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15. 새로운 상황 1989 – 1990

15. 자유와 민주의 회복이후 새로운 상황 1989년 – 1990년

체코슬로벤스꼬 공화국 전체주의 통치에 저항했던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힘이 1989년 11월 “힘없는 자들의 힘”의 유효성이 증명되었다. 비폭력적인 “벨벳혁명”의 며칠동안 겁에 질리고 당혹해한 공산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교인들은 정치상황의 드라마 같은 변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모든 신학교 학생들은 11월 17일 유혈사태이후 스트라이크에 동참하였고 많은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완전한 민주의 회복을 위해 새롭게 형성된 “시민 포름”을 지지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장 요셉 흐로마드까(Josef Hromadka)박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26차 총회의 회장이자 체코개신교회 협의회 회장 이었다. 그는 폭력을 행사 하거나 의지하지않고 위기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 관계자들과 협상하는 책임을 맡았다.

42년 후 (1948년부터) 절대권력의 공산당의 전횡이 깨어지고 자유 공화국에서 모든 시민의 민주적 권리들이 회복될 수 있었다.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의 대통령 선출(1989년 2월 29일)은 체코슬로벤스꼬 역사의 중요한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박해 받고 자신의 직위에서 해고된 정권에 반대한 많은 반정부인사들이 새롭게 형성된 사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민족을 이해하는 정권”의 의회에 일부 인사들은 진출하였다.

이러한 변동의 상황에서 1990년 초부터 종교의 자유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졌다. 교회에 대한 국가 감시가 취소되었다. 개혁 신학부는 까렐 대학에 소속되었다. 모든 교회들에게 에큐메니칼 협력의 가능성이 열렸다. 많은 연합감사예배와 다양한 에큐메니칼 모임들이 열렸다. 오랫동안 우세했던 반종교적인 선전들이 정규적인 주일예배, 영적인 대화와 교회와 에큐메니칼 소식들의 신문 방송등 언론매체의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 연합활동으로 체코형제개혁 첫번째 위원회는 다른 교회 대표들이 새로운 교회법의 제언에 대한 의견들을 준비하도록 하였으며 종교인과 교회를 언급하는 다음 법들과 규칙들의 주의 깊은 관찰과 준비에 주목하였다. 1990년 27차 총회는 체코형제개혁교회에서 종교교육을 강화하였다. 특별위원회는 “시민교육” 시간에 목회자들이 종교교육이 가능한 학교 또는 지역교회에서 각각의 상황에 따라 시행된 종교교육의 커리큘럼을 승인하였다. 어린이 지체 부자유 아동들과 그 부모들을 위한 수련회를 확대하였다.

이런 다양한 영적인 활동 외에 교회에서 교회 찬송가의 몇 차례 인쇄가 있게 한 점증하는 예배의 삶에 대한 노력이 있었다. 외국 교회들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1979년 말 바덴(Baden,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마치 1988년 두권의 교회력 예전이 바덴 개혁교회의 도움으로 출판된 경우와 비슷하다.

체코형제개혁교회가 세운 학교는 첫 단계로 전문학교 형태였다. 프라하에서 사회사업 과목외에 현대언어 학과도 갖춘 “개혁 아카데미”가 세워졌다; 브르노(Brno) 와 나호드(Nachod)의 전문학교들은 홈 케어(환자 노인을 가정에서 돌보는 사회봉사)와 사회봉사 활동을 목표로 하였다. 흐라데쯔 끄랄로베(Hradec Kralove)에서 임시 설교자와 교리문답 교사 양성을 위해 성경학교가 설립되고 끄로미에지쉬(Kromeriz)에서 음악과 교리문답 교사 교육을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다. 청소년을 위한 사역은 청소년 부서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교육제도에 따라 재조직되었다. 청소년 모임, 청소년 사역자 모임, 다양한 목적을 갖는 여름봉사활동, 외국에서 젊은이들의 참석이 가능한 모임을 포함한 모임들의 숫자가 점증하였다. 컨퍼런스 프로그램의 높은 비율이 청소년에게 부담이 되었고 “형제애(Bratrstvo)”라는 청소년을 위한 잡지의 내용이 폭이 넓어졌다.

