희망 안에서 주의 날을 기다리는 교회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로 모이면서 무엇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와 실망과 낙심밖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기준과 잣대로 교회의 문턱을 높여 나도 들어가지않고 남도 들어가 못하게 천국 문을 가로막는 불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지 마십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칠해진 십자가만을 의지합시다.
십자가는 자기를 죽여 아무 대가 없는 희생과 섬김입니다.
나는 죽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이 교회 안에서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며 함께 노력하십다. (아멘)

하늘양식

  • 연합 예배 (2003년 06월 01일)
  • 출 16:1-15
  • 설교자: 이종실

030601ek
본문: 출 16,1-15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찌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8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명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설교>
부활의 승리의 기쁨은 언제나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승천으로 이 땅에 남은 자들에게 다시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번져갑니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에서 읽혀지는 요한복음의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뒤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닥쳐올 박해를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결과는 우리가 기대한 편안함과 행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망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 3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3절)

지금 원망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지금 원망하는 그들은 애굽을 탈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예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 2:23)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자유하게된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해방시킨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들이 원망하기 시작하던 날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1절)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의 은혜를 체험한 것이 이제 꼭 한 달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들은 불과 한달 전에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애굽 군대가 그들을 추격할 때에 그들 앞에 나타난 홍해바다는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에 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막다른 길을 뚫어 계속 나아갈 길을 열어주셨고 그들의 절망을 뚫고 나아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그때 자신들의 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낌없이 찬양하였습니다.
15장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한 찬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들은 주님께 노래하였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1-2)

원망을 하는 사람들이 캠프를 친 곳은 샘물 곁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 15:27)
광야에서 이보다 더 좋은 캠프장소는 없습니다.
그 장소를 그들이 스스로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 장소로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다시말씀드려 주님이 그들을 샘물로 인도하였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풍성함이 넘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원망을 하였을 때 그들은 그와 같은 체험들을 하였을 때였습니다.
샘물로 목마르지 않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같은 입으로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 그들은 말하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모습입니까!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우리들이 오늘날 교회의 발걸음을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자신의 매일의 삶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와 비슷한 배은방덕하고 부끄러운 사고방식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 아침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찬양하고 주의 만찬의 샘물 곁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예배를 마치고 교회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이 우리들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에 대해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8절)
주님은 분명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동시에 주님은 백성들의 원망의 소리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이 들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망할 때마다 주님이 그 원망도 들으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8절)
우리가 애굽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말한 백성들을 여호와께서 계속 살리십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한 것이 사실대로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저녁이 되자 메추라기가 날아와 장막 주변을 덮었습니다.
아침에 이슬이 장막에 내리고 그리고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으로 덮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만나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양식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양에서 여행한 40년 동안 그들은 이 하늘의 양식을 먹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온전한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대로 그들은 의롭고 경건하고 신실한 백성들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존재 상태는 애굽에 있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양식을 받을 마땅한 권리가 있지않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것은 오직 은혜때문이지 은혜이외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혀 가치 없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은총을 보여주신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12절에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위를 만족하기 위해 양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은 녀희가 내가 주 너의 하나님임을 알게하는 것입니다.
이 양식을 받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은혜가 넘치는 여호와와 생명의 관계로 살게 되어 그를 사랑함으로 그를 두려워 함으로 그를 신뢰함으로 그를 따름으로 살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가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거기서 양식을 주는 이유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광야로 인도되지않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야 없이 교만한 인간이 그들을 진실한 삶으로 해방시키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신명기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 40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신 8:2-3)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양식을 주신 이유가 그들은 양식으로 단지 살게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매일의 말씀으로 사람들이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단지 양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복종할 명령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만나를 저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각 사람의 식량대로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양식 그 자체가 아니라 양식을 주는 분 그 분 여호와께 초점을 맞추게 하여 날마다 복종하며 그를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에 참된 삶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가치도 없는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어지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해 광야의 여행은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위해 겪어야만 하는 커리큘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자신들을 성장케하고 훈련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광야의 여행을 통해 우리는 약속의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주님은 이 광야의 여행 길을 우리 홀로 가게 하시지 않습니다.
(아멘)

일어나 걸으라

  • 연합 예배 (2003년 05월 04일)
  • 행 3:1-12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30504ek
본문: 사도행전 3, 1-12a

<본문>
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개역한글판 행 3장)

