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희망

  • 한인 예배 (2002년 04월 14일)
  • 히 13:20-21
  • 설교자: 정미현

02.04.14 부활절후 두번째주일
설교자 정미현 목사
본문: 히브리서: 13: 20-21
제목: 끊임없는 희망
장소: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

<성경본문>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설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케 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아름다운 주일에 제 스승이신 로흐만(Lochman) 교수의 80회 생신 기념회가 있는 그 분의 고국에 올 수 있게 되었고 또 여러분과 함께 본문말씀을 나눌 수 있는 이러한 자리가 허락되어 감격스럽고, 감사하고 기쁩니다.


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역사라는 단어는 영어로 history입니다. 미국 여성신학자들이 이 단어를 해석하는 것에 의하면 역사란
남성들의 이야기( he-story) 였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남성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여성들의 이야기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도 이와는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여성들도 교회안에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였고 헌신적으로 일하였으나 여성들의 이야기는 많이 전하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중세기에 살았던 한 여성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이 여성의 이름은 노르비취의 줄리안이며, 14세기 영국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에도 흑사병이 심하게 퍼져 있었고, 전쟁과 기아가 만연한 시기였습니다.
이로인하여 심한 절망감이 사람들 사이에 지배하였는데, 이러한 어려운 고난의 상황 속에서 줄리안은 신비주의적 은둔가로 영국의 노르비취 라는 곳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희망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많이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1373년 5월에 그녀는 심한 병을 앓게 되고 난 뒤에 특별한 환상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 권의 책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첫 번 책은 짧고 간결한 반면에 두 번째 책은 자신의 체험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적고, 이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두 권의 책 전체에 나오는 중요한 내용은 다름아닌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머니로 표현한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줄리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운 어머니로 묘사하고, 이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자궁 속에서 키워내고, 심한 고통가운데 출산하고 젖을 먹여 키우듯이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가 어머니와 같이 커다란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성서본문에도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중심에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초대교회 시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태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상황가운데 이들이 신앙 안에서 굳건히 서도록 권면하는 글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부활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운 삶의 근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줍니다.

우리가 격게되는 크고 작은 고난의 문제들에서 우리가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희망의 근원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고난과 악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믿음가운데 살 수 있고,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질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희망하는 믿음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금의 우리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매순간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지금의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서두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다리며 서두르며!

이러한 기다림과 서두름의 긴장관계 속에서 줄리안은 그녀의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All schall be well. All manner schall be well.”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풀려 나갈 것입니다.

이 문장이 너무 낭만적으로 들리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이 문장은 전혀 낭만적이거나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희망을 가득 품고 있는 이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잘 될 것이라는 뜻일까요?
이것은 한편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가운데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개인적, 사회적 악의 문제에 굴복하지 말고 고난의 상황을 이겨나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어딘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보태야 한다거나, 십자가를 대신 짊어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그분의 십자가의 사건은 유일회적이며 온 시간 속에 펴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제물이 될 수 없고, 단지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 존재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가까이 있는 또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하며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상황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며, 서로 서로 희망을 불러넣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을 줄리안은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전쟁과 가난과 질병이 만연한 시기에 주변에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안하였고 삶의 용기를 불러 넣어 주었습니다.
이 말은 결코 값싼 심리적 위안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 말을 되내이곤 하는데 그러면 새 힘을 얻곤 합니다.
물론 이 말이 어떤 주술적 힘을 지닌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우리도 바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을 단지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의 상황에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세상의 삶 가운데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고난의 상황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 상황 가운데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항상 중요하고도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싸구려의 희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인 용어를 써서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도래한다는 것에 대한 희망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발을 디디고 계신 바로 이 나라는 체코의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고백하며 악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였기 때문에 산 채로 화형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용기 있는 믿음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후스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궁극적 희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설교 본문말씀에 기록되어 있듯이 영원한 언약의 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로 이끄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떠한 순간에라도 어려움 가운데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상황으로부터 우리가 빗겨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난은 항상 우리 삶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은 나락속으로 떨어진다 할 지라도 우리는 걱정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스스로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나락으로 떨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붙들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과 믿음 가운데 어떠한 순간에도 절망함 없이 이국 땅에서의 여러분들의 삶이 날마다 더욱 풍요로와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믿는 자가 되라

