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의 은혜

  • 한인 예배 (2003년 03월 23일)
  • 마 4:1-11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30323
통역: 남유정 교우
제목: 사순절의 은혜

<본문> 마 4, 1-11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의 초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교회 전통에 따르면 부활절 전에 오는 기간으로 40일 동안 계속됩니다.
이 전통의 기원은 오늘 우리의 설교 말씀을 통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로 떠나십니다.
자신의 의지로 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시험하는 자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시험들을 다 이겨내셨습니다.

광야는 성경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생활을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까지 광야를 떠돌아 다녔고, 그리고 그 광야에서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예수님도 새로운 대속의 길로서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구약의 이스라엘과는 다르게 광야에서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는 이 본문의 사건을 교회 전통으로 끌어와 사순절로 정하여 실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특히 개신교 인들은 이 사순절 기간을 너무나 의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기간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그렇다면 사순절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사순절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주는 자기 절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의 길이 아닙니다.
사순절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 의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순절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 분으로부터 (우리의) 사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예수님이 그렇게 행하고 계시며, 모세와 엘리야 또한 그렇게 행했습니다.
사순절은 즉,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순종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신 분은 성령입니다.
그것은 모든 시험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또는 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때에 따라  시험은 우리가 그 시험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시험은 마치 갈림길과 같은 것입니다. 그 갈림길에는 다음 길의 선로를 결정해주는 선로 변환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시험을 통과하느냐에 따라,  선로 변환기에서 길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도 있고,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시험은 빵에 대한 시험입니다.
단지 좋은 생활의 보장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빵이나 자신의 수입, 생활 수준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삶의 물질적인 보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소유는 우리 인생을 채우는 본질도, 우리 인생의 의미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것으로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려서도 안됩니다.
빵에 대한 시험은 순간을 위한 보장의 시험입니다.
미래에 대한 고려 없이 현재만을 보장하고자 하는 시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자리와, 그 인도하심 속의 희망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당연히 물어봐야만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당장에 원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나중에 원하겠습니까?
이러한 행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맡기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인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험에 지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시험입니다.
우리는 자주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왜 자신의 능력을 눈에 보이도록 나타내 주시지 않으실까?
하나님은 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지 않으실까?
우리는 시험 속에서 그렇게 주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이 어떻게 행하셔야 하는가를 규정할만한 아무런 권한도,  권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의  틀에 끼어 맞추지도 말고, 또 우리가 갖고 싶은 모습으로 그 분을 형상화 하지도 맙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솔함으로 그분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마지막 시험은 우리의 권세에 대한 시험입니다..
체코에는 사람이 자신을 악마에게 내어줄 때,  악마 또는 마귀가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약속해주는 많은 동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악마 또는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은 부정직하게 성공과 영광을, 부와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한정된 시간 동안에만 유효할 뿐입니다. 
그것은 전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악마는 아무것도 공짜로 주는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대가를 가져가기 위해 다시 옵니다.
그래서 권세와 영광의 시험은 사랑과, 진실, 정의,  그리고 정직한 수고 앞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최종 승리는 아닙니다.
마지막 결정은 바로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가십니다.
사탄과의 싸움을 앞에 두고 세례로 무장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세례 덕분에 시험을 성공적으로 견뎌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강력한 방패를 얻었습니다.
믿음은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 우리는 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무기를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 강력한 무기는 바로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40일 동안 시험을 이겨내시기 위해 광야로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일년 내내 광야 같은 시험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갈림길에 서서 선로 변환기가 결정하는 데로 길의 방향을 바꾸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그러한 상황의 인식을 위한 충분한 노력이 내 안에 있는지를 찾아보는 시간입니다.
갈림길에 서서 선로 변환기로부터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선로 변환기와 그에 따르는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에게 좀 덜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더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사순절은 곧,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보다는 하나님께 더 큰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요, 당연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에 우리가 가진 것들을, 또는 우리가 즐기는 것들을 절제할 수 있습니다. 
술과, 담배, 컴퓨터 게임, 소란한 놀이들, 맛좋은 음식 등을 절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부가적인 것인지를 인식하게 되는 길입니다.
우리 인생을 실질적으로 계속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겉으로만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의 고요함 속에 가장 기쁘고 가장 큰 보물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지탱하시며, 그 인생을 의미로 가득 채워주시는 전능하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절에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Amen

