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학사 지역 (밀리츠의 예루살렘)

10. 학사 지역 – 밀리츠의 예루살렘

베들레헴 광장에서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서 종교개혁 시대 이전의 유적과 관련된 문화재를 만나게된다. 재건축한 학사 일대의 둘러싸인 담 안에 회색 수녀(šedy sester) 수도원인 성 바르토로메 바로크 교회당의 탑이 높이 솟은 곳이 있는 꼰빅스께 울리쩨 (번역하면 학사 거리 – 옮긴이) 까지 걸어간다. (평일에 건물의 일부가 장식무늬의 아치와 연결된 새롭게 수리된 앞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좁은 통로 길을 따라 바르또로미예스까 울리쩨 (바르토로메 거리 – 옮긴이)까지 걸어나오면 교회당 입구가 나온다. 왼쪽(동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학사 지역을 둘러볼 만 하다.)

설교자들을 교육하던 끄로미에지쉬의 밀리츠 (Milič z Kroměříž)가 1472년에 조직한 프라하 매춘녀들을 수용하는 새 예루살렘(Nový Jeruzalém) 이라는 사회복지 시설이 있었던 장소가 바로 이 학사 지역이다. 사회복지 시설은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일부 건물을 까렐 4세가 대학에 주었고 나머지는 시토 수도회에 넘겼다. 후에 밀리츠 추종자들의 모임이 이 시설을 다시 시작하였고 그리고 베들렘 까펠 운영을 위한 유리한 조건들을 만든 갱신운동을 도왔다.

반 종교개혁 시대에 시토 수도회를 이어 1660년에 독일을 포함하여 귀족집안 출신의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서 멋진 학사를 이곳에 건축한 예수회가 구 건물들을 차지하였다. 젊은 귀족들이 (개혁파 가문 출신도 포함하여) 로마 카톨릭 종교교육을 이곳에서 받았다. 예수회가 해체된 후(1773년) 인쇄소로 용도변경을 위해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한때 대규모 식당이었던 곳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들, 음악회와 무도회가 열렸다. (1798년 이곳에서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863년에 바그너 Richard Wagner가 연주를 하였다.) 1840년에 이곳에서 첫번째 체코 무도회가 열렸고 나중에 이곳은 영화관이 되었다. 1830년부터 이곳은 안토닌 드보작(Antonín Dvořak)이 공부를 했던 프라하 오르간 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재건축된 학사 지역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고있다. 바르또로미에이스까 거리 남동쪽의 모퉁이에 이 문화재의 주요 일지를 적은 작은 문화재 설명판이 있다.

바르또로미에이스까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블다바 강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12세기 초의 가장 오래된 로마 로툰 양식의 성 크지슈 채플에 다다른다. 바로 가까운 까롤리나 스비에뜰라 거리 모퉁이에 (316호 건물에) 후스파 시대에 레츠꼬바 (Rečkova)라는 학생 기숙사가 있었다. 이 기숙사는 양종성찬 시대의 체코 교회 학생들을 위해 세워진것이다. 약간 떨어져 블타바 강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고 1519년에 슈마바 지역의 보우비나에서 프라하로 온 뽀우스떼브닉(Poustevník)으로 알려진 설교가 마뗴이 (B. Matěj)가 진흙벽돌로 세웠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1520년에 프라하의 빈민들을 헌신적으로 이곳에서 보살폈다. 대담한 설교로 옥에 갖히고 결국 프라하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우리들의 여행은 이곳 바르또로메이스까 거리에서 오던 길을 되돌아 동쪽방향으로 걸어간다: 나 뻬르슈띠녜 (Na Perštýně) 거리와 만나는 사거리까지 걸어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다음 왼쪽편 거리 마르띤스까 (Martinská)까지 걷는다. 여기서 종교개혁 시대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9. 슈띠뜨니 주택

9. 슈띠뜨니 주택

후스파 시대 초기에 베들레헴 까펠 바로 동쪽으로 남 체코 지주인 슈띠뜨니의 토마쉬 슈띠뜨니(+1401)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지은 고딕건물이 있었다. 그는 체코 종교개혁자들의 일반대중 지도층에 속하였으며 체코 시골에 그리고 나중에는 프라하에 토지를 구입하여 종교개혁을 도왔다.