그리스도 부활이후 우리들은 이스라엘 이야기를 새롭게 읽는 것을 배우고 놀라는 것을 배웁니다.
성령이 교회를 세웁니다. – 이것은 유일한 성령의 기적입니다. –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지고 이스라엘 성전은 예언자들의 예언으로 채워집니다.
사도들에 의해 증언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전없이 나타날 수 없었고, 교회는 이스라엘 없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며 사도들의 대표들이 공개적으로 그것을 보여주고있습니다 –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가야만합니다.
만약에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야곱 – 이스라엘이 기억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수도 희망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잊어버릴 때 교회의 증언과 모든 민족들을 위한 여호와의 이름을 교회는 타락시키게 됩니다.

드로가 앞장서서 교회당으로 가고 요한이 함께 성전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기독교 증언의 효과에 대한 희망이 깊은 일치안에서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전통의 교회를 서방교회 그리고 요한 전통의 교회를 동방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여기 꼬빌리시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게다가 야곱의 약속을 기대하는 것 이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사람 (전통적인 교회들과 그들의 설교자들과 선교사들) 없이 우리들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개혁교회 전통의 공동체의 변화를 추구하지않는다면 그리고 중세교회의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리고 사도들의 교회의 모습이 없다면 우리들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예배는 역사를 소재로하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불과할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정으로 자신의 백성을 찾았습니다.

이미 예언자들의 희망이 성취되는 시간이 임했습니다.
누가는 화가처럼 끌어당기는 놀라운 힘으로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자를 죽음으로부터 일으켜세웠을 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성전으로 갈 때 그당시 거기에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옮겨두어 거기서 그들이 구걸을 하게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집안대대로 내려오는 죄로 여겼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죄가 많았고 그래서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질병은 이스라엘의 희망이 성취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었습니다.
범위를 넓혀 생각해보면 이 병자 한사람은 전체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앉은뱅이가 사람의 마음을 끌게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아직 섬기는 공동체가 존재하기때문입니다. – 매일 일하는 신실하고 인내심있는 디아코니아 즉 섬김이 있기때문입니다.
이 섬김을 우리 교회의 삶으로 보여주십시다.
우리는 교회당으로 갑니다. 우리들의 희망을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당 주변에 섬기는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그래도 저는 성전이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좋은 곳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까렐 다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많은 돈을 그들 대장들에게 갈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난과 교회의 대대로 전해지는 질병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모두 성전의 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늙은 구걸하는자의 희망은 약을 살 수 있는 돈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희망은 다른 곳으로부터 옵니다.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교회당안에도 있어야 합니다.
여기로 앉은뱅이를 데리고 와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이 증언이 없는 곳 그리고 자선을 위한 문이 열려있지않는 곳 그리고 디아코니아 섬김과 봉사의 마음이 열려있지않은 곳 그곳은 벌레처럼 그냥 왔다 갔다하는 여행자들만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소비적으로 교회를 출입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도 않고 그래서 위대하신 여호와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약한자 도움을 갈구하는자 죄인들을 교회로부터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문을 닫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유대인들과 모든 민족들을 위한 메시아 왕국의 표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눈 먼자가 보고 귀먹은 자가 듣고 앉은뱅이가 걸을“ 디아코니아 의 모든 봉사를 통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에서 가난한 자는 가난하게 되고 앉은뱅이는 온 육신과 영혼이 불구가 되고 죄인들은 교회당에서 쫒겨나게됩니다.
병자들은 죽어가고 부유한 자는 더 부유하게 되고 찬양의 기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앉은뱅이를 돌보지 않는 교회를 도우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 앞에 놓여 있는 앉은뱅이를 기다립니다.
신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합쳐질 수 없는 것을 연합시킵니다. 이미 오래전에 역사적으로 분열된 것을 예를들어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를 로마 카톨릭교인들과 개혁교도들 건강한자들과 병든자들을 연합시킵니다.
모든이들이 연합되어야 합니다. 앉은뱅이의 다리가 강해진 것 처럼 그렇게 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설교자들의 관심과 장로님들의 관심이 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그러한 교회를 이루어 그곳에 세상을 섬기고 돌보는 자리가 준비된 그런 교회를 우리는 이룩해야 합니다.
노인분들이 등을 기대고 앉는 의자처럼 우리 교회를 세상이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평온해야 합니다.
한 존경할만한 주석가가 서커스에서 어릿광대처럼 재주를 넘었다고 통합에 대해 글을 썻습니다.
공중에서 뛰어넘고 회전하다가 두다리로 착지를 합니다.
부활한 예수가 회복시켜준 이들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미친사람들로 가득차지않을 때 여행자들에겐 쓸만합니다.