하나님의 계획

  • 한인 예배 (2003년 03월 16일)
  • 출 2:1-10
  • 설교자: 이종실

030316 사순절 둘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1-10
제목: 하나님의 계획

<본문>
1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3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7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설교>
단지 여행객이 아니라 삶의 근거를 찾으러 체코로 온 것은 누구나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부터 체코라는 나라를 생각하고 오신 분들은 그리 많지않았습니다.
나름대로 동기와 계기가 있어 기대하지 않게 체코로 오신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체코로 오게된것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섭리이다. 나름대로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일년 이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에 치이고 생존경쟁과 타문화 환경에 시달리면서 시기와 질투와 오해와 자기과시와 불만과 짜증스러움이 점점 많아지는 속 좁은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날에는, 도무지 자기보호의 성에 갇히고 그리고 이기적인 조그마한 자신의 동굴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삶이 정말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매일 살기에 급급하여 하나님에게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이 정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관련성이 있는가?
만약 관련성이 있다면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오늘 저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탄생이야기를 통해 그 대답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모세의 탄생이야기 안에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에서 나타났던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탄생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라기 보다 인간세상의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냥 일어난 일로서 나타난 것 처럼 그렇게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러나 모세의 탄생의 불과 몇 달밖에 되지않은 짧은 기간의 사건을 그 당시 그 시대의 순간으로 보면 불행과 행복을 교차하는 한
사람의 탄생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긴 역사의 여정에서 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욱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눈에는 한 인간의 불행과 행복이 교차하는 피 말리는 긴장이 감도는 순간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손길은 이미 모세탄생 이전부터 있었음을 이야기 전체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권속들이 애굽으로 이민을 와서 4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갔을 때였습니다.
야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창대해지자 그들의 인구 숫자를 억제하기위해 잔인한 학대는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부여하여 그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였습니다.
가공할 이와 같은 위협은 점점 더 두꺼워지는 먹구름처럼 밀려왔고 마침내 바로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 여든 살리라.” 명령하였습니다.

남자유아를 살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씨를 말려 민족의 미래를 없애버리려는 바로의 계획이었습니다.
민족주의와 외국인 증오로 자국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상 권력자들의 이와 같은 천인공노할 계획은 역사 이래로 지속되었습니다.
민족을 포로로 만들었던 바빌론의 시대가 그랬고 진정한 세상의 구원자요 왕이신 예수를 제거하기위한 헤롯의 유아학살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흑인을 노예로 삼고, 유태인을 학살하고, 인종을 청소하는 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표현을 담아낼 수 없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가 가득찬 시기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안하고 좋은 시대에 살기를 원합니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좋은 시대에 태어나길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태어나는 시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시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태어난 때를 때론 저주하고 때론 저항을 하고 때론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 안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라는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던 시대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힘들고 어두웠을 때였습니다.
슬픔과 탄식으로 가득찬 가장 암울한 시대를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으로 삼으시고 그때 미래의 희망,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