토마쉬 슈띠뜨니는 까렐 대학 제 1회 졸업생이 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시골 저택에서 대가족을 돌보기 위해 대학과 신부의 길을 포기하였다. 얀 밀리츠와 대학 선생들의 학생들을 위한 설교에 받은 깊은 감동으로 편지를 썼고 기독교인의 바른 삶에 대한 설교형태의 글쓰기에 깊이 빠졌었다. 그리고 청소년들을 위해서 (“클럽 대화” 1370년) 처럼 더 폭 넓게 특별히 농촌을 위해서 (“일요일과 공휴일 대화” 1392년) 중세 라틴어 방식과 다른 체코어로된 많은 신앙적이며 교육적인 소책자들을 발간하였다. 특별히 그의 중요한 저술인 1376년에 발간된 “기독교의 일반적인 사항에 대한 6권의 책”은 종교개혁 운동을 촉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슈띠뜨니는 말년에 생존한 두 자녀 아네슈까와 얀과 함께 영적인 삶과 일반적인 도덕의 갱신을 위한 노력의 희망적인 근거지였던 프라하 베들레헴 까펠 부근에 살았다. 그의 딸 아네슈까를 위해 후스의 설교단 오른쪽 위쪽에 있는 특별 좌석 가운데 유명한 인사의 좌석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얀 후스 선생의 저서 “어린딸, 그리고 구원의 바른 길을 깨달음에 대하여”는 그녀에 대한 글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슈띠뜨니 주택은 종교개혁 프라하 유적지로 선정되었다.

8. 베들레헴 채플

8. 베들레헴 채플(Betlemská kaple) – 신축 건물

원래 이 채플은 바츨라프 4세(Václav Ⅳ)의 궁정원이었던 밀 하임의 얀(Jan z Milheimu)(혹은 하누쉬, Hanuš)(독일 원명은 „폰 뮐하임“)의 재원과 채플 자리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부유한 상인이었던 바츨라프 크쥐쉬(Václav Kříž)의 기부로 1391년 5월 24일 착공하여 1394년 완공한다. 이 둘은 프라하지역에 오직 설교만을 위한 공간을 세우고 싶어했던 밀리치와 마뗴이의 소망을 이루는데 한 몫 했던 것이다. (기증 받은 토지가 공사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을 알자 그 옆에 묘지 였던 자리와 식료품을 보관하고 있던 공공 창고 및 일반 토지를 매입했어야 했다.)

약 3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15개의 기둥이 있는 이 고딕식의 건축물은 (개혁 운동의 적을 나타내는) 밀하임이 기초한 선언문의 내용 대로 – „베들레헴, 번역하면 떡집이라는 뜻으로 일반인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신성한 설교 말씀으로 충만해 지는 곳“ – 사용되어져야 했다. 성인들, 신학생 등 베들레헴의 신생 기념물로 취급되었고 이는 곧 대학과도 연결 되었다. (까롤리눔의 원로 지도자들과 프라하 시장은 이러한 설교자들의 규정에 곤혹스러워 하였다.)

이 채플은 교회법이나 의무를 다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단지 설교관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 할 수 있었으며 체코 개혁의 첫 선언의 장이 될 수 있었다. 얀 쁘로띠보프 신부(Jan Protivov, 1396년 까지)와 꼴린의 슈뗴판 (M. Štěpán z Kolína, 1402년 까지) 이후 얀 후스(Jan Hus)가 설교자가 된다. (대학에서 까지) 얀 후스는 베들레헴 설교관에서 늘어나는 청중들의 흥미에 따라 대학 내에서 선별된 개혁사상의 울림들을 스스로 체험하게 된다. 초기에는 (1408년까지)영국의 종교 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Viklef)의 사상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프라하의 개혁 신학자 밀리치(Milič)와 야노프의 마뗴이(Matěj z Janova)의 사상에 따라 교황이 지배하는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였고, 이후에는 전쟁을 목적으로 한 면죄부 판매에 따른 결정적인 저항정신을 설교하였다.