  • 연합 예배 (2002년 04월 07일)
  • 요 20:19-31
  • 설교자: 이종실

02년 04월 07일 (부활주일)
설교본문: 요한복음 20장 19-31절
설교제목: 믿는 자가 되라

<본문>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설교>

우리들은 “의심 많은 도마”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가 부활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를 본 것을 그에게 말했을 때 ”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도마는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한 주일 후 제자들은 함께 다시 모였을 때 이때 도마는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갑자기 예수가 나타나 도마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의심 많은 도마 이야기의 난해한 부분입니다.
예수가 도마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준 후 그는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믿지않은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여기서 체코어 성경 번역과 한국어 성경번역에 차이점을 발견할 수있습니다.
체코어로 Nepochybuj a ver! (직역하면 의심하지 말라, 그리고 믿어라!)
한국어 성경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말씀을 직접 체코어로 바꾸어 보면 (Nestan se nevericim, ale vericim.)

제 생각에 의심 많은 도마는 헬라어 본문의 잘못된 오역입니다.
의심하는 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무언가 잘못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 질문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과 같고 반신반의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믿음에 대한 설명은 어느날 도움을 위해 예수에게 온 어떤 사람의 말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말했습니다. ”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개역한글판 막 9:24)”
믿는 것과 아직 믿음 없음이 동시에 가능합니다.
믿음 없음은 믿음의 진실함을 유지하는 믿음의 요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자신의 책 믿음의 역동성에서 낡은 믿음은 죽어야 하고 믿지않은 것에 의해 먹혀 사라져야 새롭고 더 깊은 믿음이 탄생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예수는 도마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에게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믿지않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믿음 없음이 주님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그늘지게 하지않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가 도마에게 나타나자 그가 즉시 믿게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마가 믿게 된 이유는 정확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를 보는 것이 그가 믿게 된 이유라는 주장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상처를 직접 보고 예수가 도마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확신한 도마는 그를 믿게 됩니다

도마가 제자들의 친교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주장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그들 모두가 믿었다면 그 역시 믿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그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도마가 믿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는 무언가 불충분하게 느껴집니다.
진짜 대답은 그 본문 그 자체에 있습니다.
도마가 있지않았을 때 예수가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숨을 쉬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버지는 나를 보냈고 나는 너희들을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말씀하셨습니다.
도마가 믿게 된 이유가 이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들이 성령에 의해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도록 보냄을 받게 될 것이라는 명령과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증언에서 성령은 도마에게 믿음의 씨앗을 심었고 다음 일요일에 그 씨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도마가 믿게 된 이유는 성령이 다른 제자들의 인간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에게 믿음을 창조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 의도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 것이며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과 다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기독교 믿음을 잘못이해하고 있었다면 이 부활의 계절에 바른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기 시작할 때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나의 힘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힘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 한마디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고백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신것입니다.

우리의 간증, 우리의 기도, 우리의 예배와 성만찬, 우리의 모든 봉사가 믿음을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에 의해 창조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버릴 수도 그리고 다시 생기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믿음을 창조하는 활동을 하시도록 두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주위에 다시 모여드는 시간이 아닙니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으로서 우리들에게 오시는 때입니다.

부활절은 우리들의 기운 빠진 믿음을 다시 기운 넘치게 하는 기회로 삼는 절기가 아닙니다.

부활절은 성령이 세상 안에서 믿음을 새롭게 하게하는 수단을 교회가 제공하는 때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우리의 의심을 버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부활절은 성령이 우리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믿음을 세우는  절기입니다. 아멘

기억하라

  • 연합 예배 (2002년 03월 31일)
  • 눅 24:1-12
  • 설교자: 이종실

2002년 3월 31일 부활절
누가복음  24:1-12

우리는 기억의 피조물입니다.
현재에 우리는 과거의 일로 기억을 만듭니다.
이삭 디네슨이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에서의 그녀의 삶에 대해 썻습니??그녀는 농장이 불타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자 덴마크로 돌아와 아프리카의 삶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회고록을 썻습니??
그녀의 회고록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에서 그녀는 과거에 대해 쓴 것만이 아니라 미래를 숙고하였습니다.
그녀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내가 아프리카의 노래를 안다면 아프리카는 나의 노래를 알게될까?”