저와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습니까?
미래의 희망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시간이심을 믿으십시다.
나를 둘러싼 고난의 시간이 있습니까?
그것이 나를 둘러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징표임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특별한 곳이 아닌 한 작은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1-2절)은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이가 죽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석 달 동안 자신의 아이를 숨겨서 키웠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신앙의 후배들은 그것을 자녀에 대한 일반적인 부모의 본성으로 보지 않고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11:23)
이스라엘 신앙의 후배들은 모세의 부모의 행동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왕을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 해야 할 분을 두려워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 히브리 산파가 나옵니다.
하나는 십브라이고 다른 한사람은 부아입니다.
출애굽기 1장 17절에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그들은 진정한 통치자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지 바로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에 왕의 명령보다 생명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모세의 부모의 결정과 행동들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행위가 믿음에서 출발하였다고 주장하더라도 애굽 바로의 막대한 권력 앞에 노예에 불과한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권력을 전복시킬 힘도 없고 그렇다고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를 숨겼습니다.
아이를 숨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방책이었습니다.
석 달 후에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대책을 믿음이냐 인간의 본능이냐 분석하는 것은 관념적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모세도 없습니다!

석 달!
아이를 더 감출 수 없는 시간이 임박할수록 초조하게 이들의 머리 속에는 온통 1분 1초 아니 순간일지라도 아이의 보호를 더 연장할 방도를 찾느라 혼란스러웠습니다.

갈대상자를 바르고 역청과 송진을 발라 물이 스며들지않도록 하여 아이를 포대기로 잘 싸서 그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일강 강가로 가서 갈대 숲 사이에 상자를 두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넣어 나일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 어디에서 살던지 살아있기 만을 바라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아이를 흐르는 강물에 홀로 두고 떠나는 이들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않아 자꾸 뒤돌아봅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이를 지켜주시리라는 막연한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결정들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그들의 희망과 간구가 그들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믿음으로 모세를 낳았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장)

그 상황이 어떻게 발전합니까?
발걸음을 차마 돌리지 못하던 아기의 누이는 동생을 실은 갈대상자가 혹시 뒤집어지지는 않는지 아니면 물에 빠지지않는지 아니면 잘 떠내려 가는지 멀리서서 바라보고있었습니다.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딸아이를 부모들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강으로 오던 시간과 그들이 아이를 버린시간이 완전히 일치하였습니다.
유아살해의 명령을 내렸던 사람의 딸, 그 바로의 친딸이 왔습니다.
그 다음, 아직도 떠내려가지 못하고 빙글 빙글 제 자리를 돌며 갈대 숲에 놓여있던 바구니는 쉽게 공주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경우 수 가운데 최악의 경우였습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경우가 바로 이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원망과 한탄과 분노를 겪는 상황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억울하고 분을 삭일 수 없는 일들을 겪고 참다가 그 보다 더 한 일이 덮치면 그만 원망과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러나 비록 원망과 한탄과 분노를 하지만 그것에 넘어지지는 마십시다.
하나님은 가장 나쁜 상황을 자신의 목적으로 바꾸고 계심을 기억하십시다.

공주는 종들에게 바구니를 열어보게 하였습니다.
그 속에는 생후 3개월쯤 되어보이는 갓난아기가 울고있었습니다.

공주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불쌍히 여겨 말하기를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공주가 아이를 해칠 생각이 없는 것을 멀리서 본 아이의 누이가 지체하지 않고 공주에게 다가가 제안하였습니다.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먹이게 하리이까?”
공주는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누이가 데리고 온 사람은 아이의 친 어머니였습니다.
공주는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하였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에 대한 모세의 어머니의 반응에 대해 어떤 기록도 하지않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녀가 기뻐하고 있다면 불행이 행운으로 바뀐 들뜬 기쁨이 아니라 바로의 통치너머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기쁨과 전율일 것입니다.
 

바로의 딸은 “내 대신 아기에 젖을 먹이라.” 말하였습니다.
지금 모세의 친 어머니는 애굽 왕가의 자식을 양육하도록 부탁받고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의 삶이 상호 연관을 갖는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해야 됩니다.