후스가 설교 할 때에는 배운 사람들이건 못 배운 사람들이건 전 시민 계층이 함께 어우러졌다. (소피에 여왕(Královna Žofie)도 심복 얀 쥐슈까(Jan Žižka)를 대동하고 설교하는곳에 왔었다.) 후스의 늘어나는 신도들 때문에 프라하의 다른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감소로 불만을 품었다. 후스는 또한 몇몇들을 혁신시켰다. 교회의 그림들과 조각상들을 십계명과 사도들의 간증내용, 찬송가 가사들로 교체시켰다. 예배시간에는 직접 만든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교황의 파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와 교육 활동은 계속되었다. 프라하에 성무금지령(1412년 9월 모든 종교의식활동을 금지)이 내려지자 이제는 교외로 내려간다. 그 곳에서 종교회의에 참석하시 위하여 콘스탄츠로 떠날 때까지 좀 더 넓은 하늘아래에서 설교를 한다. (동시에 주된 작품들을 완성한다.) – „주님을 증언하리라, 주님의 가장 신실한 성서를 위해서라면 죽음까지 견디리라.“ 조금 더 덧붙이자면, 후스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에 분노한 체코 귀족들은 1415년 9월 2일 콘스탄츠에 있는 공의회에 452명이 서명을 한 항의 조항을 보낸다. 이는 로마 카톨릭 지배 권력에 대항한 첫 항거이자, 첫 체코 프로테스탄트의 진정한 외침이었다.
후스의 순교이후 (1415년 7월 6일), 목사 자리는 그 당시에 대학 총장이었던 스트지브로의 야꼬우벡(M. Jakoubek ze Stříbra)이 물려받는다. 그는 모든 신자들이 예배시간에 성배를 모시는 것까지 아우르는 개혁 프로그램을 끌어들이는데에 성공한다. (드레스덴의 목사들, 특히 미꿀라쉬(M. Mikuláš) 목사의 지원을 바탕으로) (콘스탄츠 감옥에 수용되어있던 후스의 동의 이후, 야꼬우벡은 주위의 ‚벽 속의 마르띤 교회‘(Kostel Martina ve zdi)에도 양종성찬의 전례를 적극 권유한다. 평신도 성배는 베들레헴 채플에서도 교회 최고 권력은 로마 교회 계급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최고라는 개혁에 관한 신념으로 뚜렷하게 드러났고, 그 때문에 얀 후스는 최고 법원에 항소를 하였다. 야코우벡 이후로 베들레헴 채플의 새로운 목사는 드라호프의 바츨라프(Václav z Dráchova)가 되었다. 그러나 리빠니 전투 이후 1346년 지그문트 황제는 프라하로부터 그를 추방시킨다. 1448년 뽀제브라디의 이지왕이 집권하자 베들레헴 설교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추방당하였던 기간동안 그를 대신하여 일리 교회의 프지브람의 얀(M. Jan z Příbramě)이 공석을 메웠다.
야겔론 왕조의 루드빅이 집권하였을 1521년에는 이 곳에서 또한 독일어도 사용되었었다. 마틴 루터 박사(dr. Martin Luther)의 신실한 제자였던 또마쉬 뮌처(Tomáš Müntzer)가 대학 귀빈으로서 프라하에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뮌처가 체코의 양종성찬 주의와 독일 개혁사상이 밀접해지는 것에 도움을 주리라 기대 하였으나 오히려 급진적으로 그 자신의 새로운 세례와 사회에 관한 의견을 선전하는데에 급급하였다.

그 당시 루터 사상에 관심이 있었던 독일시민그룹은 또마쉬 뮌처(Tomáš Müntzer) 를 프라하로 초청하였다. 체코어로 통역된 설교를 하면서 뮌처는 후스의 사상에 이의를 제기 하였고, 그의 설교는 민중 계급 속에서 더 특별한 목소리를 내었다. 체코 뿐 아니라 독일에도 널리 전파 하려했던 하느님 나라를 체코에 강제로 건설하려 했던 후스파의 목적과 연관된 곳에서 우선 먹혀들었었다. 그러나 대학 내의 교수들은 뮌처의 사회 급진론과 천년왕국설을 거부하였다. 뮌처는 강제 추방을 당하기 전까지 기독교 사회의 혁명적 부흥에 관한 “선언서”를 내는 것에 만족해하였다. 뮌처가 지방 봉기에 실패한 후 1525년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하였을 때, 프라하에서는 그의 독일 및 체코 추종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탄압을 당하였다.