우리는 기억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이삭 디네슨은 기억은 미래와 함께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묻습니다. 아프리카가 나의 노래를 알까?
기억은 단지 과거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래입니다.
오늘은 기억하는 날입니다. 현재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은 오랜 옛날 내용의 기억의 날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온전한 구조는 기억 위에 세워집니다.
모든 경우에 기억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미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 우리 주의 어머니 마리아의 예언을 들어보십시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눅1:54-55)
예수의 삼촌 사가랴의 예언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눅 1:72)

우리가 기억하는 그것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열쇠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기억의 내용이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움만을 기억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단지 실패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우리가 저질른 헛된것들 뿐이라면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기억할 만한 중요한 것이 있지않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기억들도 우리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 선언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떤 것을 중요하게 기억할 수 있는 선물을 주신것임을 배웠습니다.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약속의 계시 안에서 다가옵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자와 연대 안에 있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약속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는 사람들과 세상의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누구인지 기억하도록 초청하기 위해 왔습니다.


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어떤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어떤사람들은 그것을 잊어버렸고 어떤사람들은 불쾌하였고 심지어 어떤사람은 그의 설교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긴장 안에 오래 전에 선과 악 평화와 혼돈 거룩함과 죄 사이의 투쟁은 명백하였습니다.
복음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성공의 길이 아님을 추종자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훈련의 용기와 충성의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정의를 요구하시고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네 차례에 걸쳐 그는 권력자의 손에 넘겨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아 잘못되게 비난받고 판결을 받고 고문을 당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슬프고 비참한 최후 뒤에 제자들은 심지어 세상이 알고있던 가장 큰 의문에 직면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빈무덤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6절)
그리고 명령을 합니다. 기억하라(6절)
갈릴리에 계실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6-7절)
예수의 추종자들은 기억을 떠올립니다.
다시 한번 미래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그들 앞에 열렸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갑자기 완전한 상실로서 제자들에게 나타난덨 것이 위대한 반전으로 바뀐 것이다.
예수의 설교와 가르침 그의 사랑의 사역은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예수의 설교와 가르침과 사역은 일관되었습니다.
부활은 예수의 삶이 하나님에게 충성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충성은 인간들의 비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기억 안에서 우리는 구원에 초대받았습니다.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기억 안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의 날에 우리들은 예수의 고난에 우리가 동참하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우리는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들에 관해서 가장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노력을 버리고 서로가 돌보도록 변화되기를 요청하십니다.
죽은 자에게서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이 우리들 역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에 대한 노래를 안다면
그의 생명의 희생에 대한 노래를 안다면
소외된자 죄인들과 먹으신 것을 안다면
죽음을 받아들인 것을 안다면
죽음으로부터 그의 부활을 안다면
예수는 우리들에 대한 노래를 아실까?
하나님이 창조한 우리의 연약한 육신이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을 위해 갖고 계신 끝없는 사랑의 그 무엇을 알까?
상실과 부정의와 질병에 고통받은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고통의 눈물을 평화의 웃음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위로를 우리는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기억해야하고 미래를 기억해야하고 우리들의 미래를 기억해야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것입니다. 아멘