지금 모세의 친어머니가 안고 있는 그 아이가 여러분의 아이라면, 여러분들은 그 아이를 어떻게 키우시겠습니까?
죽을 수 밖에 없는 노예의 자식에서 애굽 왕가의 자식으로 한 순간에 그 신분이 하늘과 땅만큼 뒤바뀐 그 자녀를 가슴에 안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이겠습니까?
애굽은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정치 경제 군사력으로 세계에 영향을 주는 미국과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영향을 주는 나라의 주류사회에서도 핵심주류의 사람으로 잘 키워 보겠다는 생각입니까?
아니면, 억압받고 고통을 겪고있는 노예들의 희망인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시겠다는 생각입니까?

그러나 그녀는 애굽의 왕가의 자녀로서 그 아이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노예의 신분인 히브리인으로 그를 키웠습니다.

모세는 후에 애굽의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1절을 읽어보시면 당시 그는 히브리인들을 자신의 동포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히브리인으로 살았습니다


브리기자는 모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자녀들의 교육과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다 생략하고 오늘 설교의 초점으로 바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만약 모세의 어머니가 단지 자신의 행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교회를 봉사로 섬기고 감사헌금과 십일조의 예물로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물론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드리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지 행복해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만 하고 그 사건이 자신의 책임과는 어떻게 관련을 갖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아마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관련해서 어떤 의식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믿음에 의한 인간의 책임이 일치되는 길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건에 대한 믿음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전에 그것을 스스로 발견하기 위해 믿음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의 특성을 오늘 본문은 감추어진 그림으로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의 딸, 바로의 공주가 물에서 건져낸 아이를 보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가족들은 원수에 대한 마음의 분노를 폭발하지않고 오히려 공주가 아이를 해하려 하지않는 불쌍한 마음, 선한 마음을 원수의 딸에게서 발견하였습니다.


약 이들이 “안돼! 우리를 이토록 못살게 구는 원수 애굽에게 동생을 넘기느니 차라리 우리들의 손으로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이
나아.” 이렇게 생각하였다면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원수일지라도 그로부터 선한 것을 발견하는 마음 그것이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의 책임 또한 눈뜨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의 책임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 우리들은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힘, 마음의 눈을 스스로 키워가야 함을 오늘 성경은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모세의 이름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성경을 읽는 저희들은 압니다.
바로의 딸이 모세를 물에서 건져낸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건져내신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히브리인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서
불행의 자리에서
죄악의 자리에서
멸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서 구원 받은 자의 충만한 기쁨과 희망과 전율의 체험이 사순절 둘째주일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들의 체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음의 궁극적 해결

  • 연합 예배 (2003년 04월 06일)
  • 요 11:17-44
  • 설교자: 이종실

030406ek 
Jan 11:17-44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죽음을 등에 업고 다닙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 가운데 죽음은 가장 잔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잊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날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처럼 죽음을 만납니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만연했던 그 당시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이 편히 쉴 몇 안 되는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고통이 이 집에 닥쳤습니다.
나사로는 치유할 수 없는 중병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었습니다.

어제까지 그들은 언제나 즐겁고 웃음이 있는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다음날 고통이 저 바닥까지 그들을 밀어떨어트렸습니다.
그들은 질병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한적이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들은 인간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장사된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갔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주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이에 마르다가 대답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가 말한 이 구절은 유대주의 특히 바리새인의 정통 교리였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에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나는 압니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녀는 하늘과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고있습니까?
마르다의 경우, 그녀의 고백이 도움이 되지않았습니다.
그녀가 했던 것 처럼 죽음 후에 일어난 것에 대한 일반적인 희망에 대한 교리를 아는 것이 그녀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직접 우리자신 또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의 현실이 닥쳤을 때 죽음 후의 문제에 대한 희미한 희망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대담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한 질문이 얼마나 굉장한가!
주님은 그녀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였을 때 그녀가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 예수님이 그녀에게한 질문입니다.
그는 그녀가 단지 도식화된 진리를 믿느냐 아니냐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교리를 그녀가 믿는지에 대한 질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그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했을 때 그를 믿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마르다는 그 질문에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마리아가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녀는 예수를 보자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마르다가 한 말을 똑같이 하고 그리고 울었습니다.
그 주위의 사람 모두도 통곡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보았을 때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주님은 분노와 흥분을 느꼇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눈으로 거칠고 무서운 협박하고 맹렬히 ㅅ람의 생명을 깊은 슬픔으로 몰고가는 죽음의 힘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는 흥분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단지 나사로를 사랑하기때문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비참한 인간의 상황 때문에 슬퍼하셨습니다.

