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일 집사월례회 안건을 통해서 본 우리교회 보흐니쩨 정신병원 사역이해
선교 활동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11)
땅끝까지이르러/ (29) 내가 좋아하는 체코 이름(姓) (11)
체코의 많은 이름들 가운데 “페인(Peyn)”이란 이름을 나는 좋아한다. 이 이름은 체코에서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희귀성(稀貴姓)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 매니아를 아마 “폐인”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그 비슷한 발음의 이름이다. “페인”은 원래 18세기 무렵 영국에서 온 선교사의 이름을 체코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자신의 선교지에 묻혀, 그의 이름이 이제는 체코의 많은 이름(姓)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우리 꼬빌리시 교회가 보흐니쩨 정신병원 호스피체에서 상담자 한 사람을 파송 하였다. 남편은 의사이고 두 아기의 어머니이다. 그들은 프라하 2구역에 있는 비노흐라드 교회 신실한 교인이다. 그녀의 이름이 “렌까 페이노바” 이다. “렌까”는 이름이고 “페이노바”는 성(姓)이다. 다른 서구의 나라들 처럼 체코에서도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자의 성(姓)을 따른다. 그러나 체코에서는 남자의 성(姓)에 여성을 표시하는 “~오바”를 붙인다. 그녀가 결혼하여 따른 남편의 이름이 바로 영국 선교사의 후예들의 이름인 “페인”이다.
한 선교사가 선교지에 묻혀 자신의 이름의 가계(家系)를 이룬 것이 이 땅에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나의 이름도 그처럼 체코 교회역사에 올라 갈 수 있을까?” “나도 그처럼 나의 후손들이 대대로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을까?” “아시아의 유색인종으로서 유럽의 백인사회에서, 이제 기독교의 역사가 갓 200년이 넘는 한국의 기독교인으로서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기독교 문명의 사회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것이 체코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추어질까?” “영국인 선교사를 바라보는 체코인들의 시각이 한국인 선교사에게도 같을까?”
주후 80년대부터 체코에 정착한 유대인 디아스포라, 800년대에 그리스 정교회 선교사들의 선교, 중세시대에 로마 카톨릭의 국교, 로마 카톨릭의 십자군과 후스 개혁파들의 전쟁, 후스 개혁파들의 강온파 노선들의 전쟁, 기독교를 전면적으로 부인한 공산정권의 통치, 양차 세계전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기독교 문명에 대해 절망하는 체코교회, 사회주의체제 아래서 기독교 문명 재건을 시도한 체코교회, 지금도 재정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체코교회 – 기독교에 대해 온갖 풍상을 겪고 반기독교의 무신론적인 사회로 뒤돌아 앉은 체코사회이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는 사회이니 아시아 출신의 기독교 선교사는 이 사회에 가장 싫어하는 요소들만 갖춘 셈이다.
그러나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천신만고 끝에 이제 간신히 반기독교의 무신론 사회의 껍질을 뚫을 수 있는 방도를 찾고 준비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제 함께 그 두꺼운 껍질을 뚫고 복음을 심어야 할 일꾼이 필요하다. 체코한국기독협회에서 계획하는 신학연구소(선교센터)에서 그리고 한국문화 소개를 매개로 지역교회들에게 “오픈 하우스” 프로그램을 정착시켜 나갈 수 있는 일꾼이 필요하다. 이 지면을 빌어 공개적으로 구애(求愛)를 하고싶다. 체코선교를 위한 한국의 “페인”을 간절히 찾고 있다.
해외생활의 긴장이 장기화될 때 알게 모르게 변화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문득 문득 발견할 때 마다 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7) 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뒤따르려고 노력한다. 선교사가 대과 없이 선교사의 인생을 마치려면 모름지기 사도 바울의 이 가르침을 뼈에 새기고 핏 속에 흐르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하게 된다.