개방적인 교회

  • 한인 예배 (2002년 03월 10일)
  • 눅 9:43-50
  • 설교자: 이종실

02/03/10(사순절 넷째주일)
본문: 누가복음 9: 43-50
제목: 개방적인 교회

<공동기도>
이 세상에 교회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장벽을 넘어가신 주님처럼
세상의 장벽을 허무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쫒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설교>
오늘
네번째 사순절 주일을 우리들은 지키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들의 생각을 부활절로 향하게 합니다. 이 절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있는지 우리들은 생각해야만 합니다. 매년 사순절이 되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큰 주제의
흐름아래 언제나 약간의 다른 모티브를 가지고 매 주일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세상 속에서
교회의 모습과 위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지않지만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조그마한 신앙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본문 속에서  우리들은 교회와 관련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 우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여정의 마지막인 그리고 자신의 여정과 밀접하게 관련된 고난을 예고하고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필요와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리고 제자들은 이 말씀을 묻는 것 조차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들은 직접적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모습과 그 위치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지않습니다. 그 질문이 드러나고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
특별한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의미를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우리들은 자신들의 위치와 사명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사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오늘 우리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주제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이 자신의 말씀과 자신의 모든 사역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 하지 못한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들이 우리 교회 공동체의 과제와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삶과 그의 삶의 의미를 우리 각자와 모든 신자들의 삶
속에서 따르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논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분명히 그들의 논쟁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자신들의 혼돈을 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라미드 사회조직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자신의 말은 자신의 사명의
의미와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신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더구나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필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피라미드
사회조직의 최고봉을 차지하기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생각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셨습니다.”  생산성 있는 남성들만 인구수로 계산하던 당시의 풍습에서 생산성 없는 어린아이는 피라미드 사회조직의 가장 밑바닥 즉
가장 작은 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에큐메니칼 예배가 마친 후 체코교우들은 삼삼 오오 모여 저의
설교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다음날 들었습니다. 저의 설교가 선동적이라고 비판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연히 화요일에 교회에
온 체코교우들 몇 분들을 만나자 그 분들이 저의 주일 설교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체코교우들이 선동적이었다고 느낀 것은 기독교 문화의 차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설교가들의 설교와 체코 설교가들의 설교의
차이점을 조목 조목 들어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설교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였습니다. 성전 안에서 짐승을 팔고 환전을
하도록 허락한 대제사장의 일과 장사하는 사람들의 일은 모두 유월절과 교회를 위한 명분이었지만 교회를 위하는 그 관심의 동기와
모티브가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이었기에 예수님이 공분을 해서 그들을 성전에서 내어쫒았던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의 입장에서 성전
안에서 그 분이 하셔야 되는 일이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일들은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궁극적인 관심이 곧 자기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명분을 벗기고 보면 그 일을 하는 이유가 곧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관심과 우리들의 일이 동시에 우리 자신들을 형성시켜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개인의 삶은 교회 공동체의 삶에도 적용이 됩니다.

금 예수님은 우리들을 바르게 형성시킬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의 진정한 가치가 숨겨진 일을 우리들 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곁에 서있는 어린아이 입니다. 그래서 이 어린아이는 제자들의 생각과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됩니다.


수님이 교회의 모습과 그것을 발전 시키는 방법이 설명된 지침서를 우리들 손에 들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시각이
자신을 향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늘 회개하고 우리의 믿음의 근본과 뿌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방법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어린아이를 보면서 세상의 가치관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생각과
부끄러웠던 관심과 부끄러웠던 우리들의 가치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우리들의 희망은 우리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언제나 창조
주앞에 피조물인 우리들의 소속과 세상에 휩쓸려 있는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원점에 설수 있는 용기입니다.


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그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권면 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가장 연약한자 힘없는 자 도움이 필요한자 가장 작은 자를 상징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자를 영접하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 우리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가장 큰 지위와 사회의 위치를 하나님은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죄인과
연약한 자들을 바라보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들 가운데 우리들이 지금 원하고 바라고 우리들의 모범이 되는 그 교회 –
초대교회가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가장 연약한 것, 약한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들 위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교회가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찮고 나약한 이들의 희생 위에 교회가 서있다는 의미입니다.