자신의 슬픔과 한숨에서 사람은 슬픔과 눈물을 함께 흘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나를 믿느냐”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들에게 부드럽게 묻고계십니다.
우리가 필요로하는 것은 교리나 규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덤 앞으로 걸어가/ 섰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돌을 옮겼을 때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은 무덤안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 나사로가 손과 발을 베로 동인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주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것 즉 메시지입니다.

나사로와 그의 집은 죽음의 세력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나사로와 그의 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단지 육체적 죽음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고생, 병들고 늙고 결국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보다 더 깊은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죽었던 여러분”은 짧은 표현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미하는 그런 의미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록 살아있지만 죽었던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관계 다시말씀드려 생명의 근원이 없기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없다면 육체적인 죽음이전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생애 어디에도 희망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의 슬픔과 절망이 있다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영적으로 죽은것입니다.

무덤의 나사로는 분명히 인간의 상황을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기에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고 그리고 귀한 삶의 시간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명의 근원을 스스로 잘라버리고 자신의 존재의 귀함을 상실하고 생명의 불꽃을 상실합니다.
죽은 물고기처럼 파도에 따라 움직이듯, 그들은 세상의 악의 세력에 의해 끌려다니고 욕심에 의해 조종당하고 그리고 생명의 그릇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지않고 미움과 속임으로 살아갑니다.
마르다는 말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되어 시체가 부패되고 악취가 났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은혜로 받은 풍성한 생명을 상실하고, 청결함이 한조각도 없게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부패하고 썩는 냄새가 나서 시체가 된 나사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음성이 무덤안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사로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사로가 무덤의 흔적을 지닌채 나왔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 이 부름은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여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유대 종교적인 권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3절에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주님은 무덤으로부터 나사로를 불러내고 자신의 생명을 바꾸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에서 불러내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오늘날 이 세상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커다란 음성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의 실천을 통하여 무덤 안에 있는 아직도 죄의 냄새와 죽음이 가득찬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무덤 밖에서 큰소리로 부르십니다. “너의 무덤으로부터 나오라”
무덤안은 저와 여러분들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무덤으로부터 나아갑시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무덤을 떠나 예수께 나아올 때 우리들은 살것입니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살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 우리들은 영생의 삶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궁극적 해결이 있습니다. (아멘)

좌절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

  • 한인 예배 (2003년 02월 23일)
  • 눅 8:4-15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30223
다빗 유레흐(통역: 남유정)
본문: 누가복음 8:4-15
제목: 좌절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

<본문>
제 8 장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설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기 위해 밭으로 나갔습니다.
밭은 씨 뿌리기 위해 특별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수확 후에  그냥  놀려두거나  아니면 그저 갈아 놓기만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11월이나 12월에 씨 뿌리기가 행해졌는데, 씨를 뿌리고 난 다음에도 계속 밭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또,  씨 뿌리는 사람 바로 뒤로 밭을 가는 사람이 따라가 뿌린 씨를 새들이 쪼아먹지 못하도록 곧바로 덮어주었습니다.
떨어진 씨는 어떤 밭으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운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매번 씨 뿌릴 때마다 여러 가지 운명으로 씨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4가지 종류의 밭으로 떨어지는 씨앗의 비유가 나오는데, 뿌려진 씨가 또한 4종류의 밭으로 1/4씩 똑같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씨를 뿌리고 나서  우리는 그 결과를 금방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씨가 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밭에 뿌려진 씨는 이미 보이지않게 자라나고 있으며, 다 자란 후에는 풍성한 열매를 기다립니다.
 