리는 지금 교회당에 사무실, 찻집, 기도실을 늘리고 울타리 없는 정원을 만들어 기도를 원하는 사람이 올 수 있도록 그리고 한국인들
디아코니아 체코인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이 더 넉넉히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넓히는 일을 추진할 것입니다.

누가는 모든 연약한 자들을 위해 아름다운 말씀을 전합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걸으라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을 증거하라는 뜻이며 걸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 다시말씀드려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삶을 살으라는 뜻입니다.
앉은뱅이는 성전 거기서 어떻게 기뻐하며 베드로와 요한을 도왔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리를 절고있는 건강하지 못한 교회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로 하나된 교회로 회복된 모습을
보는 것, 모든 전통의 기독교의 하나님을 보는 것 그리고 그들이 모여 하나됨을 기뻐하는 찬양을 듣는 것은 앉은뱅이에 대한
디아코니아 섬김과 봉사의 매일의 사랑이 부활의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곳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던 모든 것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 을 놀라고 감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절기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스스로 가질 수 없고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까지 간직하였던 모든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을 회복시킬 변치 않는 도구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날 그가 우리들을 서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님의 식탁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시간 이후에 다리를 절고 놀라고 그리고 죽음을 대면하여 우리가 보았고 들었던 것에 의지하고 있을 지라도 그래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님의 식탁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Amen

너와 함께 있으리라

  • 한인 예배 (2003년 04월 20일)
  • 출 3:1-15
  • 설교자: 이종실

030420 부활주일
출애굽기 3:1-15
너와 함께 있으리라

<본문>
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설교>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1절)

이 본문은 우리들에게 양떼를 모는 나이 80의 촌부 모세의 모습에 대해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지 40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80에 가까운 노인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는 노예로 고통당하는 히브리 동포들을 도우려는 의협심이 충만했습니다.
의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열정은 뜨거움으로 불탔고 그래서 그는 동포를 학대하는 애굽인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동포를 노예로 취급하는 애굽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자신의 동포들의 지지를 얻지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체코의 조그마한 한인사회를 한 예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다 능력있는 분들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을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나라와 민족 아끼고 봉사하고 그리고 보편적 인류사랑을 원하는 분들입니다.
옳은 일을 실천하는 마음과 뜻이 있는 분들이 모여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러한 마음들이 우리들의 실생활에서 피부로 와서 닿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마음과 뜻들이 시기와 질투와 경쟁심과 권위의식에 가리워져 있는 것을 경험할때가 종종있습니다.
이런것을 경험할때면 상실감과 좌절감을 느낍니다.
이것이 쌓이고 쌓여 내가 몸담은 내 사회 내 이웃을 향해 침을 뱉고 저주를 하게 됩니다.
이제 체코에 온지 한 두주 되는 분들의 입에서 체코는 터가 세다 고 하면서 자신의 사회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모세가 얼마나 커다란 좌절감을 겪었을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살인자로 반역자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을 하면서도 더 이상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그의 발걸음은 천근의 무게를 느낄 만큼 무거웠을 것입니다.