래서 “너희 모든 사람 속에 가장 작은 이가 큰 자니라”라고 오늘 누가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약하고 작은 자들이 수모와 자기
고통을 봉헌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샘이 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말씀입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아름다운 교회는 그 아름다움 속에 하나님의 어린양과 동일시
되는 희생의 어린양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나약하고 작은자들이 교회의 존재 근거가 된다는 것은
동시에 교회가 교회 밖의 그들을 영접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둘 중의 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정지하는 법이
없습니다. 체코교회는 소수파로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봉사단체인 디아코니아를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는 법안이 통과된지
얼마되지않아 어제 신문에 문교부가 기독교학교에 대해 재정 지원중단을 정부에 요청하였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학교의 폐교를
의미합니다. 정부의 결정에 교회의 존립자체가 흔들릴 만큼 체코교회는 약하여 그들은 세상에 대해 위축이 되어 점점 폐쇄적인 모습을
갖게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해외에서 복잡한 인간관계에 피곤증을 느끼고, 점점 편안해 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과 단절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에 대해 개방적이 되거나 아니면 폐쇄되어 영적으로 시들어 버리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개방성을 갖는다는 의미를 오늘 본문 49절과 50절에서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49절과 50절에서 주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예수를 따르지 않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쫒는 데도 예수를 따르지 않기에 주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자들이 조처를 취한 이야기입니다. 주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처한 제자의 이유를 자세히 보면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
서 우리들은 폐쇄적인 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폐쇄적인 교회란 물리적으로 교회대문에 빗장을 걸어 잠근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워져 있고 거주하고 있는 세상으로, 밖으로 향하는 시각이 없는 교회가 폐쇄적인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갇혀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한 믿음 한 신앙고백 공동체의 좁은 테두리에 갇혀
살아서는 안됩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벽을 허물고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히려 벽을 세우는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과 삶의 나눔”이란 작은 제목으로 나눔터가 발행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목회를 시작하기 전부터 뜻 있는 젊은 분들과 시작한 일입니다. 같이 시작한 분들 가운데는 종교를 달리하는 분도 계셨고 종교가 없는 분도 계셨습니다.

분들은 믿음과 삶이란 이 용어에 거부감을 갖지않았습니다. 그 취지에 동의하고 다른 모든 것을 존중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과 목회를
시작하면서 나눔터 발간 비용을 교회에서 지출하자는 의견이 나오면서 교우들 가운데 나눔터에 믿음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니 그 부분을
더욱 강화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토론을 멈쳤습니다. 신앙이라는 울타리 안에다 교회의 일을 국한 시키는 것은 나눔터의 취지뿐 아니라 저의 목회 철학에도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작
년에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저희 교회를 방문할 때 함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마 한국에 대형교회 목회자들 모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김삼환 목사님이 불우한 소년 소녀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대형교회들이 힘을 모아 대규모 학사를 시내에
짓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다른 분들이 복음 전도하는 데 교회는 힘을 써야 된다고 반대를 해서 – 대형교회들이 그렇게 하면 복음의
열매를 우리들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다른 모든 한국 교회들이 다 거두게 된다고 설득을 한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우리 교회들은 전도를 좀 더 넓은 뜻으로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도는 세상을
살리는 일입니다. 세상을 살린다고 할 때 이는 사람들의 영혼만을 살린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는 사람들이 먹고 입고
일하고 놀고 살아가는 것 모든 것이 제대로 되도록 하는 것도 세상을 살리는 일에 들어갑니다. 우리교회가 교인 한 사람 더 늘어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이 체코사회에, 체코의 한인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더욱
안타깝고 부끄럽게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기독교인에게도 신앙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햇빛과 비를 고루 내려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인 우리들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복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일에 폭 넓게 관심을 갖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작은 자 안에 감추어진 신앙의
신비를 깨닫는 이 사순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작은 자 안에 감추어진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는 우리 교회가 되십시다. 나 자신 안에
우리 교회 안에 장벽을 부수고 마음의 터를 넓히는 이 사순절이 되십시다.
세상의 고통과 기쁨을 발견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습니다.