첫번째 씨들은 길가 또는 길 위로 떨어졌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밭에 그 밭을 가로지르는 작은 길들이 나 있었는데, 씨를 뿌릴 때 씨들이 쉽게 그 위로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밭들이 바로 옆에 서로 붙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밭 옆에 길이 있는 한  이러한 상황은 항상 반복될 것입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는  발에 밟히거나 새에게 쪼아 먹히는 운명이었습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들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죽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씨들도 더 나은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는 밭에는 바위가 매우 많고, 그 위로 곳곳에 얇은 흙이 덮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얇고, 또 낮 동안 뜨겁게 가열된 흙 속에서 씨앗은 밤이슬과 함께 빨리 자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씨는 땅속으로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 얇은 땅에  겨우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없었지만  씨는 높게 위로라도 자라났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빠른 성장은 강렬한 태양 빛에 금방 멈춰 버리고 말았습니다.
강렬한 팔레스타인의 태양 빛이 그 싹을 태워버렸습니다. 얇은 흙 속에는 싹에게 필요한 충분한 수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씨가 시든 원인은 싹이 강렬한 태양빛에 견딜 만한 충분한 수분을 빨아들일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한 밭에 있었습니다.

세 번째  씨들은 가시덤불이 있는 밭으로 떨어졌습니다.
가시덤불은 떨어진 밀의 씨와 함께 크게 자라났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밭에는 그야말로 어디에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었고, 그것을 없앤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가시덤불의 기운은 밀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밀이 자라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세 번째 씨들은 가시덤불 보다 더 느리게 자라났고, 결국엔 가시덤불에 의해 죽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마 이러한 씨는 분명 길 가나, 바위 , 또는 가시덤불 밭에 떨어진 씨보다 더 많았을 것입니다.
더 많지않았다 할지라도, 결과는 아주 좋았습니다.
좋은 땅에서 씨는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좋은 밭에서의 백배의 결실은 불모의 땅에 떨어졌던 처음 세가지 씨들의 손실을 다 보상해줍니다.
그것은 나쁜 땅의 메마름에 대한 좋은 땅의 풍성함의 승리입니다.
씨가 자라나 열매를 맺은 그 곳에 또한 씨와 땅의 사명도 충만케 이루어졌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백배의 결실도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성공에 대해서는 짧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실패에 대한 긴 묘사에 비해 성공에 대한  것은 눈에 띌 정도로 짧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실패가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어떠한 포기도 느낄 수 없습니다.
성공의 결실은 모든 손실을 극복해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영접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뿌리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들 편에서 보면 예수님에 대한 배척과 이해의 부족은 첫 눈에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이 널리 전파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속에 나타난 씨 뿌리는 사람과 같은 비슷한 실패를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셨고, 그로부터 예수님은 현실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갖게 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많은 일시적인 실패는 최종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비유말씀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비유에 대한 의미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며 그의 말씀을 영접하는 자들은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열쇠를 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에 대한 이해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비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옳지않게 받아들여진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신실한 사람들 안에서 옳게 받아들여진 말씀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인한 손실까지도 보상해주는 풍성한 열매가 있게 합니다.
4종류의 밭이 있다는 것은, 마땅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밭 옆에 그 손실까지 넘치게 보상해주는 좋은 밭이 늘 함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일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유의 제목을 `네 가지 밭에 관한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씨의 성장은 무엇보다 밭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말씀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올바른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야 하며 그 말씀 위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직접 말씀을 전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자신의 의지에 반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말씀 성장을 막는 다양한 장애물들을 둘 때, 말씀이 역사하는 것을 막는 것은 언제나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첫 번째 씨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중에 사탄이 와서  그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말씀을 깨달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곧바로 이해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룰 시간이 없습니다.