제사장 이드로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일면식도 없는 미디안 땅에서 그는 나이 40이 되어 처음해보는 양치기 목자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양치기 일을 그는 지금 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40년간 매일 양 떼를 몰면서 젊은 시절 그의 마음을 불태우던 불이 서서히 불씨를 남기며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양떼를 몰고 다니는 80의 촌부의 모습에서 이전에 모세가 가졌던 야망 그 마음의 뜻을 더 이상 우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의 타던 불꽃이 꺼져가고 그 열기가 식어가는 만큼 그와 그의 가족들 사이에 평화로운 삶은 더욱 더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히브리 동포들은 이순간에도 애굽에서 숨차게 살고 있음에 분명하였습니다.
옛날 바로가 죽은 후에도 노예들의 상황은 바뀌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모세에게 먼 나라였습니다.
고통받는 자신의 동포역시 먼 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는 동포의 고통은 모세의 삶의 고민일 수 없습니다.
그의 눈앞의 가족과 양떼가 오직 그의 삶의 모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그의 작은 평화의 세상에 안주하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일상의 삶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모세가 그날 하나님앞에 예배를 드리다가, 성경을 보다가 그리고 깊은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떼들과 함께 일하다가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을 감리교회 이현주 목사님이 <너희가 나를 알게 되리라>는 그의 책에서 재미있게 해석을 합니다.
모세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서양 속담이 아니라 길 아니거든 가지 말라는 동양 속담에 따라서 살아간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치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 호렙산으로 스스로 방향을 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양치기는 이미 있는 풀과 물을 찾아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 풀과 물이 모세를 호렙산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호렙산을 모세가 자기 발로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이끄시는 대로 발길을 옮기다가 다달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의 관계성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도 아닌 이 해외에서 우리가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체코의 전문가가 되어도 쉽지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체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처음에 일단 아는 사람을 통해 조그마한 정보를 얻습니다.
그리고 조금 생활이 익숙해 지면 먼저 아는 사람을 폐기처분하고 스스로 아는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체코사람 아니면 아름 아름 알게된 체코사람 그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계획을 추구해 갑니다.
인간관계가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면 한국인이 되었든 체코인이 되었든 오래가지 못합니다.
10여년 넘게 무수히 많은 한국인들이 오고 가는 삶을 보면 이 과정을 그리 벗어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생활은 인간관계를 수단으로 결코 만들지 않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나의 삶의 목적으로 수단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다릅니다.
무엇보다 신앙으로 바라보는 자기 자신은 이기심으로 바라보는 자기 자신과 다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이곳에 저와 저의 가족을 보내신 분이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까?
저와 저의 가족을 죽이든 살리든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살고 계십니까?

신앙의 생활화, 생활의 신앙화가 철저히 되지않으면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 가 없습니다.
나의 계획과 목적이 앞서는 한 우리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실 자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초와 물을 따라 양떼를 몰고가다가 그는 호렙산에 다다랐습니다.
거기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는 불에 타지않고 있었습니다.
이미 다 타버려 재가된 사람, 모세 앞에  태우되 재를 만들지 않는 영원히 타는 불, 하나님의 불이 있습니다.

그 불로부터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때까지도 모세는 하나님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러 호렙산에 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초지를 찾아 양떼를 몰고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그 장소는 그의 일상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그가 늘 하던대로  양떼가 배불리 먹으면 떠났을 곳입니다.
늘 일상생활에 있는 평범한 장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서있던 곳을 지적하며 말씀하십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우리들의 이기적인 발걸음을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으며 그 신을 누가 벗겨줄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불태우는 욕망이라 불리우는 전차의 수레바퀴를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자신들을 구원할 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죽이고 나서야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예수가 운명하시자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를 죽인 무리들과 백부장과 군인들이 고백을 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습니다.
뒤늦게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다시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는 구체적인 실천이기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스스로 고백한 그들이 전혀 다른 모의를 합니다.


이튿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마 27:6264)
그뿐만 아닙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의 사건을 조작하고 왜곡합니다.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마 28: 12-13)

이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과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받을까 두려워하여 숨어지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 도마는 믿지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믿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기적인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심각한 문제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걸어왔던 이기적인 발걸음의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과 빛으로 채워지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듯이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비우면 빈 마음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과 뜻으로 동시에 채워집니다.
가족과 양떼로 채워진 모세의 마음에 다시 고통 받는 동포로 채워집니다.


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7-8절)

모세가 만났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의 이기심을 벗기고 고통받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당신의 마음으로 채워주십니다.

이 말씀에서 마음의 이기심을 벗겨주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음하고 울부짖는 우리의 고통에 귀를 기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세상의 모든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의 자리는 실가닥 같은 희망도 없는 곳입니다.

저는 몇 년전에 오시엥침(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를 처음 방문하고 정말로 충격과 공포와 전율을 느꼈습니다.
한동안 밥맛을 잃었습니다.

