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10. 신학과 신앙의 경향 1918 – 1948

10.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신학과 신앙의 경향 1918년 – 1948년

연합된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신학은 역사적으로 몇몇 중요한 요인들로 이미 이전에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 관용의 시대(제9호 연재7번 참고) 1918년까지의 시대는 점차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주의와 얼마후 정통주의(신앙고백의 강조)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1918년 까지 체코 신학생들이 공부를 한 비엔나 신학부는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이성주의는 후에 구(舊) 민족종교전통과 종교적인 감성에 대한 낭만적인 강조와 연결이 된다. 체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외국 종교개혁(독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문호가 개방될 무렵인 1860년대부터 체코개혁교회의 신학에 루터 개혁교회의 신앙 고백주의와 앵글로 색슨의 대각성 운동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몇 가지 갈래로 나뉘어진 자유주의 신학의 경향이 강하였다. 신학의 자유주의는 신앙 고백적인 배타성을 약화시키고 교회의 실천적인 과제와 사명을 강조하여 결정적으로 1918년 두 교단이 연합하는데 기여하였다.

후스개혁신학부의 설립이후 바르트(K. Barth)와 부르너(E. Brunner)와 함께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야 되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리고 교회를 순례자의 교제로 깨달은 흐로마드까(J. L. Hromadka)의 영적인 지도아래 특별히 체코개혁교회의 신학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흐로마드까 교수는 라들( E. Radl ) 교수와 함께 교회밖의 일반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별히 기독학생운동(아카데미 YMCA)의 젊은 세대들에게 “기독교 레뷰(krestanska revue)” 월간잡지를 통해 자신의 신학활동으로 흐로마드까는 세계종교개혁의 관점에서 체코종교개혁의 유산을 정의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문화를 위해 체코종교주의의 기본적인 의미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종교, 철학과 문학간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현대사회의 교회와 교회일치의 과제에 따라 새로운 이해를 도우려고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1945년 이후) 니뮐러(M. Niemoler)와 본 회퍼(D. Bonhoeffer)로 대표되는 나치정권에 대항하는 독일고백교회의 용감한 투쟁이 젊은 체코신학도들에게 오늘날까지 특별히 감명을 주었다. 후에 역시 해석학, 종말론, 그리고 대화에 대한 문제들과 씨름한 유명한 신학자들 불트만(R. Bultmann) 골빗쩌(H.Gollvizer) 틸리히 (P. Tillich) 몰트만 (J. Moltman) 등등의 영향을 받았다.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영적인 삶 가운데 세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난다.

1. 성서 지향적인 흐름이다. 이 경험은 고전적인 체코개혁전통과 관련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 지배적이다. 하나님 말씀의 개관성 강조이다; 신학방법은 과학적인 해석학의 작업과 관련된다. 이러한 흐름에서 신학부와 합동으로 두개의 신하작업그룹에서 새로운 성서 콘코던스(원어 동의어와 함께) 그리고 새로운 성서번역을 하였다. 번역그룹 < 구약은 비츠 (M. Bic)의 지도아래 그리고 신약은 소우첵 (J, B. Soucek), 소우첵 교수가 죽은 후 뽀꼬르니 (P. Pokorny) 교수의 지도아래 > 이 에큐메니칼 기획을 하였다. 몇 년간의 작업을 걸쳐 1979년에 에큐메니칼 번역 성경이 출판되었다. 예배의 삶에 대한 노력은 2권으로 된 예배예전과 새 찬송가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2. 전도의 경향이다. 개인의 회심과 십자가 신학과 내적경건의 강조와 함께 국내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유교회(free church)”의 영적인 새로운 물결과 오순절 경향과 세상과 물질적인 소비사회에 증언을 목적으로 하는 경향에 근접하였음이 틀림이 없다.

