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2 히베른의 집, 화폐주조소 부꼬이 성

2. 히베른의 집, 화폐 주조소 부꼬이 성
(Dům „U Hybernů“, Někdejší mincovna Buquoyský palác)

화약탑 건너 편 공화국 광장 동쪽으로 제정 양식의 거대한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이는 히베른의 집(U Hybernů)이다. 이는 1355년 까렐 4세가 로마에서의 대관식을 마치고 암브로시오 전례를 따르는 베네딕트 수도회를 위하여 성 암브로시우스 교회와 수도원이 있던 자리이다. 후스의 종교 개혁 운동 초기에 이 교회가 중요한 의미를 얻은 이유는 1419년 초 바츨라프 4세가 후스주의 신봉자들의 요구에 따라 이 교회에서의 양종 성찬을 허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만 해도 양종 성찬은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와 왕정(Kralův dvůr)의 북쪽에 위치하였던 성 베네딕트 교회에서만이 가능하였다. 그 이후 성 베네딕트 교회는 철거되었고, 단지 지금은 거리 이름으로 교회에 관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베네딕트 거리- Benediktská ulice))

1차 후스 전쟁 시대에 암브로시오 베네딕트회 사람들은 프라하에서 추방 당하였다. 이단 형상들을 모두 없애고 프라하 내 교회의 조각상들과 그림들을 불태운 지그문트의 십자군 원정대를 막고, 프라하인들을 돕기 위하여 후스 급진파들은 1420년 성 암브로시아 교회 앞에서 집회를 가진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구시가와 신시가에서 후스파들의 큰 집회가 열리곤 하였다.

이후 뽀뎨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 왕은 암브로시오 수도원을 프란치스코회에 기증한다. 그러나 이들은 블라디슬라프 2세가 집권하였을 무렵인 프라하 전쟁시대에 성찬잔에 대한 설교로 1583년 프라하로부터 추방당한다. 반종교개혁 시기였던 1630년 수도원은 히베르인들 (아일랜드 – 라틴어로 히베르니아 Hibernia, 여기서 히베른 이란 이름도 파생되어 나옴.) 이라 불리웠던 아일랜드의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을 위하여 재건되었다. 요세핀 개혁 당시, 수도원은 해체되고, 암브로시아 교회는 이단으로 배척당하였다. 1789년 부터는 체코 극장으로 이 곳이 활용되기도 하였는데 이라섹의 소설 „F.L.Věk“을 극화한 작품에서 유명해진 바츨라프 트함(Václav Thám)과 춤의 명인 부토(Butteau)도 또한 이 곳에서 공연 하였었다.

화약탑(Prašná brana)을 지나 첼레뜨나 거리(Celetná ulice)로 가보자. 이 곳에서부터 구시가 광장을 지나 프라하 다리를 건너 소지구외 흐라차니까지 이르는, 체코 지배자들이 지나다닌 王道(Královská cesta)가 시작된다. 한 100미터쯤 지나 왼편에 있는 36/587번지 집 앞에서 멈추어보자. (이 집은 아케이드와 거리쪽으로 난 발코니가 있고, 마치 그 집의 과거를 말해 주는 듯 군사들과 그의 대장의 조각상이 있다. )

원래 고딕식 집이었던 벨플로비츠의 집은 1409년 바츨라프 4세가 왕정으로 편입시켜 체코 왕비들의 궁정(Dvůr českých královen)으로 탈바꿈하였다. 후스중의 시대 초기에는 구시가로 편입되고, 1420년부터는 후스의 주조소(husitská mincovna)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759년 주조원이었던 라요프의 파흐따(Pachta z Rájova)에 의하여 재시공된 동전 주조소의 벽면에는 오보츠니 뜨르흐 거리쪽으로 이런 현판이 있다. : 이 곳에 후스주의 시대인 1539년부터 1784년까지 동전을 만들던 주조소가 있었다.- 체코 화폐 100년의 기억. (1848년 이 주조소 앞에서 혁명 봉기 초기에 합스부르크 장군이었던 빈디쉬그뢰츠가 프라하 사람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바로 옆 건물은 1403 년부터 체코 영토 출신 학생들을 위한 체코 민족 대학 기숙사(Univerzitní kolej českého národa) 로 쓰였던 곳이다. 이 기숙사는 체코 개혁 당시 양종 성찬 교회의 학생들에게 제공 되었다.