확대된 평신도 교육은 대중적으로 사회의 영향을 주는 교회의 개방된 사고와 같은 의미 있는 유사성을 갖는다. 위원회는 언론매체를 위해 새롭게 조직된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대표를 예배와 기타 종교 행사 방영 준비에 다른 교회 대표들과 공유하는 라디오 텔레비젼 방송의 종교 방송 편집진에 파송할 수 있었다. 이러한 중요한 활동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총회는 독립된 교회 스튜디오 설립을 허락하였다.

자랑할 만한 내용으로 새로운 차원의 상당히 발전된 다양한 디아코니아 봉사를 들 수 있다. 기독교적인 도움의 상담봉사(프라하 – 살바또르, 브르노, 오스트라바)외에 프라하 10, 끌로보우까(Klobouka), 끄라브치쩨(Krabcice), 나호드(Nachod), 프제로우체(Prelouce), 뽀드보잔(Podboran), 야브로네쯔(Jablonec n. N.)과 미스리보지쩨(Mysliborice)에서 차례대로 사회사업 센터가 설립되었다. 공식적인 직원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 외에 디아코니아는 수많은 자원봉사 협력자들을 갖게된다. 교회의 사회사업학교의 졸업자들부터 디아코니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지역 교회, 지역 노회는 양로원, 병원 그리고 망명자 수용소 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기독교 봉사의 이처럼 다양한 형태와 함께 기독교 증언의 새로운 형태를 동시에 찾았다. 전도의 새로운 개념은 과거의 비종교적인 해석의 경험에서 그리고 새로운 찬송가의 형태의 증언에서 계속될 수 있었다.

활동의 새로운 가능성과 형태의 중심에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교회는 올바른 경향의 추구를 멈출 수 없었다. 최근 총회는 새로운 길은 올바른 조사와 과거 시대의 정당한 평가 없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개혁교회사]14. 교회 정체성을 위한 투쟁 1977-1989