3. “새로운 진보적인 변화” 의 경향이다. 특별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복음전파의 새로운 방법을 열망하는 에큐메니칼과 사회의 질문에 의해 성경의 증언의 일반적 이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 이 경향의 한쪽 날개는 사회의 중심에 책임 있는 기독교의 참여로 막스주의자들과 개방적인 대화를 시도하였다.

일정한 기간동안 사회 문제들의 이해에 대한 흐로마드까 교수의 논문발표이후 교회에 철학적으로 진보적인 에큐메니칼 서클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그러나 모든 것을 지배 하 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의해 질식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 즉 총회장과 평신도 대표(curator)들이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영적인 방향을 지도하여갔다. 힘들었던 시대에 그들은 신실한 목회와 국내외 에큐메니칼 기구에서 교회의 상황을 신학화 하였다. 첫번째 총회장은 요셉 소우첵(Dr. Josef Soucek 1918-1938), 다음에 카밀 나기(Dr. Kamil Nagy 1939) 요셉 크제넥(Dr. Josef krenek 1939-1949), 빅토르 하옉(Dr. Viktor Hajek 1950-1968), 바츨라프 케이즈(Dr. Vaclav Kejr 1969-1977), 밀로슬라브 하옉(Dr. Miloslav Hajek 1977-1987), 요셉 흐로마드까(Dr. Josef Hromadka 1987-1990), 평신도 대표(꾸라또르 curator-영문) 페르디난드 카프카(Ferdinand Kafka – 1939), 안토닌 보하츠(Dr. Antonin Bohac – 1950), 구스타프 흐레이사(Dr. Gustav Hrejsa – 1959), 파벨 시멕(Dr. Pavel Simek – 1971), 프란디쉑 슈까르반(Dr. Frantisek Skarvan – 1979), 밀로쉬 레쉬까르(Dr. Milos Lesikar – 1991), 1991년 부터 지금까지 총회장으로 파벨 스메따나(Pavel Smetana)이며 평신도 대표인 꾸라또르로 즈데녝 수사(MuDr. Zdenek Susa)를 거쳐 현재 리디에 로스꼬브초바(RNDr. Lydie Roskovcova) 여사이다..

[개혁교회사]9.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설립과 활동

9.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설립과 활동

연합된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장로제도”를 선택하였다. 장로들과 목사를 제외한 모든 교회들의 대표들은 임기가 6년 이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최근까지 교회는 270명의 설교자들 중에 30-40여명의 여성들이 포함 되어있다. 모든 교회는 총회 법에 따르도록 되어있다. 행정상 13개 노회로 구분하고 한 개 노회는 약 20개 개교회로 구성된다. 노회는 목사 2인 평신도 2인으로 구성된 4인 노회회의(Senioratni Vybory, Seneorate Council)에 의해 운영 관리된다. 노회의 개 교회 대표들은 매 2년마다 노회 총회 회의로 소집되며 그리고 대표들은 매년 부서회의로 모인다.

교회의 최고 기관은 총회장과 총회 평신도대표(Synodni kurator, Synodal Curator)를 대표로 하는 3명의 목사와 3명의 장로로 구성된 “총회회의(Synodni rada, Synodal Council)이다. 총회 사무실과 150-200명의 목회자 평신도들이 자원해서 함께일하는 각 위원회와 부서들의 사무실이 프라하 Jungnannova 9번지, ”후스의 집(Husovy dum)에 있다. 교회의 회원은 특별히 개혁교도 가정의 후손들로 구성되어있으나 개 교회들은 자신의 교인들뿐아니라 자신들의 지역사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개 교회의 핵심사역은 주일 예배와 성경 공부이다. 교리교육(어린이들을 위한 종교와 예배 교육, 주일학교, 세례교육, 청소년 활동과 다양한 성경공부 과정)을 강조한다. 그리고 목회와 “기독교 봉사”(노인, 독거노인들과 병자들을 위한 봉사사역)이 특별히 강조되며 이러한 사역은 헌신적인 장로들과 전문가 평신도들의 도움으로 진행된다. 몇몇 도심지역의 개 교회들은 여성들 30대 중년세대들 그리고 특별 봉사 활동을 위한 사역팀이 있다.