첼레뜨나 거리 반대편으로 바로크 스타일의 집인 25/590번지 집이 있다.: 네 기둥의 집. (U čtyř sloupů) 이 집은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및 신학자였던 독일-이탈리아 계인 베르나르드 볼자노(Bernard Bolzano)가 살았고, 삶을 마감한 (1848년)곳이기도 하다.
그는 프라하 대학에서 계몽주의 신학 교수였으며, 독일과 체코 대학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보헤미즘’을 주창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체코 땅 안에서 두 개의 민족이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첼레뜨나 거리를 따라 약 100미터정도 내려오다 보면 20/562호 집이 있다. 이 곳은 빌라 호라 전투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랑스 전투 사령관이었던 부꼬이 백작이 소유하였던 부꼬이 성(Buquoyský palác)이다. 부꼬이는 운명적인 빌라 호라 전투에서 황실 군대장으로 있었다. 신교도들을 누르고 승리로서 얻은 여러 재산중에 이 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1762년 이 집은 대학의 소유가 된다. 1880년부터 이 곳에 왕립 체코 교육 학회가 자리 잡는다. 몇몇 정보들에 의하면 이 집은 체코 개혁 당시 체코 형제단의 큰 후원자이자 리또미슐 지역 영주였던 뽀스뚜삐체의 보후슬라프(Bohuslav z Postupic)의 소유였다 한다. 형제단 교리에 관한 협의를 위하여 루까쉬와 바츨라프 끄라쏘니츠(Lukáš a Václav Krasonický) 형제가 지도하는 형제단의 임원들과 그리고 대학 교수들과 전문가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와 함께 이 집에서 모임이 열렸다. 1504년 새해 첫 날, 모임은 이루어졌지만 별 진전은 없었다. 그 밖에 여러 해 동안 다양한 회의가 이 집에서 진행 되었었다. 1547년, 시 당국 대표들이 독일의 슈말칼덴 신교연합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페르디난드 1세의 도움을 거절했을 때, 중요한 회의도 이 곳에서 열린다. 뮐베르그 전투에서의 승리 후 페르디난드는 꼬스떽의 재산까지 몰수해 버림으로서 그를 응징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집도 그 때 몰수당한다. 17세기 초에는 프리드리히 팔츠끼가 집권하던 무렵 체코 왕실의 부총리를 역임하였던 미할로비체의 보후슬라프 (Bohuslav z Michalovic)가 이 집을 소유하였었다. 그리고 반합스부르크 봉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당한다.

II/1. 나 프지꼬삐에 검은장미의 집과 이전 왕의 궁전

두번째 코스
구 시가 – 중앙과 북동쪽

1. 나 프지꼬삐에 거리에 있는 둠 우 체르네 루쉐(검은 장미의 집)와 이전 왕의 궁전 – 2. 히베른의 집, 화약 탑 뒤에 있는 이전 동전제조공장, 부꾸요스끼 궁전 – 3. 틴성당 사제관 – 4. 이전 오떼르스도르프 식스뜨의 집 – 5. 띤 앞의 마리아 교회(옮긴이-띤 성당) – 6. 부도브의 바츨라브 부도베쯔의 집 – 7. 살바또르 개혁교회 – 8. 성 두흐 교회 – 9. 쉬몬과 유다 교회 – 10. 성 하슈딸 교회 – 11. 끌리멘트 개혁교회 – 12. 뽀지치의 성 뻬뜨르 교회

까롤린의 대학에서 시작한 첫번째 코스와 마찬가지로 두번째 코스 역시 15세기 초 프라하 까렐대학의 역사와 후스시기와 관련된다. 프라하 중심시내를 “금의 교차로”라고 부른다. 이전 대학인들의 집인 둠 체르네 루쉐(검은 장미의 집) 이다. 무스텍 지하철 정거장 출구로부터 나와 지하철 역쪽으로 약 100미터 떨어져 있는 현재 상가인 나 프지꼬삐에 12/853 체르나 루쉐(검은 장미) 까지 간다. (우를리즈스까 거리 반대편에 있는 멀지않은 까로린까지 약 100미터)