베들레헴 채플은 1609년 7월 12일 루돌프 2세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양종성찬 교회 하에 있었다. 그 때까지 법 외에 있던 체코 형제애단(Jednota bratrská)의 사용까지도 허용이 되었을 때였다. 새 교회의 행정관은 1618년까지 마뗴이 찌루스(B. Matěj Cyrus)였고, 1620년부터 1622년까지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이 나중에 꼬멘스끼의 사위가 되는 얀 찌릴(Jan Cyril)이었다. 반 개혁파가 집권하고 난 후 몰수당한 채플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재산이 되고 1661년 예수이트들에게 판다. 예수이트들은 고딕식의 박공을 없애고, 설교관을 가렸으며 벽에 있던 문장들도 제거하였다. 그러나 지붕 밑 다락방을 포함한 채플의 일부분을 후스주의 사람들의 설교관을 위하여 도로 판매한다. 1777년 예수이트 법령이 해재된 후 채플은 사용되어지지 않았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문을 닫고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1781년 관용령이 선포된 후 프라하에서 새로 발족된 개혁교회 모임을 위해 사용되었다. 1786년 이미 황폐해 진 채플은 파괴된다. 단지 세 벽만 남은 자리에 1836-37년 꽤 큰 아파트 건물이 세워진다.

프라하 개혁주의파들과 체코 애국주의자들은 “체코 개혁의 요람” 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채플을 재건하려는 노력은 친카톨릭의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는 거의 허사였으며 게다가 채플자리 일부분이었던 255호집은 독일인의 소유였다. 1919-20년에 걸쳐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채플의 일부분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첫 민족의회는 아파트를 사들여 베들레헴 채플을 재건하자는 얀 헤르벤(Jan Herben) 작가의 안건을 받아들였다 한다. 그러나 까롤리눔 신축을 우선시 한 까닭에 이 계획은 무산된다. 이 과제는 후스 박물관 협회의 과제로 남아있었으나 이도 재정 부족문제가 있었다. 1941년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앞장을 서 베들레헴 채플 재건을 위한 특별 위원회가 발족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파트는 독일인 재산으로 압류되고 건물을 없앨 수 있었다. 피에타 상과 더불어 원래 채플대로의 재건축은 체코슬로바키아 문화부에서 담당하여 1950년에서 1954년 사이에 복원된다.

신축된 베들레헴 채플은 지붕 대들보로 크기가 나타나 있는 대로 이전의 평면 모양과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동쪽 벽면이 예전 그대로의 부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 대형 고딕식 창문, 설교인들의 집과 설교관 입구이다. 서쪽 부분은 세 고딕식 창문이 복원되었다. 채플 공간안에 있는 원래의 우물도 그대로 두었다. (깊이 8미터) 후스와 야꼬우벡의 글에서 따온 벽에 있는 문장뿐 아니라 신자들이 찬송을 위해 쓰였던 노래 가사도 복원되었다. 옌스끼의 후스시대 필사본과 리헨탈의 콘스탄츠 연대기, 벨리슬라프의 성서 내용에 따른 그림들이 추가 되었다. 동쪽 벽면 뒤쪽에 있는 기념 현판은 이 곳에서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후스의 항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던 세 청년(마르띤, 얀, 스따셱)이 은신하였으며, 구시가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음을 알려준다. – 채플 서쪽으로 고딕식의 정문과 더불어 설교자의 집도 예전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이 곳에서는 몇 년간 얀 후스도 제자들과 생활하였었다. (이 집안에는 이전 중세스타일의 타일이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 이 채플에서는 후스의 활동 뿐 아니라 베들레헴 채플이 재건되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7. 성 일리 교회

7. 성 일리 교회 (Kostel sv. Jiljí, 라틴어: Aegidius)