구(舊)형제단의 전통에 따라 교회의 교인들은 형제적인 교제와 협의된 개 교회의 생활의 질서와 법에 따른 기독교인의 삶을 지켜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교회는 자신의 교인들이 개 교회에서 책임과 사랑의 봉사를 배우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에 헌신하는 복종의 삶으로 세상에서 증언의 모범이 되는 것을 훈계한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삶과 사역에서 많은 연약함과 영적인 쇠약함이 있다. 현대의 소비 사회의 세속화 과정이 지속적으로 더 깊게 교회의 질서에 침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교회밖의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복음을 전달하려는 살아있는 선교적 인식이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적인 접근을 위해 준비된 설교자와 가장 다양한 신학과 복음화와 다른 주제들의 과정과 특별히 “선교적 과제”라는 주제로 매년 열리는 역사적 문화적인 주제들을 다루는 공개강좌와 연구모임의 평신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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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형제개혁교단은 출판활동이 있다. 매월 “체코형제(Cesky bratr)” 잡지가 발간된다. “최근 소식(Aktuality)”이란 제목 아래 총회의 새로운 소식을 싣고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월간 잡지로 “형제(Bratrstvo)”가 있는데 이것은 전제주의 시대때 발간이 금지 되었다가 1990년에 재발간 되기 시작하였다. 젊은 목사들에 의해 발간되는 부정기 간쟁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가 있다. 교회 출판사와 서점의 이름은 “깔리흐(KALICH)”이다. 종교서적, 일반서적을 제외하고 매년 특별히 “개혁교회 달력(Evangelicky kalendar)” 그리고 매일 가정 예배를 위한 책 “매일 생활을 위하여(Na kazdy den)”을 출판하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는 개혁교단들의 연합지인 주간지 “콘스탄츠의 불꽃(Kostinecke jiskry)”가 있다.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자신의 교인들을 위한 교류와 휴식을 위해 몇몇 교육과정과 수련장을 가지고 있다: 보헤미아-모라비아 산간지방의 호떼보즈(Chotebor)에 그리고 끄르끄노쉐 산에 있는 헤를리꼬비쩨(Herlikovice)와 얀스께 라즈니(Jnaske Lazni)에 그리고 끄루슈네 산에 있는 야히모브(Jachymov)에 그리고 서부 모라비아의 라지(Lazy) 등에 있다. 교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영성수련과 성도의 교제를 깊게 하는 기회를 이곳에서 갖게 된다. 이 수련장에서 각양각색의 전체교회 교인을 위한 교육과 컨퍼런스가 열린다. 최근에는 외국에서 손님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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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활동들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모든 개 교회들은 매년 교회의 자립을 위한 “희년의 관용의 기금(jubilejni tolerancni dar)”라는 특별 모금을 한다. 이 기금은 특별활동을 위한 개 교회의 지원금으로 사용된다.

[개혁교회사]8. 체코형제개혁교회의 탄생 1918년

8. 체코형제개혁교회의 탄생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의 설립 직후 오랫동안 갈망해온 체코개혁교회들의 연합이 가능하게 되었다. 3백년동안 체코 개혁전통의 후예들이 “조상의 믿음”을 온전하게 선포할 수 있었다.

관용의 시대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두 개의 교회(번역자 주 – 여기서 교회는 교단을 의미하며 하나는 루터의 신앙고백을 한 그룹과 다른 하나는 스위스 개혁신앙고백을 한 그룹이 각각 교단을 형성하였다. 이하 교단은 ‘교회’로 그리고 교단소속의 교회들은 ‘개교회’로 표기함)와 17-18개 개혁교회들이 1918년 12월 프라하에서 총회를 열고 연합을 하였다. 당시 개혁교회는 126,000명 교인들과 루터교회 34,000 교인들이 있었다. 체코의 개혁전통 특히 형제단의 전통으로 연합된 교회의 설립은 체코형제개혁교회(Ceskobratraska cirkev evangelicka)로 이름이 붙여졌다. 연합된 교회의 상징은 “성경”(형제단의 전통)위여 놓여있는 “성찬잔”(후스의 전통)이 되었다.