II/1. 나 프지꼬삐에 검은장미의 집 (Dům U černé růže Na Příkopě) 과 이전 왕의 궁전(Králův dvůr) (1-2분)
현대식 상가가 매우 유명한 종교개혁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데 우선 우리들은 놀란다. 원래는 고딕건물로 체코 대학선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1408년 이곳에서 예로님 선생(M. Jeronym)이 옥스포드에서 프라하로 가져온 영국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의 문서들에 대한 첫번째 학술 토론이 열렸고 후에 얀 후스 선생(M. Jan Hus) 이 진지하게 그를 연구하였다. 위클리프에 대한 연구와 토론은 위클리프에 대한 관심으로 종교재판을 앞두고 프라하로 도주한 드레스덴의 독일인 교수들이 체코 형제단과 접촉을 하면서 1412년에 더욱 심화되었다. 마기스터 니꼴라우스가 그들중의 지도자가 되어 프라하에서 미꿀라쉬 드라슈댠스끼 선생(M. Mikuláš Drážd´anský) 그리고 그의 동생 뻬뜨르(Petr) 그리고 얀 드라엔도르프(Jan Draendorf)와 뻬뜨르 뜨르노프(Petr Turnov)의 체코이름을 갖게되었다. 미꿀라쉬 선생(M. Mikuláš)은 양종성찬에 대해 스뜨지베르의 야꼬우벡 선생(M. Jakoubka ze Stříbra)과 매우 활발히 협력하였다. 그의 성서신학적인 견해로 야꼬우벡이 프라하에서 양종성찬의 성만찬을 벽속의 마르띤 교회(kostel Martina ve zdi)(I/11)에서 시행하게 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인들 가운데 체코종교개혁시대의 독일인 후스추종자들의 실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후스종교개혁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후스의 죽음 이후 많은 독일인들이 체코 선생들 보다 더 열정적으로 성찬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얀 드라엔도르프는 1417년에 양종성찬을 시행하는 교회에서 신부서품을 받았다. 다른사람들은 후스파 종교개혁 프로그램의 열정적인 전파자들이 되어 그들 대부분은 독일에서 종교재판의 희생자들로 화형장에서 사라졌다.

현재 후스파의 역사를 지닌 건물 „검은장미의 집“에서 제정시대 풍의 건물전면의 발코니의 금색바탕위에 검은장미의 옛 문장을 볼 수 있다.

„검은 장미의 집“으로부터 아주 예쁘게 수리된 넓은 보행길 „나 프지꼬삐에(Na Příkopě)“ (이전에 구시가의 토성으로 제방이었다.) (옮긴이 – 프지꼬프의 뜻을 뚝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거리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같은 쪽에 얼마가지 않아 고전적인 교회당 성 크지쉬(sv. Kříž). 약 100미터 역시 같은 쪽에 있는 슬로반스끼 집(Slovanský dům) 걸어간다. 이 집은 프지호브스끼 귀족가문을 위해 전통적인 양식으로 18세기말에 건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작은 고딕양식의 집이였으며 1414년부터 뜨로즈노브의 얀 쉬쉬까(Jan Žižka z Trocnova) 소유였다. 당시 그는 „왕실 문지기“ 였고 그리고 „애꾸눈 야넥“ 으로 유명하였다. 거리의 끝나는 곳에 있는 화약문(Prašna brána)으로 불리우는 신고딕양식의 탑까지 걸어간다.
정확한 이름은 화약탑(Prašná věž)이다. 후스종교개혁 시대에 구시가를 둘러쌓고 있는 8개의 탑가운데 하나였다. 1475년에 블라디슬라브 2세 야겔론스끼(Vladislav II. Jagellonský)가 원래의 화약탑에 새로운 더 크고 아름답고 웅장한 르네상스양식의 탑을 세웠다. 그러나 이 탑이 완성되지 못하였다. 1757년에 프라하를 포위하여 공격할 때 크게 파괴되었고 후에 오늘날의 유사 고딕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8세기 초에 그 탑안에 화약을 넣어두었기에 화약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계속해서 걸어가면 원래 프라하시의 성문이 나온다 – 이 곳에 현재 시민회관(Obecní dům)이 있다 – 중세시대에 바츨라프 4세(Václav IV) (+ 1419)에 의해 세워진 왕의 궁전(Královský dvůr 또는 Králův dvůr)으로 불리우는 체코 통치자의 구시가 성이 1383년부터 있었다. 그의 계승자들 가운데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 이지 (Jiří z poděbrad) (+1471) 까지 여기에 거주하였고 그 다음 계승자인 블라디슬라브 2세 야겔론스끼(Vladislav II. Jagellonský) (+1516)가 흐라드차니에 있는 자신의 궁전으로 이사를 하였다.