후스 거리(Husova ulice)에서 도미니크 수도원 블록을 따라 (북쪽으로) 고딕식 성 일리 교회의 바로크식으로 개축된 입구까지 약 100미터 정도 죽 올라가 보도록 하자. 이 곳은 1339년에서 1371년 사이에 주교였던 드라쥐체의 얀(Jan z Dražic)과 첫 대주교였던 빠르두비체의 아르노슈트(Arnošt z Pardubic) 하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지어졌던 곳이다. (두 설립자의 문장은 교회 정면에 있다.) 큰 아치형 지붕아래 왼편에 있는 기념현판에 적힌 사실대로라면 이 곳에서 1364년-1374년까지 10년 동안 끄로므녜쥐쉬의 얀 밀리치(Jan Milič z Kroměříže, 성 하벨 교회에서 개혁 설교 시작함 – 성 하벨 교회)와 반세기 이후 이 곳에서 밀리치의 활동을 재개하였던 주요한 후스주의 이론가 프지브람의 얀(M. Jan z Příbramě)이 후스 주의 시대에 활동하였었다.

얀 밀리치(Jan Milič)는 그 당시 이 교회 설교실에서 „불 같은 언변“으로 신자들을 압도하였고, 슈띠뜨니의 또마쉬(Tomáš ze Štítného)도 이에 관하여 열정적인 증언록을 출간한 바 있다. 그래서 그 이후 베들레헴 교회 신축 공사를 마무리 지었을 때였던 1394년, 프라하에 그의 가족을 정착시키게 된다. 이 곳에서 밀리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베니스“라는 매음굴의 매춘부들까지도 크게 감화시킨다. 결국 그 곳에 1372년 신학교 학생들을 위한 성직자의 집 이외에도 성서에 나오는 이름인 예루살렘으로 불리우던 성 마리아 막달레나 채플 옆에 회개하는 여인들을 위한 임시 보호소도 세운다. (콘빅트 거리 지역에 있는 오늘날의 콘빅트 자리에 세우게 된다.) 이 두 건물 주위에 성례 성찬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믿는 이를 위한 기도와 참회의 공동체‘가 생겨난다. (이 단체 활동은 베들레헴 채플 완공 이후에도 계속된다.)
1370년부터 밀리치는 성 미꿀라쉬 교회와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주일 뿐 아니라 매일 주기적으로 설교한다. 동시에 악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비판하고, 세속화 된 교회의 치유를 위한 종교회의를 열 것을 권고하였기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체포 당한다. 1374년 8월에 로마와 아비뇽에서 연달아 열린 종교 회의에서 그는 이러한 것들을 교황 앞에서 증명을 해야만 하였다. 그의 예루살렘 건물들은 이듬 해 수도사 기숙사로 전환된다.
프지브람의 얀(M. Jan z Příbramě)은 후스 운동 초기부터 양종성찬 온건파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얀 젤립스키와 나중에 타보르파의 일원이 되는 파인 잉글리쉬가 이끄는 급진파의 절대적인 적이 된다. 카렐대학에서 강의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인문학부 학장이 된다. 1420년에는 ‚프라하 4개 조항‘을 야꼬우벡과 함께 작성한다. 1436년부터는 야꼬우벡의 뒤를 이어 베들레헴 교회의 행정일과 설교를 도맡아 했던 드라호프의 바츨라프(Václav z Drachova)를 지그문트 황제가 파면시키자, 얀은 일시적으로 베들레헴 교회의 행정관이 된다. 드라호프의 바츨라프는 뽀제브라디의 이지 정권이 되어서야 교회로 돌아 올 수 있었고, 1437년 프지브람은 바실리 종교회의의 후스파 대표단의 일원이 되어 얀 로키찬을 도와 신자들의 성찬에 관한 개혁적인 정당성을 주장한다. 1439년에는 장로 회의에서 후스파 집행부의 행정관으로 임명된다. 행정관으로 활동하면서 로키찬(M. J. Rokycan) 대주교를 도와 바실리 선언의 내용을 교황이 정식으로 승인하는데에 있어 온건하게 압력을 행사하는데 한 몫을 한다. 이러한 노력은 1448년 그가 사망 할 때까지 계속된다.