풍부한 역사적인 뿌리 때문에 교회일치는 단지 연합의 차원을 넘어 에큐메니즘의 정신을 형성시켰다.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고백(예;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구 후스파 신앙고백 “1420년의 프라하 4개 조항”외에 루터 신앙고백인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 “1535년의 형제단의 신앙고백”(1662년 얀 아모스 꼬멘스끼의 번역본에 따름), “1566년의 두 번째 스위스 개혁신앙고백” 그리고 체코개혁전통의 초기 에큐메니칼 기원이 되는 문서인 1575년 체코개혁교도의 첫 번째 연합인 “체코신앙고백”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연합된 교회는 특히 선교활동의 가능성의 기회를 갖게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로마로부터 탈퇴”(Pryc od Rima – Los von Rom)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체코국민의 거의 18%가 로마 카톨릭교회를 떠났다. 대부분 그들은 합스부르크 군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여러 면에서 신용을 잃게된 카톨릭 교회에 실망하였다. 처음 10여 년간 약 100,000명의 로마 카톨릭인들이 체코형제 개혁교회에 등록하여 120개 교회 250,000명의 교인을 이룬 가장 큰 체코개혁교회가 되었다.

이 개종운동으로 다른 교회들도 많은 교인을 얻었다. 약 10,000여명이 19세기말 체코 영토에서 활동을 시작한 소수 개혁교회들에 가입하였다. 회중교회인 “체코형제교회연합”, “연합침례교회”, “개혁감리교회” 그리고 일부의 “구 카톨릭 교회”등이다. 이 외에도 1920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교단이 세워졌다. 민족교회로서 부분적으로 동방정교회와 관련이 있으나 대체로 후스 전통과 관련이 있다.(나중에 후스 전통에 근거한 교회임을 강조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후스 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카톨릭교회가 아닌 교회들 가운데 제일 큰 교회로 750,000교인의 교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체인구의 77%를 이루고 있는 로마 카톨릭교회는 여전히 체코 공화국에서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주고 있다.

첫 20년 동안 연합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복음화(특별히 체코 서부지방)와 교회개척에 집중하였다. 초기에 개교회들 간의 신앙고백의 차이들은 특별히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전 루터 교인들은 자신의 예배예전을 되찾았고 반면에 대다수인 개혁파들은 칼빈의 교리를 지나치게 주장하지 않았으나 장로교회 전치와 제도를 유지하였다. 목회자들과 그들이 섬기는 개교회들이 서로 다른 신앙고백의 전통에 있어도 목회자들이 임명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지역교회의 회원권은 주로 거주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관용에 의해서 세워진 전통적인 지역교회들이 이 외에 자유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적인 신학의 영향에 따라 새로운 개교회들이 생겨났다. 독일 개혁교도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내에 120,000 교인의 자신의 개혁교회를 갖게되었다.