연대기적으로 구시가의 왕의 궁전(Královský dvůr)은 얀 후스 선생(M. Jan Hus)의 프라하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 1414년 8월 26일 콘스탄츠로 가는 것을 결정하기전 성문에 이단자로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붙였다. 왕 바츨라프 4세의 새로운 명령으로 그를 반대하는 어떠한 증거도 누구도 제시하지 못해 그를 신임하기위해 소환명령을 내렸다. 만약에 그가 이단임을 증명하게 되면 콘스탄츠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그를 세워 이단으로 벌을 받게하겠다고 하였다. – 격변의 1420년에 꼬란다 스다르쉬(V. Koranda Starší) 신부에 의해 지도되는 따보르파들이 황폐화된 궁전에 주둔하였고 그들은 비뜨꼬바 산(山) 전투를 앞둔 프라하 시민들을 돕기위해 왔다.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가 자신의 거주지로 1458년부터 왕의 궁전을 사용하였다. 1462년 8월 10일 공회 참석자들이 „콤팍따따“가 무효임이 선언되고 그리고 왕 이지는 왕관의 맹세로 이단을 축출해야만 한다는 교황으로부터 온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왕은 „나는 왕위를 위해 신앙을 팔지않을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깨닫게 한 것은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자녀들 우리들은 위대한 왕위와 생명까지도 내어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후 공회에 중요한 것은 이지가 1467년 4월 공회에서 교황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고, 다음 공의회에 교황의 결정 철회를 요청한 것이다. – 왕의 궁전에서 1471년 3월 25일 후스파의 왕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의 시신은 성 비뜨 성당의 왕의 묘지에 모셨고 그의 심장은 은 상자에 넣어 띤 성당에 두었다.

광적인 카톨릭 신자로서 형제단을 억압하고 소유를 몰수하려고 한 왕 블라디슬라브 2세(Vladislav II.) 는 새로운 프라하 소란의 시기인 1483년에 성에 거주하였다. 왜냐하면 구시가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소위 제2차 프라하 투척사건이 발생하였다. 왕의 임명을 받은 부패한 집정관들이 시청 창 밖으로 투척 되었다.) 버려진 궁전은 곧 황폐화되고 점차적으로 이웃하고 있는 수도원에서 사용하다가 후에 군거주지 그리고 시청직원들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20세기 초에 원래의 왕의 궁전의 모든 건물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프라하 시민회관(Obecní dům)의 대표적 인 건물이 들어섰다. 큰 홀에서 1918년 12월 17-18일 체코 개혁파들
(당시 루터와 칼빈의 신앙고백 교회들)의 총회가 열려 이 회의에서 두 교회는 체코형제개혁교회(Českobratrskou církev evangelickou) (III/3)로통합선언을 하였다.

13. 학사 지역 – 밀리츠의 예루살렘

13. 학사 지역 – 밀리츠의 예루살렘

베들레헴 광장에서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서 종교개혁 시대 이전의 유적과 관련된 문화재를 만나게된다. 재건축한 학사 일대의 둘러싸인 담 안에 회색 수녀(šedy sester) 수도원인 성 바르토로메 바로크 교회당의 탑이 높이 솟은 곳이 있는 꼰빅스께 울리쩨 (번역하면 학사 거리 – 옮긴이) 까지 걸어간다. (평일에 건물의 일부가 장식무늬의 아치와 연결된 새롭게 수리된 앞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좁은 통로 길을 따라 바르또로미예스까 울리쩨 (바르토로메 거리 – 옮긴이)까지 걸어나오면 교회당 입구가 나온다. 왼쪽(동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학사 지역을 둘러볼 만 하다.)
설교자들을 교육하던 끄로미에지쉬의 밀리츠 (Milič z Kroměříž)가 1472년에 조직한 프라하 매춘녀들을 수용하는 새 예루살렘(Nový Jeruzalém) 이라는 사회복지 시설이 있었던 장소가 바로 이 학사 지역이다. 사회복지 시설은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일부 건물을 까렐 4세가 대학에 주었고 나머지는 시토 수도회에 넘겼다. 후에 밀리츠 추종자들의 모임이 이 시설을 다시 시작하였고 그리고 베들렘 까펠 운영을 위한 유리한 조건들을 만든 갱신운동을 도왔다.