14. 현실사회주의 아래서의 교회 정체성을 위한 투쟁 1977년 – 1989년

77헌장 지지자들과 절대 권력에 맞선 저항자들의 용감한 투쟁의 도덕적 깊이는 올바른 신학 경향을 위한 체코형제개혁교회 내부 토론의 중요한 반응을 일으켰다. 마치 급진적인 따보르파와 함께 온건한 프라하 신학자들에 의해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던 후스 시대 처럼 현실사회주의의 억압 아래 체코형제개혁교회 안에서 두개의 중요한 논쟁이 형성되었다: 1. 교회활동의 보장된 합법적인 가능성을 통해 평화적이고 분쟁 없는 방법을 추구하는 – 온건한 대다수 그리고 2. 고백교회의 의미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어려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비타협 정책을 지지하는 – 급진적인 소수 그룹. 모든 총회 때마다 급진적인 목소리는 신학적 토론에서 언제나 흘러나왔다. 총회의 지지를 받는 교회 지도자들이 정부 당국자들과 파트너 관계를 열기위해 노력하였다. 지속적으로 교회의 존재와 활동을 보장 받을 수 있도록 대화와 협상을 통해 야기된 모든 문제들과 위협적인 분쟁을 해결하기위해 노력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 안에서 십자가 아래서 교회의 고백과 증언으로서 옛날 형제단의 경우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일반적으로 우세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인권 문제는 체코형제개혁교회 안에서 많은 교인들의 주장이기도 하였다. 1977년 5월 교회의 31명이 단체로 국가회의에 신앙과 교회 차별에 대한 문서와 모든 종교의 자유의 실질적인 보장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서명자는 주로 정부에 의해 교회활동이 중지된 젊은 목회자들 그리고 교회의 몇 몇 명망 있는 평신도들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불의를 반대해야 하는 책임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실제 교회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서 모순을 일으켰다. 총회는 활동 중에 있거나 아니면 국가로부터 목회 활동이 중지된 서명자 목회자들에게 경고로 질책하도록 결정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54명의 체코형제개혁교회 목회자들이 목회 활동이 금지되었고 많은 신학생들이 제적되었다. 총회는 국가 기관들에게 교회의 법과 시민의 권리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각각 다른 것임을 환기시켰다; 총회는 “합법적인 저항” 과 “공식적으로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락된 것”으로 해석 결의를 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디아코니아 활동의 갱신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몇 몇 설교가들은 목회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고 제적된 학생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 관청의 차원에서 국가는 구체적인 범법 사례와 특별히 어린이와 청소년 종교교육 그리고 문서 사업의 제한된 활동을 공지하였고 노회와 총회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기위해 국가 정보기관과 감시기관의 반복되는 도청과 감시, 교회 봉사직의 선출에 대해 소위 “사전 국가동의”라 불리우는 승인과 “국가의 불신임”의 조건에 의한 동의의 거부를 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올바른 신학경향에 대한 토론은 정규적으로 목회자 컨퍼런스와 특별히 총회 프로그램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대부분 근본적인 신학적 차원에 대한 개방된 토론은 의견의 일치를 이루었다. 때때로 심지어 심각한 논쟁이 있지만 각각 다른 신학 경향의 사람들은 성만찬에 그리고 교회의 영적일치의 보호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을 확인하는 화해의 형제의 영으로 언제나 함께 모일 수 있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총회 협의방식은 개방성 – 전체주의 통치의 중심에서 – 민주주의 의회의 방법들을 반영하였고 국가 기관의 주의 깊은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80년대 중반 소비에트 연방에서 고르바초프(M. Gorbacov)가 “글라스노스뜨(개방)”과 “뻬쩨스뜨로이(개혁)”의 토대 위에서 정치적 경제적 개혁의 새로운 길을 선언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민주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불행하게도 공산주의 권력자들은 일반적인 선언에 집착하였고 전체주의 정책의 과정과 무기력한 경제구조의 변화를 실천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의 제1공화국의 민주주의 전통을 잊지않고 있던 “침묵하는 대다수”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자유와 민주의 회복을 위해 다양한 “시민운동”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국가 기념일에 공산당의 인민 군대와 경찰에 의해 진압된 대중집회와 시위들이 발생하였다. 1987년 제25차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 후 교회 지도자들은 종교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에 관한 “법 개정안”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안이 1988년 말에 국가 행정기관에 제출되었다. 1989년에 법무부와 국방부와 협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봄 민주적인 자유의 회복을 위한 대중 서명 운동인 “몇 개의 문장” 이라는 새로운 시민운동이 조직되었고 모든 교회 많은 교인들이 이 서명운동에 참가하였다. 위기의 상황이 정치적 변동을 성숙시켰다. “진리와 자유의 삶”(하벨의 구호)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 1989년 11월 16-18일 프라하에서 열린 제 26차 총회기간에 이 요구가 표명되었다. 11월 17일 총회의 저녁 회의때 혁명적인 사태의 소식이 전달되었다.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나로드니 트지다(Narodni trida)거리에서 경찰의 잔인한 진압에 의한 대량학살 소식을 전달 받고 총회 회의는 중단되고 침묵 기도 후 이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움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당시 총회의 선언은 모든 사태를 발생시킨 전제정치에 대항하는 첫번째 공개적인 저항이었다.

[개혁교회사]13. 생존 투쟁 1949 – 1977

13. 전제주의 통치사회에서의 생존 투쟁 1949년 – 1977년

“공산당의 지도력 아래서의 노동계급에 의해 정부의 모든 권력이 이양되었다.”는 공식적인 선언이 있었던 1948년 2월 정치적 구테타 이후 교회들도 새로운 상황을 직면하게 되었다. 체코 개혁교도들은 자신의 민족의 진보적인 사회주의적 노력에 동감하였기에 사회제도의 올바른 건설에 대한 사회주의적 사상과 포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괴롭혔던 전제주의 통치의 폭력과 불법으로 체코개혁교도들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정치적 반대자로 간주되면 처형되거나 갖히거나 노동수용소 또는 군부대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친척들은 범죄자들이 되었다.