1919년 초기에 목회자 교육을 위해 프라하에 “후스 개혁 신학부”가 세워졌다(후에 1953년에 “꼬멘스끼 개혁 신학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새 신학부는 초기에 연합된 교회의 지도자들과 밀접하게 협력이 되었다. 연합된 교회 – 체코형제개혁교회 – 목회자 출신가운데 신학교 교수들이 배출되었다. 신학부 사역의 초대 책임자는 비엔나 신학부에서 프라하로 임명이된 스깔스끼(G. A. Skalsky)교수였다. 교수 첫 세대 가운데 후스 신학부에 유명한 교수들이 있었다: 교회사의 흐레이사(F. Hrejsa)와 바르또쉬(F.M. Bartos) 구약학의 다ㄴ(S. Danek), 신약학의 쥘까(F. Zilka), 교리학 교수 흐로마드까(J.L. Hromadka)였다. 다음 세대로 역사학자 지찬(R. Rican), 구약학 비츠(M. Bic), 신약학 소우ㅊ(J.B Soucek), 교리학과 윤리의 도비아쉬(F.M. Dobias), 실천신학 베드나즈(F. Bednar), 노보뜨니(A. Novotny) 그리고 예슈께(J.B. Jeschke)이다. 다음 세대로 교리사 몰나르(A. Molnar), 조직신학 로흐만(J.M. Lochman), 브로쉬(L. Broz), 구약학 헬레르(J. Heller), 신약학 뽀꼬르니(P. Pokorny), 실천신학의 스몰릭(J. Smolik)과 파벨 필리피(Pavel Filipi), 사회윤리 트로얀(J. Trojan), 오포첸스끼(M. Opocensky), 종교이론 온드라(J.N. Ondra)이다. 신학부는 자신의 총대를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에 파송 하였다.

[개혁교회사]7. 자유의 여명과 획득 1781 – 1918

7. 체코개혁교도의 자유의 여명과 획득 1781년 – 1918년

오랫동안 지속되던 반 종교개혁이 내적 외적으로 체코의 개혁교도들을 무기력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서 160년간 극심한 박해의 시대에 약 8만 명의 비밀 개혁교도들이 존재하였다. 결국 계몽주의 시대의 통치자 요셉 2세 황제가 종교의 자유의 평화를 선언하였다. 1781년 10월 13일 합스부르크 군주국 지역의 비카톨릭교도들에게 종교의 관용을 허락하는 “관용의 칙령(Tolerancni patent)”이 발표되었다. 관용은 사실상 로마카톨릭 교회의 엄격한 감독 아래에서 개혁교도와 다른 소수 신앙 집단에게 허락한 종교의 자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의 선언이 그때까지도 존재하였던 “지하”개혁교도들에게 구원의 상징이 된 것은 그들에게 교회조직과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가능성이 열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상들의 전통적인 개혁신앙고백”은 허용되지 않았고 단지 아우크스부르크(루터의 신앙고백)나 스위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의 두 개의 신앙고백밖에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아 후스파와 형제단의 체코 후예들은 실망을 하였다. 처음에 등록한 70,000명의 개혁교도 가운데 대부분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보다 자신들의 예전에 가까운 스위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선택하였다.

황제의 관용의 선언은 100가정 또는 500명의 신도가 등록된 곳에 개혁교회 공동체의 설립을 허용하였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는 교회당의 탑과 종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고 그나마 그것도 마을의 변두리에나 가능하였다. (이것을 후에 “관용의 교회당들-tolerancni kostely” 이라고 부른다.) 교회 공동체들은 자신의 설교자를 임명할 수 있었고 후에 교회학교의 교사를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례비는 반드시 로마 카톨릭 기관에서 지급하도록 되어있었다. 개혁교회의 어떠한 선교활동도 금지되었고 새롭게 등록하는 개혁교도는 로마 카톨릭 사제에게 특별한 “종교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처럼 많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관용”이 선포된 후 5년 만에 루터의 신앙고백에 19,000명 스위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59,000명 해서 모두 78,000명의 개혁교도들이 등록하였다. 1787년에 76개의 교회 공동체가 조직되었고 53개의 교회학교가 설립되었다.

관용의 교회들이 존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헝가리 개혁교회와 슬로바키아의 루터교회 설교자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영적인 돌봄의 희생과 형제애로 초기 관용의 교회의 가난과 또 다른 많은 어려움에 당시 개혁교도들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관용의 시대는 완전한 종교와 교회의 자유로 가는 여정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 시기가 되었다.