<설교 후 기도>

님의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태하고 게으르고 그리고 진실한 마음도 긴장감도 없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 서로가
서로를 밟고 서려는 병든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아첨하고 더 간사하고 더
악한 삶을 살다가 교회에 오면 신앙의 벽을 높이 쌓아 신앙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우리들의 이중성을 이 시간 고백합니다.
우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부터 하나님의 어린양과 같은 희생의 삶, 사랑의 삶, 관용의 삶,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예수님의 일, 우리의 일

  • 연합 예배 (2002년 03월 03일)
  • 요 2:13-22
  • 설교자: 이종실

02/03/03(사순절 세번째주일)
본문: 요한복음 2:13-22


늘 복음서는 엄격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청결 이야기 입니다. 요한복음에 그 성전청결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첫번째 여행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대절기인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가셨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유월절 축제를 통해 매년 자신의 백성을 구원한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기억하고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갈 때 성전 뜰이 상업지역으로 바뀐 것을 보았습니다.


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던 그날 축제의 찬송을 부르며 경건하게 성전으로 들어갈 수 가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장사꾼들의 임시로
지은 조그마한 판매건물과 가판대 사이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장터는 성산 맞은편 올리브산에 열리게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짐승 파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의 그 행위를 반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짐승을 팔는 사람들은 장거리 여행을
하며 이 유월절 축제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성전 가까운 곳에서 짐승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환전하는
사람들 역시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나 다른 나라의 돈으로 헌금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로마
황제나 다른 통치자들의 그림이 있는 동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십계명은 그러한 다른 그림이 있는 돈을 헌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환전하는 사람들은 율법이 금하는 돈을 유대인의 법이 허락하는 돈으로 바꾸어주고 있습니다. 가축을 파는 사람들이나
환전하는 사람들이 일을 잘하면 그들의 일은 올바른 유월절 축제에 기여하는 일이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축파는 사람들과
환전하는사람들의 그 일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 장사행위를 하는 장소에 대해 공분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 안을
장터로 만든 것을 예수님은 싫어하고 계십니다.

한 성서학자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신을 지지하던 사업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영업을 허락한 그 년도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가야바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사업가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지지하는 사업가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확실하게 챙겨줍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던 그 해에 가야바의
결정이 내려졌다면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영업을 하던 사업가들에 매우 엄격하게 반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것입니다. 영업은
사업가들의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야바도 자신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일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 성전에서 이와 같은 세가지 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못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는 순종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 때문에 당시 사회질서와 권력의 구조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은 무슨 권한으로 당시 성전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그의 권한이 로마의 황제로부터 인지
아니면 빌라도로부터 부여 받은 것인지 질문합니다. 누가 장사하는 일들을 방해할 권한을 그에게 주었는가?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성전 안
영업방해 행위 허락서를 요청하였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문서를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의 전통에 따라 그들에게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청중들은 언제나 성전에 대한 그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수님의 제자들도 그리고 예수를 반대한 자들도 성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성전건축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성전을 자신의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사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부활
사건을 예고하고있습니다.

부활의 선언은 예수의 반대자들의 권력과 상업주의자들의 권력과 모든 권력구조에 도전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우상 숭배임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코 공화국에 좌파정부가 통치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엘 살바드로에서는 우파 정부가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남미에 있는
그 조그마한 나라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로메로“ 라는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불의한 우파 권력에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로메로는 자신의 생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암살특공대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1980년 3월 제단에서 성만찬을 집례하는
중에 총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 세상의 가치들이 어떻게 성만찬에 위협이 될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로메로 대주교로부터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일의 현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들이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더 넓은 시각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의 노력과 우리들의 비젼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애동안 우리들은 단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아름다운 사역의 조그마한 한 부분만을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뉴스도 모든 것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누구도 완전히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지못합니다.
어떠한 신앙고백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결과를 가져오는 어떠한 목회자의 심방도 없습니다. 교회의 전도와 봉사를 충족시키는
어떠한 선교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어떠한 목적도 목표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젠가 자라날
씨앗을 심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 안에서 심은 씨앗에 물을 뿌립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필요한 모퉁이 돌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노력이 우리들의 능력 이상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없지만 우리들은 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무엇인가 시도하도록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잘 하도록 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하는 하나님의 일이 불완전할 지라도 그것은 시작이며 우리들의 하나님의 일은 한걸음씩 더 멀리 전진할 것이며,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결과를 전혀 모른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포도원의 일꾼과 창조자의 차이점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꾼이지 창조자가 아니며 우리들은 신도들이지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예언자들이지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일하신 것 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일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