두 번째 씨들은 하나님 말씀을 기쁘게 , 또 기꺼이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자세는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시련과 시험이 닥쳐올  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충분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고난과 아픔은 유혹으로 변하고, 그들은 그 유혹에 종속되게 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 그러한가 하는 충분한 근거와 깊은 묵상 없이 겉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빠르게 말씀을 받아들인 것처럼 빠르게 말씀을 또한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인내함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로서, 그들의 믿음은 시련의 때에도 매우 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러나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것들에 대해, 또는 말씀을 거스르는 것들에 대해 큰 열정을 쏟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 걱정과 재물, 인생의 향락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걱정, 재물, 인생의 향락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주의와 관심을 빼앗아 가며,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가로막히게 합니다.
이렇게, 성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사람은 그렇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파괴됩니다.
사람  속에 있는 내면의 갈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게 합니다. 

네 번째 씨들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받아들여지고 올바른 결실을 맺게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인내가 아름다운 결실로 인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사렛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실현됩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요, 그의 씨는 예수님께서 전파하시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의 씨,  은혜의 말씀의 씨를 뿌리십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직접 말씀하시고 행하십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씨 뿌리는 자의 일, 즉 그리스도의 일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뿌려진 씨 중에 많은 것들이 쓸모 없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희망이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씨들이 몇 갑절의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결실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 말씀의 선교 사명으로 부르고 있으며, 또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은 이 세상에서 100%의 성공을 거두고 있지 못합니다.
항상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좋은 결실을 맺을 사람들 또한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속은 결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전파의 사명으로부터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말씀의 전파를 올바르게 영접하는 몇 명의 사람들에게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4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떤 부류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들 입니까?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좋은 결실을 맺고 있습니까?

아멘.

바울의 선교

  • 한인 예배 (2003년 02월 16일)
  • 행 13:13-43
  • 설교자: 이종실

030216

사도행전 13장 13-43절

바울의 선교

<본문>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2 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설교>

사도 바울은 살아 생전에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구브로, 바보, 버가와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거쳐 다시 처음 출발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여정가운데 있었던 전도여행입니다.

개역성경에 구브로라는 섬은 오늘날 키프러스 섬을 말합니다.

키프러스 섬에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살고있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직함은 총독이었습니다.

총독은 그 당시 로마로부터 지역통치를 위임 받은 사람입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이 사도 바울을 만나 회심을 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키프러스는 기독교인에 의해 통치된 첫번째 지역으로 역사에 기록되고있습니다.

총독의 회심으로 키프러스에서 이제 막 생겨난 어린교회는 박해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았고 그래서 복음을 넓게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일행은 날마다 성장해 가는 키프러스의 교회를 뒤로하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의 남쪽해안(지금의 터어키 남쪽해안)으로 건너와 거기서 육로를 이용해서 버가로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버가에서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산을 넘어 내륙을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곧장 안디옥에 도착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도착한 14절의 안디옥과 1절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안수하여 전도여행을 떠나보낸 교회가 있던 안디옥은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다른 도시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비시디아의 안디옥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 일행은 키프러스의 경우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러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빈 자리에 앉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혼란을 겪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던 그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이에 유대교 회당과 유대 기독교인들의 신앙공동체와 이방 기독교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혼재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경계선을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선교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사도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일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는 자기 종교, 자기 교파를 위해 절대 맹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새 역사의 증인이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찾아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렸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교회들간의 경쟁과 교파교회로 분열되는 유럽의 한인교회들의 경험은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의 동기와 목표가 진심으로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회당을 찾아가 안식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평상시 대로 예식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예배의 첫번째 순서는 신앙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으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이스라엘인들의 신앙고백을 쉐마라고 합니다.

신앙고백이 끝나면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을 큰 소리로 낭독합니다.

그리고 성경낭독이 끝나면 유대 남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권면의 말씀을 하도록 부탁을 받게 됩니다.