체코형제 개혁교회 뿐 아니라 전 교회적으로 영적 지도자였고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던 요셉 르믈 흐로마드까 (J. L. Hromadka)교수의 활동에 의해 많은 교인들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사명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노력 하였다. 기독교 공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총회에 몇 차례 성명서에서 밝혀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치적 변화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증언을 해야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외적으로 확산되는 무신론주의 그리고 점증 되는 교회에 대한 차별을 기독교 증언의 무관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도움이 제거 되어야만 하는 교회의 시련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자신의 존재 – 그루터기가 되는 것 – 의 새로운 외적 조건을 받아들였다. 복음 전파와 교회의 사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종교개혁의 정신적인 단체 (후스파 종교개혁과 형제단 종교개혁)의 이전 활동과 관련된 “종교개혁의 정신의 연맹(SCED)”이 1952년부터 체코형제개혁교회안에서 활동을 확산시켰다. 목회자들의 신학교육을 지원하고 국내 국제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등을 숙고하였다. 외부의 압력이 강화되는 시기에 어려움을 겪는 목회자들과 그 가족들을 지원하였다. SCED의 활동은 강제적으로 1974년 내무부의 결정에 의해 막을 내렸다.

60년대에 몇몇 맑스주의 철학자 – 특별히 마호베쯔(M. Machovec)교수 – 교회들 에게 환영을 받은 기독교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당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새로운 현대의 형태의 자신의 “헌법”을 갱신하여 1966년 총회에서 결정하였다. 불행하게도 대화의 희망과 정의롭고 인도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 어느 하나도 성취되지 못하였다.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가 통치원칙으로 선언되고 유물론주의의 무신론이 유일하게 유효한 삶의 관점으로 정착되는 현실이 당시 새롭게 선포된 “사회주의 공화국(CSSR)”의 시대에 많은 교인들에게 사회주의 국가 정책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불신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것도 변화 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은 그 당시 생존을 위해 많은 교인들을 “국내의 이민자”로 그리고 수동적인 “은둔자들”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존재의 순수성과 올바른 기독교의 경향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지속되는 이중적인 노력은 숨김없이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에서 발표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총회는 각종 교회헌법의 정관과 구체적인 탄원과 청원으로 국가 행정기관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하였다.

1968년 공산주의 체제의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두브첵(A. Dubcek)의 시도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교회에 불러일으켰다. 불행하게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려진 짧은 기간이 쏘비에트 군대와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군대가 체코로 진주하면서 1968년 8월 21일 끝이 났다. 1969년 2월에 열린 체코형제개혁교회 16차 총회가 “우리 민족의 총회”라는 특별 메시지에서 이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고수하였다. 그 다음해 전제주의 통치자의 가혹한 형태의 무자비한 정치적 숙청이 공식적으로 “정상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었다. 그러나 이 무자비한 억압은 교인들을 포함한 잠복중인 반 공산주의 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교인으로 1969년 1월 16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얀 빨라흐(Jan Palach) 학생의 희생은 젊은 세대의 내적 저항의 강렬한 표현이었다.

체코슬로벤스꼬 공화국 정부가 서명한 1976년 헬싱키 시민 권리에 대한 국제협정 선포이후 민주화 운동 “77헌장(Charta 77)”의 지지자들이 모든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실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77헌장의 일차 서명자들 가운데 체코형제개혁교회의 19명의 목회자와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어지는 정부의 탄압으로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일터를 떠나야 했다. “77헌장”은 시민의 책임 운동으로서 자유와 민주의 회복을 위한 꿈을 민족적으로 각성 시킨 유명한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힘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인들은 내적 힘의 새로운 필요성과 자신의 교회의 확고한 토대 위에서 영적 방향을 위한 도움을 자각 하였다. 여기서 신실한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복음의 자유로운 선포와 기독교 목사의 다양한 형태의 목회를 위해 투쟁하였다.

[개혁교회사]12.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1918 – 1989

12.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1918년 – 1989년

반 종교개혁이 오랫동안 16세기 체코 개혁자들 사이에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장애가 되었다. 1861년 종교개혁에 대한 칙령이 발표된 이후 체코 개혁 교도들에게 처음으로 외국 자매 교회들과의 접촉이 허용되었다. 외국의 개혁 교도들은 당시 자신들의 믿음의 체코 형제들과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영적으로 그들에게 회들과의 접촉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접촉은 목회자들의 연합 컨퍼런스에 지지를 보냈고 물질적으로 도왔다. 1821년부터 외국 대학인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개혁 신학부에서 체코 신학생들이 공부할 가능성이 열린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관계는 그러나 양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복잡한 국제 정치관계의 시기에 중단되었으나 후에 다시 재개 되었다.