블라디슬라프 2세 집권시절, 일리 교회의 후스파 목사는 미할 뽈락(Michal Polák) 이었다. 그는 양종 성찬 교회의 대부가 되었을 만큼 뛰어난 신학자이자 열렬한 설교자였다. 1480년 양종성찬주의자들의 폭동 참가로 카톨릭 재판을 받고, 다른 두 명의 후스파 목사들과 함께 까를슈떼인 황실 감옥에 감금된다.
1420년부터 빌라 호라 전투가 있던 1620년까지 일리 교회는 프라하에서 양종성찬주의를 보호하는 요새 중 하나였다. 그 때 하벨 잘란스끼(Havel Žalanský)라는 목사 또한 빌라 호라 전투에서의 프로테스탄트의 패배에도 불구 하고, 사망할 때까지 후스나 예로님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었던 얀 루냐치우스 도마줄리츠끼(Jan Luňacius Domažlický)도 1621년 12월 프라하로부터 추방당할 때까지 용감하게 행동하였다. – 반 개혁시절 1733년 교회 내부를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한다. 특히 남쪽 측면에서 보이는 근엄한 고딕 양식의 교회 외부와 그 옆의 거대한 도미니크 수도원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일리 교회에서 „체코 개혁의 요람“이라고 명명되어진 베들레헴 교회까지는 아주 가깝다. 후스거리 오른편에 첫 공과대학(První česká vysoká škola technická) 건물을 지나 위로 계속 올라가 보자. 예전 자료들에 의하면 이전에는 거리 오른편에 2개의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한다. 후스 거리에 3/238번지 자리 뒤에 베들레헴 교회 공동 설립자 였던 바츨라프 크쥐쉬(Václav Kříž) 상인이 다른 땅들과 함께 소유했던 고딕식의 집이 있었다 한다. 1419년 크쥐즈는 이 집을 베들레헴 기숙사에 기증 하였다. 그 이후 이 집은 나자렛 기숙사(Nazaretská kolej)라 하여 후스 신학부생을 위한 건물로 쓰여졌다. (1954년 베들레헴 채플 개축이후, 1960년에는 원래 기숙사 였던 고딕 부분을 후스 박물관으로 재시공 하였다. 동시에 베들레헴 교회로 이어지는 회랑도 공사하였다. 오늘날은 이 부분이 베들레헴 광장으로부터 들어오는 입구가 되어있다.) 베들레헴 광장 코너 쪽 바로 옆, 지금의 2/352 번지 집 자리에는 마뗴이 라우다(Matěj Lauda)라는 사람이 양종성찬 성직자들의 교육을 위하여 지은 아뽀슈똘(Apoštolská: 사도라는 뜻, 역자주)이라 불리우는 다른 후스파 기숙사가 있었다. 우리는 광장 코너에서 신축한 베들레헴 채플의 첫 모습을 보게 된다.