오늘 예배의 권면의 말씀을 위해 회당장은 바울 일행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특별히 바울과 바나바가 여행객으로 낯선 사람들이어서 랍비의 눈에 띄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서 온 여행객 바울에게 오늘 예배의 권면의 말씀을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의 회당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새 역사에 대해 증언할 기회를 갖게된 것입니다.

바울의 증언의 내용은 16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러분, 나의 말을 들으십시오.”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예배에 참석한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라고 불렀고,
안식일을 지키지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러분”하고 불러 참석자 모두를 설교에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바울이 예배 드린 유대인의 회당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민족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민족이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들을 큰 민족으로 높여 주시고,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17절)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를 감동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출애굽, 사사시대, 왕국시대와 다윗의 왕 즉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 역사가 지금 설교를 듣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차별과 소외감을 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역사는 무엇보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도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 만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상관이 없는 그의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거론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구주를 세워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으니, 그가 곧 예수입니다.”(23절)

이 한 줄의 말씀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싶은 두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자가 이미 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청중인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성경의 상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그들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끄셨고 어떻게 구원의 역사의 한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는지 설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포함하는 구약의 말씀은 물론이거니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와 더불어 나사렛 예수가 오실 메시야였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들은 분명히 이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27절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말도 깨닫지 못해서, 그를 정죄함으로써, 예언자들의 말을 그대로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 일상생활처럼 된 유대인들이 그 말씀을 지나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자들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완전히 반대로 말했습니다.

그가 메시아였기에 그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선교는 선교의 대상을 믿는 우리 자신들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해 하나님을 늘 배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뽑혀서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일을 그렇게도 많이 겪어본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된 메시아를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생겨난 교회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를 예로 그것을 우리들에게 적용시켜 설명해 본다면, 오늘 하나님께 먼저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아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잘 알고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는 기독교회들과
기독교인들로 이해를 해도 틀리지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존적인 질문을 스스로 해야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있는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책임을 맡은 사도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일꾼입니까?

아니면, 그러 한 종, 일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죄인들입니까?

아니면, 어떨 때 는 이렇고 어떨 때는 저런 사람들입니까?

우리들은 이중적이고 모순된 실존으로 살아갑니다.

늘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그러한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있습니다.

오늘 본문 38-39절에서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어떤 일에 있어서도 결코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를 힘입어서 의롭게 됩니다.” 라고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증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자기 자신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실존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죄인 가운데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시고 신실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자기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발견과 동시에 다가온 이 두가지 새로운 깨달음은 그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가 생명을 구원하는 사도로 바뀌어 졌습니다.

자기 종파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율법으로 자기 의를 구축하는 삶이 은혜 안에서 그 은혜에 응답해 가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가 지금까지 쌓았던 세상의 지식과 경험과 지위와 명예를 배설물로 여기고 오히려 자신의 깨어지기 쉬운 이중적이고 모순된 자신의 연약함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오히려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 받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음을 날마다 체험해갔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에서 예배 참석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호칭에 변화가 있음을 여러분들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 여러분”이라고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구분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를 힘입어 의롭게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죽었고 죄 용서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오직 믿는 사람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죄 용서로 구원 받았고 죄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모세의 율법으로 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차별이 더 이상 중요성이 없어졌습니다.

오직 우리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한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 믿음의 문제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믿고 그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은 곧 그 은혜에 대해 응답하는 삶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믿음으로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오늘 본문 41절에서 하바국 1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고 망하여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할 터인데, 그 일을 누가 너희에게 말하여 줄지라도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않을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41절)

태양이 비치지만 빛을 거부하고 문을 닫고있으면 우리들에게 어둠만이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게 되고 스스로 빛이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은 참된 행복과 삶의 충족감을 맛보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실존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않는 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배 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43절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은 은혜를 간직하고 붙잡으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이 기독교인으로서 오고 가는 짧은 만남 속에 교회로 모이는 그 만남 자체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교회로 모이면서 세상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