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자유와 민주의 회복이후 새로운 상황 1989년 – 1990년
체코슬로벤스꼬 공화국 전체주의 통치에 저항했던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힘이 1989년 11월 “힘없는 자들의 힘”의 유효성이 증명되었다. 비폭력적인 “벨벳혁명”의 며칠동안 겁에 질리고 당혹해한 공산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교인들은 정치상황의 드라마 같은 변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모든 신학교 학생들은 11월 17일 유혈사태이후 스트라이크에 동참하였고 많은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완전한 민주의 회복을 위해 새롭게 형성된 “시민 포름”을 지지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장 요셉 흐로마드까(Josef Hromadka)박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26차 총회의 회장이자 체코개신교회 협의회 회장 이었다. 그는 폭력을 행사 하거나 의지하지않고 위기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 관계자들과 협상하는 책임을 맡았다.
42년 후 (1948년부터) 절대권력의 공산당의 전횡이 깨어지고 자유 공화국에서 모든 시민의 민주적 권리들이 회복될 수 있었다.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의 대통령 선출(1989년 2월 29일)은 체코슬로벤스꼬 역사의 중요한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박해 받고 자신의 직위에서 해고된 정권에 반대한 많은 반정부인사들이 새롭게 형성된 사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민족을 이해하는 정권”의 의회에 일부 인사들은 진출하였다.
이러한 변동의 상황에서 1990년 초부터 종교의 자유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졌다. 교회에 대한 국가 감시가 취소되었다. 개혁 신학부는 까렐 대학에 소속되었다. 모든 교회들에게 에큐메니칼 협력의 가능성이 열렸다. 많은 연합감사예배와 다양한 에큐메니칼 모임들이 열렸다. 오랫동안 우세했던 반종교적인 선전들이 정규적인 주일예배, 영적인 대화와 교회와 에큐메니칼 소식들의 신문 방송등 언론매체의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 연합활동으로 체코형제개혁 첫번째 위원회는 다른 교회 대표들이 새로운 교회법의 제언에 대한 의견들을 준비하도록 하였으며 종교인과 교회를 언급하는 다음 법들과 규칙들의 주의 깊은 관찰과 준비에 주목하였다. 1990년 27차 총회는 체코형제개혁교회에서 종교교육을 강화하였다. 특별위원회는 “시민교육” 시간에 목회자들이 종교교육이 가능한 학교 또는 지역교회에서 각각의 상황에 따라 시행된 종교교육의 커리큘럼을 승인하였다. 어린이 지체 부자유 아동들과 그 부모들을 위한 수련회를 확대하였다.
이런 다양한 영적인 활동 외에 교회에서 교회 찬송가의 몇 차례 인쇄가 있게 한 점증하는 예배의 삶에 대한 노력이 있었다. 외국 교회들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1979년 말 바덴(Baden,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마치 1988년 두권의 교회력 예전이 바덴 개혁교회의 도움으로 출판된 경우와 비슷하다.
체코형제개혁교회가 세운 학교는 첫 단계로 전문학교 형태였다. 프라하에서 사회사업 과목외에 현대언어 학과도 갖춘 “개혁 아카데미”가 세워졌다; 브르노(Brno) 와 나호드(Nachod)의 전문학교들은 홈 케어(환자 노인을 가정에서 돌보는 사회봉사)와 사회봉사 활동을 목표로 하였다. 흐라데쯔 끄랄로베(Hradec Kralove)에서 임시 설교자와 교리문답 교사 양성을 위해 성경학교가 설립되고 끄로미에지쉬(Kromeriz)에서 음악과 교리문답 교사 교육을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다. 청소년을 위한 사역은 청소년 부서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교육제도에 따라 재조직되었다. 청소년 모임, 청소년 사역자 모임, 다양한 목적을 갖는 여름봉사활동, 외국에서 젊은이들의 참석이 가능한 모임을 포함한 모임들의 숫자가 점증하였다. 컨퍼런스 프로그램의 높은 비율이 청소년에게 부담이 되었고 “형제애(Bratrstvo)”라는 청소년을 위한 잡지의 내용이 폭이 넓어졌다.
확대된 평신도 교육은 대중적으로 사회의 영향을 주는 교회의 개방된 사고와 같은 의미 있는 유사성을 갖는다. 위원회는 언론매체를 위해 새롭게 조직된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대표를 예배와 기타 종교 행사 방영 준비에 다른 교회 대표들과 공유하는 라디오 텔레비젼 방송의 종교 방송 편집진에 파송할 수 있었다. 이러한 중요한 활동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총회는 독립된 교회 스튜디오 설립을 허락하였다.
자랑할 만한 내용으로 새로운 차원의 상당히 발전된 다양한 디아코니아 봉사를 들 수 있다. 기독교적인 도움의 상담봉사(프라하 – 살바또르, 브르노, 오스트라바)외에 프라하 10, 끌로보우까(Klobouka), 끄라브치쩨(Krabcice), 나호드(Nachod), 프제로우체(Prelouce), 뽀드보잔(Podboran), 야브로네쯔(Jablonec n. N.)과 미스리보지쩨(Mysliborice)에서 차례대로 사회사업 센터가 설립되었다. 공식적인 직원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 외에 디아코니아는 수많은 자원봉사 협력자들을 갖게된다. 교회의 사회사업학교의 졸업자들부터 디아코니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지역 교회, 지역 노회는 양로원, 병원 그리고 망명자 수용소 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기독교 봉사의 이처럼 다양한 형태와 함께 기독교 증언의 새로운 형태를 동시에 찾았다. 전도의 새로운 개념은 과거의 비종교적인 해석의 경험에서 그리고 새로운 찬송가의 형태의 증언에서 계속될 수 있었다.
활동의 새로운 가능성과 형태의 중심에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교회는 올바른 경향의 추구를 멈출 수 없었다. 최근 총회는 새로운 길은 올바른 조사와 과거 시대의 정당한 평가 없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