[프라하 종교개혁 유적지 순례] 6. 스따레 미에스또의 성 미할 옛 교회당

6. 스따레 미에스또(Staré Město 주: 번역하면 구 도시)의 성 미할(sv. Michal) 옛 교회당

마당의 왼쪽(북쪽)에 있는 오늘날 식당으로 바뀐 신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정면을 보면서 얀 후스 선생 시대부터 이미 유명해진 이 장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후스(Hus)는 베들레헴 채플에서 일하기 전인 1311년부터 원래 고딕양식의 성 미할 교회당인 여기서 자주 초빙받아 설교를 하였다. 당시 주임신부는 즈데라즈의 베르나르드(Bernard ze Zderazu) 였다. 후스와 예로님(Jeronym) 두 사람은 이 교회에서 대학의 다른 선생들과 만나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1399년 여기서 후스는 위클리프의 몇몇 논문에 대해 폭 넓은 대화를 나누었다.
1406년부터 성 미할 교회에서 후스와 같은 고향이자 신실한 친구 프라하띠쩨 크지슈땬선생(M. Křišt´an z Prachatic +1439)이 활동하였다. 그는 1411년 3월 15일 자신의 교회에서 열린 후스 파문에 대한 논의를 용감하게 거부하여 프라하 시민들의 커다란 신망을 받았다. 후스파 혁명이후 양종 성찬 지지자들의 프라하 꼰지스또즈의 초대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1412년에 후스에 이어 교수회의에서 총장에 선출된 까렐 대학에서 가르쳤다. 총장으로 재직 중에 성 미할 교회와 대학에서 특별히 면죄부 판매 반대를 목표로 하는 학구적인 토론을 계속하였다. 벽 속의 마르틴 교회(kostel u Martina ve zdi)에서 양종 성찬의 성만찬 시행 직후 1414년 가을에 이 교회에서 같은 성만찬이 시행되었다. 양종 성찬의 주요 창시자 야꼬우벡 선생(M. Jakoubek)이 그 당시 여기서 자주 설교를 하였다.
1415년 봄에 성 미할 교회의 크지슈땬은 콘스탄츠(Constance 번역자 주: 후스의 종교재판이 열린 도시이며 독일남부의 스위스 국경을 접하는 도시)로 체포된 친구 후스를 만나러 떠났으나 일정기간 수감되었다가 후스가 사형되기 직전 풀려나 프라하로 돌아왔다. 크지슈땬이 죽은 뒤에 성 미할 교회에서 12년간 사제로 믈라도뇨비쩨(또는 믈라데노비쩨)의 뻬뜨르 선생(M. Petr z Mladoňovic 또는 Mladenovic +1451)이 활동을 하였다. 대학에서 후스의 유능한 제자인 그는 1414년 가을에 콘스탄츠 공의회의 후스 동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그리고 그는 까렐 대학의 동행 대표단 대표 흘룸의 얀(Jan z Chlumu) 귀족의 비서 였다. 대표단은 기록자로 외교관으로 그리고 많은 편지를 대필하는 자로 일하였다. 콘스탄츠에서 후스가 체코직후 처형되지않도록 도왔으나 어떠한 공개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감옥에서 자신의 선생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다방면으로 도움을 호소하여 결국 콘스탄츠 화형장까지 그를 동행하였다.

콘스탄츠에서 프라하로 돌아온 후 믈라도뇨비쩨의 뻬뜨르는 목격자로서 후스에게서 일어난 사소한 모든 사건들을 „콘스탄츠에서의 얀 후스 선생 소식(Zpráva o M. Janu Husovi v Kostnici)“ 체코어 제목 아래 라틴어 연대기를 발간하였다. 그것의 마지막 부분은 선별된 후스의 편지들과 함께 프라하 후스 교회들이 얀 후스 화형 기념일마다 읽는 „후스의 고난“이 사본으로 첨가되어 있다.

후스파의 혁명의 시대에 뻬뜨르는 대학 선생으로 임명된 이후 온건파 양종 성찬 지지자들의 입장에 섰다. 1420년 말 급진주의적인 따보르파 대표들과의 신학적 논쟁에 참석하였으며 1426-1427년에 철학부 학장이 되었고 1440-1441년까지 크지슈땬 선생의 후임으로 총장이 되었다. 후에 얀 로키차나(M. Jan Rokzcana) 선생의 후스파 노선에 접근하였으며 로키차나의 프라하 대주교 승인에 대한 로마 교황청과의 협상을 위한 외교관으로 등장하였다.(II/5).

후스파 시대 초기에 미할 교회에 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비뜨고바 산(Vítková hora 주: 프라하 까를린에 있는 말 동상이 있는 산) 에서 지그문드의 십자군을 물리치면서 이른 첫번째 대승리 직전에 일어났다. 1420년 7월 15일 공포로 뒤덮여 있을 때 따보르파의 귀족 바츨라브 꼬란다(Václav Koranda St.)가 교회당 둥근 아치 천장 아래로 말을 타고 들어와 교회당의 긴 좌석의자를 떼어 적군의 공격에 대항하던 비뜨고바 산에 튼튼한 바리케이트를 쳤다.