개혁교회의 교인들은 올바른 에큐메니칼 협력은 체코 국내에서 작은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1905년 프라하에서 후스의 경험으로 “콘스탄츠(후스가 화형을 당한 스위스 국경을 접한 독일 도시)의 연대”라는 상징적인 이름 아래 1주년 체코 국제 종교개혁 단체가 설립되었다. 절대적인 로마 카톨릭 국가 안에서 종교개혁의 단체들이 성장하고 종교개혁의 소수파의 자의식과 그들의 사명이 강화되었다. 이 단체들이 오늘날 다시 많은 에큐메니칼적이고 영적이며 문화적인 활동들에 참여하고 있다. 주간지 “콘스탄츠의 불꽃”과 신학월간잡지 “크리스찬 리뷰”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슬로바키아 개혁 교회들과의 접촉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접촉은 목회자들의 연합 컨퍼런스를 더 발전시켜 계간지 “Theologia evagelica”(1948-1951)의 발간이 이루어졌다.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연합되기 이전부터 체코개혁교회는 “세계개혁교회연맹(당시 세계 장로교연맹)”의 회원교회가 되었으며 후에 연합교회로서 “세계 루터교회 연맹”과 “연합교회연맹”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는 기독교회 일치를 지향하는 활동에 참여 하였으며 특별히 1925년 스톡홀름(Stockholm)회의와 1927년 로잔(Lausanne)회의에 참여하였다. 1948년부터 세계교회협의회(WCC), 1959년부터 유럽교회회의의 회원교회가 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대표들은 1973년 로이엔베르크 콘코르디아(Concordia of Leuenberg) 준비와 활동 그리고 계속되는 신학토론에 참여하였다. 그때부터 해외의 개별 자매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단체들과의 교류가 성공적으로 확대되고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조직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에큐메니칼 협력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1954년 에반스톤의 2차 세계교회협의회 회의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에큐메니칼 교회 협의회를 조직하도록 자극하였다. 사회주의 사회의 어려운 환경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개혁 교도들은 개혁 교회의 신앙의 토대에서 세계의 사건에 대한 응답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세계평화의 주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1958년 프라하 기독교 평화회의가 조직되었으며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개혁교회는 동서유럽의 개혁교도들의 만남에 의해 폭 넓은 단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후에 전 세계에서 많은 교회들이 이 회의에 참여 하였다. 흐로마드까(J. H. Hromadka) 및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다른 중요한 인사들이 처음부터 기독교 평화 회의에 참여하였다. 1968년 소위 “프라하의 봄”의 정치개혁이 강제로 탄압된 이후 정치적으로 “정상화(normalizace, normalization)” 운동의 시기에 특별히 이 평화운동은 정부의 간섭과 이데올로기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소위 “제 3세계”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평화회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내에서 교회들 사이에 에큐메니칼 협력은 단지 정부기관의 감시 아래에 계속될 수 있었다. 에큐메니칼 교회협의회는 실제로 각 회원 교회들의 대표자로 구성된 협의체로서 존재하였다. 반면 에큐메니칼 교회협의회 몇몇 활동 위원회(특별히 성서와 에큐메니칼 연구를 위한 위원회, 기도 생활 실천위원회, 여성활동 위원회, 성서발전 위원회 – “성서 사역”)는 시들어가는 에큐메니칼 단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89년 말경 형식적인 에큐메니칼 사업은 “우리 역시 사회의 아픔을 외면했고 오랫동안 침묵했었다”는 교회협의회 마지막 회의 성명서로 폐지되었다. 새로운 에큐메니칼 사업은 지역 교회와 개 교회의 차원에서 실질적인 과제와 협력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교회들 사이의 형식적인 교리가 아니라 말씀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교회의 일치에 근거한 새로운 성서연구가 에큐메니칼 관계의 토대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성서의 권위의 관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이 형제로써 발견된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의미는 일치된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삶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일치된 확신 속에 있는 것이다.

[개혁교회사]11. 동서유럽 강대국의 통치 1938-1949

11. 동서유럽 강대국의 통치 1938-1949년

1938년까지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교인숫자는 325,000명으로 늘어났다. 200개 개교회와 219개의 기도처에서 약 200여명의 목회자들이 그들을 영적으로 돌보아 주었다. 100개의 교회당이 신축 또는 개축되었다. 이어지는 독일 파시스트 위협의 시대에서 변화하는 세계의 사회와 정치 문제들이 교회의 과제로 다루어져야 했다.