반 종교개혁 시대에 시토 수도회를 이어 1660년에 독일을 포함하여 귀족집안 출신의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서 멋진 학사를 이곳에 건축한 예수회가 구 건물들을 차지하였다. 젊은 귀족들이 (개혁파 가문 출신도 포함하여) 로마 카톨릭 종교교육을 이곳에서 받았다. 예수회가 해체된 후(1773년) 인쇄소로 용도변경을 위해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한때 대규모 식당이었던 곳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들, 음악회와 무도회가 열렸다. (1798년 이곳에서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863년에 바그너 Richard Wagner가 연주를 하였다.) 1840년에 이곳에서 첫번째 체코 무도회가 열렸고 나중에 이곳은 영화관이 되었다. 1830년부터 이곳은 안토닌 드보작(Antonín Dvořak)이 공부를 했던 프라하 오르간 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재건축된 학사 지역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고있다. 바르또로미에이스까 거리 남동쪽의 모퉁이에 이 문화재의 주요 일지를 적은 작은 문화재 설명판이 있다. 바르또로미에이스까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블다바 강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12세기 초의 가장 오래된 로마 로툰 양식의 성 크지슈 채플에 다다른다. 바로 가까운 까롤리나 스비에뜰라 거리 모퉁이에 (316호 건물에) 후스파 시대에 레츠꼬바 (Rečkova)라는 학생 기숙사가 있었다. 이 기숙사는 양종성찬 시대의 체코 교회 학생들을 위해 세워진것이다. 약간 떨어져 블타바 강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고 1519년에 슈마바 지역의 보우비나에서 프라하로 온 뽀우스떼브닉(Poustevník)으로 알려진 설교가 마뗴이 (B. Matěj)가 진흙벽돌로 세웠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1520년에 프라하의 빈민들을 헌신적으로 이곳에서 보살폈다. 대담한 설교로 옥에 갖히고 결국 프라하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우리들의 여행은 이곳 바르또로메이스까 거리에서 오던 길을 되돌아 동쪽방향으로 걸어간다: 나 뻬르슈띠녜 (Na Perštýně) 거리와 만나는 사거리까지 걸어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다음 왼쪽편 거리 마르띤스까 (Martinská)까지 걷는다. 여기서 종교개혁 시대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12. 쁠라띠스 – 전 후스 개혁 시대의 과거가 깃든 공간

12. 쁠라띠스 – 전 후스 개혁 시대의 과거가 깃든 공간
(Platýz – areál s předhusitskou minulostí)

17세기 루돌프 2세의 궁정원이었던 플라텐슈타인의 플라타이스(Plateise z Platteneteinu)가 건물을 기초한 이후, 또한 나중에 앙피르 양식(프랑스 제정 양식:역자 주)과 고전주의 양식으로 재시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앞 건물 안 안뜰 공간 속에 본래의 르네상스 양식은 잘 보존되어있다. 그리고 몇몇 창고 안에는 오래 전의 구시가 성벽 기초석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있다. 그 당시 프라하 지형도에 의하면 중세 그 장소에 고딕식 집이 있었다. 그 집 주인들은 후스 개혁 시대의 멀지 않은 벽 속의 마르띤 교회와 또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양종 성찬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체코 개혁의 과정들을 암시하는 또 다른 묻혀있던 기념물들을 상기시킬 수 있다. 첫번째 지역 여행에서 이미 여섯번째 순서이다. (2, 5, 7, 9, 10회)

15세기 초에 오래된 고딕식 집 주인은 구시가 시장(市長)이자 엿기름 만드는 이였던 스트지브로의 얀 브라다띠(Jan Bradatý ze Stříbra)였다. 이 사람은 1419년 후스주의자들 리스트에 등록한다. 반 후스개혁 전쟁 때에는 프라하의 성배 주의자들 편에서 싸운다. 1426년에는 우스띠 나드 라벰 전투에서 십자군에 맞서 싸우기도 한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 때에는 이 집에서 두 후스개혁파의 우두머리가 모여 주요한 회의를 연다. 온건파를 이끈 사람은 성 일리 교회의 프지브람의 얀(M. Jan z Příbramě)이고, 급진파 주동자는 영국 옥스포드 뿌리를 따라 ‘파인 잉글리쉬’라 불리우는 뻬뜨르 빠이네(M. Petr Payne) 였다. 리빠니 전투 패배 (30.5.1434) 이 후에는 벽 속의 마르띤 교회의 행정원까지에게도 신뢰를 얻었던 끄볘뜨니체의 홀레츠(Holec z Květnice)가 집을 소유한다. (교회 천정 아치 부분의 그림 비교) 쁠라따이스 기사는 1586년 집을 매입하여 르네상스 양식으로 집을 개축한다. (그의 이름으로부터 연유하여 나중에 사람들은 이 건물을 쁠라띠스라 부른다.)

쁠라띠스로 프라하 개혁 유적지 여행 첫 부분을 마감하도록 하자. 쁠라띠스 벽으로부터 나로드니 트지다(Národní třída)를 지나 10월 28일 거리(ulice 28. října)로 가서 바츨라프 광장의 무스텍 역으로 가자.