100여 년 간의 영적인 투쟁이후 특별히 1848년 혁명의 중대한 정치적 사건 이후 1861년 4월 8일 황제 프란띠쉑 요셉 1세의 “개혁교도의 칙령”에 의해 체코 개혁교도들은 로마 카톨릭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체코 민족의식은 후스파와 형제단의 전통을 고취시켰다. 개혁교회 공동체는 그때까지만 해도 시골에 더 많았으나 도시에 새로운 교회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개혁교도들이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당시 개혁교도 가운데 유명인사들로 두쉑(C. Dusek), 슈베르트(V. Subert), 야나따(J. Janata), 하옉(J. L. Hajek), 쉐베스따(F. Sebesta), 뽀꼬르니(V. Pokorny), 찌사즈(F. Cisar) 등이다. 개혁교 지성인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대체로 체코 역사가들이다. 빠벨 요셉 솨파직(Pavel Josef Safarik – 그의 책 “슬라브 구제도”가 유명)과 “민족의 아버지”라 불리 우는 프란띠쉑 빨라쯔끼(Frantisek Palacky – 그의 책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체코역사”가 유명, 이 책은 5권 전집으로 1846-1876년에 출간)이다. 후에 초대 대통령이 된 또마쉬 마사릭(Tomas G. Masaryk)이다. 그는 진보적인 교수로 개혁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는 정치 철학서적은 물론 종교적인 주제를 가진 유명한 책들 – “체코 문제”(Ceska otazka, 1895년), “얀 후스”(Jan Hus, 1896년), “현대인과 종교”(Moderni clovek a nabozenstvi, 1899년)을 저술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1918년 10월 28일 “체코 슬로바키아 공화국”설립으로 완전한 종교자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300년 만에 새롭게 되찾게 된 민족독립과 종교의 독립은 많은 영적인 정치적인 힘과 특별히 개혁교회 목사들과 지성인들이 민족문화와 자기 정체성을 일깨우도록 도왔던 슬로바키아의 민족운동과 19세기 체코 민족부흥의 결과였다. 공화국 설립이후 신앙고백에 따라 두 개로 분리되었던 개혁교회가 결국 구 체코종교개혁전통을 토대로 하나의 개혁교회로 연합할 수 있었다.

[개혁교회사]6. 반(反)종교개혁 1620-1781

6. 반(反)종교개혁 1620-1781

초기에 다른 나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독일 종교개혁과 달리 체코 종교개혁은 30년 전쟁(1618-1648) 기간과 그후 체코의 100년 역사에서 거의 완전히 탄압되었다. 로마 카톨릭과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드 2세에 저항하는 1618년 체코 혁명은 실패하였지만 그 혁명은 30년 전쟁을 촉발시켰다. 체코 개혁주의 귀족들(팔쯔키의 베드지흐 – Bedrich Falckeho가 체코 왕으로 선출된 직후 잠시 동안 형성되었던)이 1620년 11월 6일 프라하 근교의 빌라호라(Bila Hora : 백산)전투에서 완전히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 후 300년 동안 90%가 개혁주의자들이었던 체코 영토에서 종교의 자유가 상실되었다.

27명의 체코 개혁주의 귀족 지도자들이 1621년 6월 21일 재판을 받고 프라하 구시가지에서 처형을 당했다. 개혁주의 귀족들과 평민들은 로마 카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거나 아니면 추방을 당하였다. 로마 카톨릭과 유대적인 사람들은 예수회의 반종교개혁 활동을 도왔다. 그 당시 30,000명이 추방을 당했는데 그 중에 형제단의 마지막 감독인 꼬멘스끼(J.A Komensky)가 있었다. 지위를 박탈당한 추방자들로서 많은 사람들은 유럽전역을 방랑하며, 젊은이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곳, 영적인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 곳(경건의 실천) 그리고 민족간의 평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30년 전쟁을 마무리짓는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 협정(vestfalsky mir)이 체코 영토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 외국으로 흩어져 있는 체코 개혁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리고 1670년 꼬멘스끼가 마지막 망명지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죽었다. 죽기 직전까지 체코 개혁자들의 희망 없는 상황을 알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고별의 글 \”죽어 가는 어머니(형제단)의 유산 (Ksaft umirajici matky – Jednoty bratrske)\”을 썼다. 얀 아모스 꼬멘스끼의 무덤은 현재 네덜란드 나르덴(Naarden)에 있다.