믈라도뇨비쩨 이후 미할 교회의 책임자는 종교개혁 발전을 위해 커다란 의미가 없는 대체로 온건한 구 우트라퀴스트 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200년이 넘게 후스파 개혁과 관련이 있었다. 빌라 호라(Bílá hora 번역자 주: 번역하면 백산, 여기서 백산에서 벌어진 카톨릭파와 개혁파간의 전쟁을 의미함) 이후 아일랜드 수도회로 넘겨져 교회 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을 하여 수도원으로 운영하였다. 요세핀의 개혁 시대인 1789년에 수도원은 폐쇄되고 교회당은 창고로 변경되었다. 그 후 200년간 두 건물들은 완전히 황폐화되어 옛날 종이 창고로 사용되었다. 최근 1990년대에 많은 비용을 들여 프라하시가 문화적인 목적을 위해 교회당을 식당으로 개조하였다. (그 공간에서 카프카의 개념에서 프라하 역사를 설명하는 „성 미할의 비밀“ 문화 시청각 프로그램이 상영된다.)

미할 교회당 마당에서 (북쪽 골목길이 다시 멜란트리호바 거리로 다시 나오는) 다시 미할 교회로 돌아간다. 여기서 왼쪽(남쪽 방향)으로 20 미터쯤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우 줼레즈 드베지(U železných dveří 번역자 주: 번역하면 초록색 대문들 곁에 있는) 19/436호 집 골목길로 나온다. 마당을 가로질러서 옛날 주인들의 이름들이 있는 커다란 문화재 기념판 곁에 잠시 멈춘다. 그 이름들 가운데 종교개혁시대에 살았던 두개의 이름이 있다. „시와 종교 권리 변호사“였던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이 미치던 당시 프라하 신 우트라퀴스트 대변인이었다) 리보슬라브의 얀 흘라브사(Jan Hlavsa z Liboslavě +1534)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체코 반 합스부르크 혁명에 참가한 프라하 우트라퀴스트의 유명한 교인인 얀 슈짜스뜨니 골리아쉬(Jan Št´astný Goliáš)으로 그는 „명예와 재산의 손실에 대한 언도“를 받았으나 사형 전에 외국으로 도망하였다.
„우 젤레즈니흐 드베지“(주: 초록색 대문들 곁에 있는) 집 안마당에서 일스께 거리(Jilské ulice)로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약 50미터쯤 가서 왼쪽으로 돌아 야로브초바(Jarovcová) 좁은 골목길을 만난다. 여기서 도미니카 수도원의 높은 벽을 따라(왼쪽편에 있는) 걸어서 왼쪽코너까지 가서 후소바 거리(Husová ulice)를 가로질러 (여기서 후스파 시대인 1448년에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가 국내 통치자로 불안한 프라하를 통치했을 때 첫번째 프라하 거주지로 구입한 거대한 집 „우 펠리카나(U Pelikána)“가 서있었다. 5년뒤 그러나 이 집은 파괴되고 멀지않은 제띠에조바 거리(Řetězová ulice)에 있는 상속받은 군슈따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IV/1a)) 반대편 모퉁이집(후소바 거리 10호)에 체코 캠페인(이라섹(Jirásek) 소설 비엑(F.L. Věk)의 소재로 등장한, 번역자주: 체코 문화 전통 정신 등을 보호하고 알리는 일)을 위해 그 집을 두 번째 거주지로 삼았던 바츨라브 마뗴이 크라메리우스(Václav Matěj Kramerius) 문화재 기념판이 있다.

바츨라브 마뗴이 크라메리우스(Václav Matěj Kramerius +1808)은 프라하 기자이며 민속잡지와 책 발간자이며 체코 종교개혁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체코 애국과 개몽의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요셉 2세(Josef II)의 관용의 칙령에 관한 서적 발간(요셉의 책, 관용의 달력)을 좋아하였으며 개혁교도에 대한 관용에 공개적인 공감을 표현하였다. 개혁교도들의 책들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으며 특별히 끄랄리츠까 성경(Kralická Bible)를 더 높이 평가하였다. 체코 관용의 교회로 파송한 헝가리 출신의 개혁교도의 설교자들의 설교 통역을 돕고 그들을 위해 기도문, 예배순서 그리고 심지어 칼빈의 신앙고백 번역서를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