(첫 부분을 모두 돌아보는 데에는 25-35분 정도 소요된다.)

11. 벽 속의 성 마르띤 교회

11. 벽 속의 성 마르띤 교회 (Kostel sv.Martina ve zdi)

교회의 이 독특한 이름은 중세 교회 형태와는 다른 모습과 관련이 있다.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던 성 마르띤 채플은 예전의 성 마르띤 우예즈드 (움푹 파인 길이라는 뜻:역자주) 지역에 있었다. 바츨라프 1세 집권 시절인 1232년 구시가 성벽이 완공된 이후 채플의 남쪽 벽이 성벽에 포함된다. 1350년 고딕 양식으로의 재건축이 끝난 이후에도 신 교회는 계속 성벽의 일부로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후스개혁 시대에는 양종성찬 교회로 흡수된다. 이 곳에서 얀 후스(Ja Hus)는 사제 서품 이후 첫 설교를 하게 된다. 지역 교회의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베들레헴 채플의 완공 후 마르띤 교회는 베들레헴 채플과 \"동등한\" 지역 교회가 된다. 그래서 1414년 가을, 당시 신부였던 흐라데츠의 얀(Jan z Hradce)은 후스 이후 베들레헴 채플을 담당하던 야꼬우벡(Jakoubek)의 부름을 받아 일반 신도들에게도 성배가 주어지는 양종 성찬을 시작 할 수 있었다.

이 성찬 방법(라틴어로 sub utraque parte – 양종 성찬법)은 야꼬우벡(Jakoubek)에게 1415년 봄 콘스탄츠 감옥에서 보낸 응답으로 후스가 승인 한 것이다. 베들레헴 설교관에서 나온 이 개혁적인 소식은 성찬식에서 성배를 모든 이가 함께 공유한다는 의견에 대한 큰 강조였다. \"평신도 성배\"는 일찌기 다른 교회에서도 이루어졌다. 후스의 순교 이후 바츨라프 4세는 프라하 사람들에게 프라하의 8개 다른 교회에서도 양종 성찬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벽 속의 마르띤 교회는 베들레헴 채플의 지역 교회로 반 개혁 초기시절, 즉 양종 성찬의 마지막 목사였던 야꿉 야꼬비데스(Jakub Jakobides)가 1621년 프라하를 추방 당했을 때까지 역할을 다하였다. 1678년 교회는 차츰 화재를 당하였지만, 약 100년 후 바로크 양식으로 조금씩 바뀔 즈음 재건될 수 있었다.

바로크 시대 교회 옆에 그의 조각으로 프라하를 장식하였던 조각가 가족인 브로꼬프家(rodina Brokoffů)의 사체가 안장되어있다. (교회의 북쪽 측면에는 F.M. 브로꼬프 초상이 부조되어있는 현판이 잘 보존되어있다.)

요제프 개혁시대인 1784년 마르띤 교회는 없어지고, 계속 가게 창고로 쓰여지다가 나중에는 야간 카페로도 쓰인다. 1904년 프라하 자치 당국은 낡은 교회 건물을 사들여 1905-6년까지 건축 공사를 하게 한다. 그 당시 내부 공간 안에 있던 성물 안치소가 발견 되어 원래의 로마네스크 양식대로 복원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세워지고 프라하 시는 영어 예배를 위하여 감리교단에 이 교회를 대여한다. 나중에 교회는 저녁 학생 청년 예배를 위하여 체코 형제개혁교단에 위탁된다. 체코 형제개혁교단은 1975년 교회 공사에 관여하게 되는데, 몇 번의 공사를 더 거친 후에는 교회 내부에 오르간도 설치한다.

교회 재단 뒤 반원형으로 된 부분에 펼쳐진 성서와 함께 있는 성배상은 체코 개혁의 기본적인 상징이다. (상징은 이 책 표지에 나와있다.) 지붕 아치에 있는 두 문장은 중요한 두 후스파 시대의 가문의 문장을 의미한다: 블까노프家(Vlkanov, 반은 개, 반 늑대 – 오른편)와 끄볘뜨니쩨의 홀레츠家 (Holec z Květnice, 왼편의 백합 문장).

벽 속의 마르띤 교회 뒷편 연와조 건물안에 나로드니 트지다(Národní třída)로 통하는 복도가 두 개 나 있다. 이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20m정도 넓은 복도와 쁠라띠스 마당까지 올라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