문에 듣던 죽음의 가스실은 아닌지 샤워실 물꼭지를 바라는 저들의 눈, 시체 태우는 방의 굴뚝에서 오른 연기와 재를 바라보던 눈, 이
행렬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두려움에 떠는 눈, 그 눈들 속에 담긴 공포, 죽음보다 더 무서운 그 공포 보다 더 고통스러운 곳이
이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있는 한 그 자리는 고통의 자리임도 불구하고 절망의 자리라고 말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던 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매달려 있는 곳 십자가 그곳이 바로 절망의 자리이고 가장 큰 고통의 자리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던 한 인간의 좌절은 이 세상 어떤 고통도 그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단절되어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까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 (14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언제나 인간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려오셔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스스로 계신 이 하나님은 스스로 세 가지 일에 대해 물으신다고 했습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내 일을 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둘째,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셋째,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존경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의 삶의 장소에서 신발을 벗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9,10절)

모세는 이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전의 그 열망의 불꽃은 다 타버려 식어버린 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

그러나 주님은 모세의 질문에 대답하지않았습니다.
단지 그에게 약속만 하였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가 아직 열정이 남아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가 힘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하나님에게 상관이 없습니다.
모세가 자신에 대해 제기한 질문은 하나님에게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관대의 질문이 아니라 주님이 그와 함께 하심입니다.
체코의 작은 한국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지치게하고 실망하게 하고 허무하게 하는 끝없는 논쟁이 모세와는 그 표현이 다르지만 결국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모세는 부족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며 인간 앞에선 우리는 자기 자존심에 대한 질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질문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들의 질문은 해외에 산다고 다 똑 같은 줄 아는가?
나는 당신과 다르다. 이겁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선교사면 다 똑 같은 선교사인가?
나는 체코의 개척선교사이다.
그래도 경험으로나 공부로나 나 만큼 선교를 준비했나?
프라하에 한인교회가 두개 있는데 교회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리고 선교적으로 정통성이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아닌가?
은근한 자존심과 우월심, 이것이 궁극적으로 모세의 질문 내가 누구관대? 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을 부패하게 만들고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건강하게 살려면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대 라는 자신의 질문이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발걸음의 신을 벗은 사람이 오직 가져야 할 관심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파송의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좌절과 근심에 휩싸여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교회당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구원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부탁하고 그들을 파송하십니다.
파송을 하면서 목사인 저에게 파송장을 주고 생활비와 선교비의 계약서를 주고 평신도인 여러분들에게 돈 잘 벌리는 사업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을 파송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저와 여러분들의 열정과 노력 때문에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고통받는 이들을 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일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열정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부활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응답은 우리들의 신앙의 열정을 다시 불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우리의 발걸음의 신을 날마다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붙잡고 그것을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충족한 삶을 체험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일시체류자 모세

  • 한인 예배 (2003년 03월 30일)
  • 출 2:11-25
  • 설교자: 이종실

030330 (사순절 넷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11-25
제목: 일시체류자 모세

<본문>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설교>
고난의 시대에 모세는 태어났고 우여곡절 끝에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였습니다.
장래가 보장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모세의 생애에 예기치 않는 사건으로 다시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반역자가 되어 자신의 부귀와 영화와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의 인생여정을 우리들은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외국 땅 미디안에서 모세의 생애는 이렇게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를 우리들과 같은 하나의 기독교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오늘 본문의 그의 생애를 읽어보면 우리들과 비슷한 처지를 모세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모세를 해외생활을 하게하였고 그리고 그는 먼 훗날 그의 가족이 살고있고 그의 어린시절을 보낸 고국 애굽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저와 여러분도 모세처럼 언젠가는 우리들의 피부색깔과 감정과 말이 통하는 고국으로 돌아갈 일시체류자들입니다.
해외에서 고생을 하며 기반을 다진 이민자들도 은퇴를 하면 한국에서 살다가 고향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민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시민으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정서적으로 영원한 일시체류자들입니다.