1938년에 서유럽 강대국들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강화되는 압력에 굴복하여 “뮌헨 협정”에 의해 3백만 명 수데텐 독일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분리와 나찌 독일 제국의 합병 동의를 하였다. 이 수데텐 지역의 체코인 거주민들은 체코와 모라비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1939년 3월 그러나 히틀러는 나머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소위 “보호령”이란 법규는 6년간의 독일 나찌 점령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6개월 후 1939년 9월 1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체코와 모라바의 보호령”이 존재하는 엄격한 독일 통치하의 체코 영토 전역에서 전쟁의 요인이 잠복 되어 있었다. 게슈타포에 의해 지도되는 나찌들이 여기서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유태인들은 제거되었고 체코 민족의 모든 계층들 특별히 지식계층은 강압에 굴복하였다.

교회 역시 나찌 정복의 시대에 가장 다양한 형태의 억압으로 박해를 받았다. 많은 목회자들 교인들이 반나찌 저항운동에 참여하였고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혔다. 저항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축출을 당하고 교회의 많은 젊은 교인들은 독일 제국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폐교된 체코대학 가운데 개혁 신학부도 있었다. 당시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젊은 신학도들을 위해 신학수업의 비밀 장기과정을 만들었다. 전쟁 직후에 학업을 끝마치고 교회 봉사를 위해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았던 소위 “집사”들이 이 방법으로 교육을 받았다.

1945년 전쟁 후 나찌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고 수데텐 독일인(약 350만 명)의 대부분이 독일로 추방되었다. 몇몇 개교회들뿐 아니라 전후 체코형제개혁교단이 수데텐 독일인들의 삶의 파괴 문제를 다루었다. 많은 체코 기독교인들이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특별히 어린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옛 수데텐 독일인들이 살았던 비어있는 지역에 새로운 정책자들 실레시아(Slezsko),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에서 귀향한 체코 개혁교도들이 정착하였다. 이로 인해 체코형제개혁교단은 특별히 체코 서부지역에서 새롭게 교회를 설립하고 조직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다. 교세가 270개 개교회 그리고 이지역에서 400개 기도처 그리고 약 350,000으로 늘어났다. 몇몇 국경지역 개교회에서 독일 예배가 진행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전쟁직후 독일인 약 160,000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에 많은 개혁교인들은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교회로 가입하였다. 예로 아쉐(Ase) 흐라니체(Hranice) 야히모바(Jachymova) 그리고 베이쁘르띠(Vejprty) 이다.

1945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주권이 형식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급진적인 변화 하에서 갱신되었다. 서유럽 동맹국들의 배신적인 정책(뮌헨협정)에 대한 깊은 실망 이후 자유 공화국의 시민들은 소련연방의 승리에 점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946년 선거 후 가장 강력한 당이 된 새롭게 형성된 공산당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였다. 1948년 2월에 정부의 변혁이 준비되었고 점차적으로 공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따라 통제를 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엄격한 국가 감시 하에 들어갔으며 교인들은 시민의 자유를 박탈당하였다. 새로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종교의 자유가 법에 의해 보장되었으며 교회 내부 활동은 허락되었으나 실제로 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1949년 국가에 의한 교회재정 보장에 대한 법이 발표되었다. 공산 정부는 교회의 물질적 보장과 모든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거머쥐게 되었다. 이로 이하여 재신이 “국유화”된 교회들은 정부에 경제적으로 의존을 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정부의 통제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회월보의 문장까지 교회활동의 모든 것을 승인하는 “교회를 위한 정부부서(SUC)”가 만들어졌다. 소위 “영적활동에 대한 국가의 동의”는 개 교회 설교가들에 대한 규칙 뿐 아니라 초청받은 설교자에게도 필요하였다. 어떠한 교회의 활동을 위해 허락 받은 기부금은 대부분 필요한 교육이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고 단지 감시자의 역할만을 하는 담당관리의 의사에 따라 사용되어졌다.

점증하는 정치적 전제주의의 강대국의 억압 하에서 날로 힘을 얻어가는 반 종교적 반 교회적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억압으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새로운 힘든 투쟁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외적으로 존재하여 내적인 보전을 하는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