야만적인 \”반종교개혁\”은 160년 간 계속되었고 \”흑암의 시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당시에는 공개적인 개혁교회의 삶은 눈곱만큼도 허락되지 않아 체코 영토 내에는 어떠한 종교개혁의 유산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체코인들에게 종교개혁의 믿음의 불꽃이 결코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대지의 침묵\”, \”감추어진 씨앗\”으로 불린 종교개혁자들의 비밀 신앙 소그룹이 불법적으로 모였다. 그들은 비밀 예배 집회를 위해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속, 바위, 계곡에 모였다. 이웃나라 작센 공국(옛 동독지역)과 폴란드에 살고 있는 체코 종교개혁 추방자들이 정규적으로 그들을 방문해서 영적으로 힘을 북돋우어 주었다. 비밀 체코 개혁자들은 예수회와 군인들이 수색하고 있는 자신들의 옛날 성경과 종교 서적들은 여러 다른 장소에 보관하였다. 후에 독일에서 출판된 새로운 성서와 종교 서적들과 찬송가들이 비밀리에 체코로 배달되어 조상들의 신앙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데 도움을 받았다. 외국 귀족과 시민들(특히 대부분이 독일인)이 합스부르크 통치자의 초청으로 체코 영토로 이주해 옴으로써 반종교개혁은 더욱 강화되어 체코인들의 삶은 점점 더 빈곤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체코 영토 내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억압적이고 게르만주의적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매우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게 되어, 후에 체코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반종교개혁 시대에 신앙 때문에 추방당한 체코 추방자들과 후에 다양한 자유 의사에 따르는 이유(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음악가들 가운데)로 자신의 나라를 떠난 이민자들이, 반종교개혁의 영향이 없는 당시 헝가리에 속해있던 슬로바키아와 독일의 종교개혁 통치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후에 경건주의 신앙을 견지하던 이들이 독일 지역(작센)에 정착했다. 피난민들에 의해 세워진 독일 지역의 정착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헤른후트(Herrnhut)이다. 헤른후트(체코어로 오흐라나 – Ochrana)는 1722년 모라바의 형제단의 후예들 – 백작 미꿀라쉬 진젠도르프(Mikulas L. Zinzendorf)에 의해 설립되었다. 1749년 교회 공동체를 창설한 직후 \”재건된 형제단(Obnovena Jednota bratrska)\”을 설립하였다. 오흐라나의 \”형제의 연합(Unitas fratrum)\”(앵글로 색슨 지역에서는 이것을 모라비아 형제단 – The Moravians이라고 한다), 이 \”형제의 연합\”은 후에 전세계 선교 활동을 폈고 힘든 반종교개혁 시기를 극복하는 체코 형제단의 부유한 영적인 유산으로부터 새로운 가지를 뻗었다. 체코 종교개혁의 유산은 언제 어디에서도 소멸되지 않았고 오히려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추방자들의 쓰라린 고통에 관심을 기울임 없이 우리는 이 장(章)을 여기서 마무리할 수 없다. 추방자들 가운데 견디기 어려운 자들 일부는 집으로 돌아와 로마 카톨릭 교회로 자발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대다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짐을 졌다. 우리는 그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그들은 오늘날 민족과 나라가 높은 가치가 되지 못함을 증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민족과 나라 위에 있고 모든 세계가 그에게 속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