론 인종적인 차별을 느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들에 긴장을 풀지 못하면서 그리고 언어소통의 불편함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날마다 받으면서 온갖 수고와 고생을 마다하지않고 살아가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꿈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고생스러움을 대신할 수 있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문화와 언어를 경험케하여 더 폭넓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녀들에 대한 기대가 우리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학문의 경험과 지식을 쌓아 후에 귀국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우리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발전적인 분야를 이곳에서 접목시켜 체코사회 보다 한발 앞서 나가 시장을 개척하여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기대가 우리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국을 떠날 때 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희망을 품고 삽니다.
반역자 도망자로 애굽을 떠났다가 훗날 하나님의 은총으로 민족의 해방자로 귀국하는 모세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우리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희망을 이루지 못하면 이땅을 떠날 때 야반도주 하듯 떠날 수 밖에 없고 한국에 또는 다른 나라로 소리없이 스며들어갈 것입니다.
외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꿈과 희망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반역자로 야반도주한 모세가 민족의 해방자로 귀국하고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는지 오늘 본문의 말씀에 여러분들이 귀를 귀울인다면
저와 여러분도 희망과 꿈을 이루고 귀국하는 일시체류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으로 오늘 본문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민족의 해방자로 성공한 해외 일시체류자로 귀국하게 하였는지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진술 하지않고 그의 살인과 시체유기 사건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어린시절에 애굽에서 선진적인 교육과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 기독교인인 스데반 집사가 모세는 “애굽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했다” 사도행전 7장의 진술처럼 모세가 그가 잘 훈련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은 언급하고 있지않습니다.
대신 오늘 본문은 모세의 살인과 시체유기 사건과 그로 인해 도망자가 된 모세의 처지를 담담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모세의 살인사건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세를 간혹 다혈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시하는 모세의 사건 몇 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 살인사건입니다.
모세가 혈기가 있는 사람이어서 충동적으로 살인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저와 여러분은 그 견해에 동의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이스라엘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여기서 애굽사람이 자기 형제를 쳤다는 것은 그냥 주먹으로 한대 쿡 지어 박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친다는 단어는 죽였다는 의미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노역현장에서 애굽사람이 (히브리 노동자들을 관리하던 애굽사람이) 노동자 히브리인을 때려서 죽인 것을 모세가 보았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여기서 한번은 한번 두번의 숫자가 아니고 어느날이란 뜻입니다.

굽감독자가 히브리 노동자를 때려 죽이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을 하면서 모세는 문제의식을 가졌고 그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마지막
목격을 하는 날 좌우로 살펴보니 보는 사람들이 없어 잔인한 애굽 감독자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응징을 하였습니다.

대단히 계획적이었던 살인이었음이 재빨리 시체를 감추는데서도 드러납니다.
12절 하반절에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를 관리하고 감독하던 사람은 성인 남자였을 것입니다.
성인 남자의 시체를 감추는 일은 그리 쉽지않습니다.
모래에 적당히 묻어서 되지않습니다.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아본 경험이 있으시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백사장 거죽을 덮고있는 모래는 쉽게 손으로 팔 수 있지만 그 거죽을 걷어내면 그 아래에 있는 모래땅을 맨손으로 팔 수가 없습니다.
성인남자의 시체를 감추기 위한 큰 구덩이를 모세가 맨손으로 파지않았고 어떤 연장을 사용했을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이고 바로 모래로 묻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볼 때 모세는 이미 가까운 곳에 땅을 파는 연장을 숨겨두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이러한 추측은 다시 말해 모세의 살인은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었던 일을 언제나 기회를 엿보았던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면밀 주도하게 한 살인이었기에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세는 다음날 태연히 행동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살인이 우발적이냐 아니면 계획적이었느냐를 밝혀보는 것은 오늘 본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의 실마리가 됩니다.
모세가 계획적으로 살인을 한 것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민족의 고역함”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인물 가운데에서도 모세처럼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의로운 마음에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러분이 잘아시는 안중근 선생님은 하얼빈역 부근 찻집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암살계획이 반드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
뒤 역에서 러시아 군 의장대 사열을 받으며 열차에서 걸어 나오던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아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살인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같은 동포 두 사람이 싸우는 일에 개입한 것이 모세의 일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히브리인 둘이 서로 맞붙어 싸우는 것을 보고 잘못한 자에게 어째서 동족을 때리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꾸중을 받은 사람이 대꾸를 하였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우두머리고 삼고 우리의 재판관으로 삼았소? 당신은 애굽사람을 죽이듯 나를 죽일 작정이오?”
아무도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비밀이 자신의 동포 입에서 나올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동포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에 모세는 급소를 맞아 그 자리에 주저앉은 권투선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모습을 오늘 본문 14절은 “모세는 일이 탄로났음을 알고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 7장에서
“모
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행 7:22-25, 스데반의 설교)

이 사건이 모세가 40세되 던 해에 일어났습니다.
신명기 34장에 보시면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을 때 나이가 일백 이십세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민족의 해방자로 바로앞에 섰을때가 80세였다고 출애굽기 7장 7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120년의 모세 생애가 40-40-40으로 셋으로 구분이 됩니다.
1-40살 바로의 궁전생활/ 41-80살 미디안 일시 체류자/81-120살 히브리(이스라엘 민족)과 광야생활/

인생 40세에 발행한 이 사건은 모세의 인생에 큰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과 억압 받는 자신의 민족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을 하던 시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바로의 궁전생활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민족을 돕는 방법을 생각하였던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쾌걸 조로처럼, 수퍼맨처럼 동포를 억압하는 애굽인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동조할 동포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모세는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동포에 대한 기대 그리고 그 동안 누렸던 기득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기대했고 자신의 편이라 여겼던 자신의 동포의 고발로 모세는 대역죄인이 되어 바로의 수배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궁전 안에서 꿈꾸던 히브리 민족의 해방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자신의 계획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아무 관련이 있지않고 오히려 고생하는 민족을 위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편을 들고 지원하고 후원해야 될 그 사람들에 의해 모세의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그 젊은 시절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뇌하던 그 수많은 시간들이 이제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그 고민을 나눌 사람도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시킬 자신의 민족도 이제는 그의 곁에 없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땅 어떤 우물가에서 자신의 좌절과 실패 그리고 고독함을 하염없이 곱씹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또 하나의 비열한 행위를 목격하게 됩니다.
일곱 자매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러 아버지의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할 때 몇 몇 목자들이 와서 그 자매들을 쫒아버렸습니다.
모세는 그 자매들 편을 들어 구해주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모세는 그 자매들의 아버지를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의 집에서 처음 해외생활을 시작하게됩니다.


외생활 몇 년 만에 이사 다닌 것이 이제는 이골이 났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해외 낯선 곳에서 자신이 거주할 집을 찾고 월세 계약을
하고 이사를 해서 짐을 풀고 어색하기 만하던 침대 위에 누웠던 첫날 밤, 그때 그 흥분과 긴장이 아직도 생생하실 줄 압니다.

르우엘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모세에게 오랜만에 평온한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몸은 미디안 땅에서 살지만 마음은 언제나 떠나온 애굽과 거기서 고된 노동으로 고통을 겪는 동포들곁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세의 마음이 아들을 낳고 지어준 이름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입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미디안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귀여운 아들을 낳아 가정을 이루었지만 모세의 마음은 일시체류자이지 그 땅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애굽에서 노역을 하는 자신의 동족의 고생을 덜어주려는 생각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동족을 염려할 힘과 젊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실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실현시킬 수도 없는 꿈을 안고 모세는 이렇게 미디안 땅에서 시간을 흘려 보내고 살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육신도 늙어가고 정열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꿈꾸며 사는 것이 언제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꿈도 서서히 희미해져 갑니다.
아무리 해도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이젠 스스로 포기를 하고 합리화합니다.
시간의 흐름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30대 40대 기세 좋게 타오르던 횃불과 같은 모습이 어느새 재를 남기고 꺼져가는 불씨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젊음은 가버렸고 우리들의 힘은 완전히 소진되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 갈데가 없는 곳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꿈과 희망이 완전히 좌절되어 온기도 사라진 한줌의 재와 같은 모습이 된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9-10)

모세가 대답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1)

오늘 본문 23-25절입니다.
“23
여러 해 후에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이 때에에 하나님은 모세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모세는 이미 꿈도 희망도 패기와 정열도 사라진 의욕이 없는 80세 한 노인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겠습니까?”
겸손의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꿈과 희망이 완전히 좌절된 인간의 응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3-25절의 말씀은 인간의 꿈과 희망이 온기마저 사라진 한줌의 재가 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명되어 쓸모없어 보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제 그것은 시작입니다.
모든 희망과 꿈이 사라져버린 모세가 이제 하나님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고있습니다.
한때 그는 신식 학문과 언어와 능력과 열정과 자기헌신 모든 것을 갖추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젊은 시절 그의 꿈과 희망으로 다시 불러내고 계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과 경험에 의거해서 자를 재듯 계획하며 아직도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직도 내가 나를 이곳에 보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에 보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케 하셔야 이땅의 일시체류자들의 삶에 참된 성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주관케 하셔야 우리는 우리들의 꿈과 희망을 이루어 “여러 해 후에” 즉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들은 금의환향 행복한 귀국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삶을 맡긴 사람에게 모든 희망과 계획이 좌절되고 무너져 한줌의 재가된 그 절망을 하나님의 소망으로 바꾸는 은혜가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