그동안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으로 흐르지 않으면서 객관적으로 선교일반과 체코선교를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건조하고 지루한 글이 되었다. 귀한 지면에 동참하여 부족하지만 체코선교의 삶을 한국교회와 나눌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한 기독공보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준 독자들에게 감사 드리며 아울러 체코교회와 선교를 위해 많은 기도를 부탁 드린다.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10)
땅끝까지이르러/(28) 체코한국 기독협회 (10)
이 글을 쓰던 엊그제 일이다. 프라하의 한 교회 목회자이면서 교단의 목회자 후보를 지도하는 중책을 맡고 있고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병원, 군대, 형무소 등에서 활동하는 목회자들의 협력과 연대를 위한 연합회 구성을 나와 함께 준비하고 있는 친구 목사가 있는데 그가 교인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재 섬기는 교회를 사임하고 군목을 지원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아마 네 명의 자녀를 양육하기에 힘든 경제문제가 원인일 것이라 짐작이 된다. 이처럼 교회의 사명과 그 실천에 의욕을 가지고 시작한 목회자들이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박봉으로 인한(체코 목회자들의 봉급은 정부 문화부 예산으로 편성된다) 경제적인 현실의 어려움 또는 전통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해 좌절하거나 현실과 타협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좌절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목회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뜻과 희망이 꺾기지 않도록 그리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도록 돕기 위해 체코한국기독협회를 설립하였다. 체코교회는 아직 선교의 개념을 폭넓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리적 관점에서 전도와 선교의 개념의 차이를 구분하고, 주로 기독교 사회봉사를 교회의 사명으로 이해하고 있을 정도이다. 일부 오순절 계통의 신앙 공동체(종교를 담당하는 정부 문화부에 교회로 등록을 하지 못한 기독교 단체)쪽에서 노방전도를 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반감으로 그 효과에 아직 많은 이들이 동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체코교회의 현실에서 교회협력 선교를 위해서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선교의 개념을 일깨워주면서 동시에 선교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작업의 필요성을 시간이 흐를수록 절감하고 있다.
내년 4월에 이 단체 산하에 기독교 교류 활동을 전담할 선교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그 개념과 활동 내용에 대해 관계자들과 진지하게 연구를 하고 있다. 선교신학 소개, 서구의 피선교지 교회들의 발전과 그들의 신학과 교회의 경험 소개, 생존이 지상과제였던 체코교회의 개혁신앙의 경험을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그것을 세계교회들과 나누는 일, 체코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찾는 일, “오픈 하우스” 프로그램 개발과 관리와 지원 등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상하는 선교센터는 신학적인 연구기능과 함께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리고 선교를 위한 체코인들과의 접촉방법으로서 “문화”를 활동의 범위에 넣게 되었다. 막상 선교현장에 와서 이미 오래 전부터 서구 선교의 흐름이 목회자의 활동에서 평신도 전문 사역자들의 활동으로 그 중심의 축이 옮겨가게 된 이유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체코 내에서 활동하는 미국과 서유럽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모국어인 영어와 축구, 농구, 야구, 인 라인, 보드 스케이트 등 젊은 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재능을 선교현장에서 활용하고 있는 평신도들이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정보가 넘쳐 나고 동시에 반 기독교적인 정서가 팽배한 체코사회에서의 선교는 직접적인 복음전달 보다 문화와 다른 전문성을 통한 선교현장과의 만남이 반듯이 우선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직접적인 선교가 아닌 영어나 독일어와 같은 자국의 문화를 매개로 선교지에 접근하는 미국과 서구 선교사들의 경험으로부터 한국 선교사인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를 지나치게 수단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면서 선교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경험한 체코와 슬로바키아인들은 책 읽기를 즐거워하고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체코와 한국의 기독교와 문화를 비교함으로써 독자들이 간접적이지만 기독교와 문화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나눔터 +(플러스)”라는 잡지를 체코 한국어로 일년에 두 차례 발간하고 있다. 천부가 인쇄되어 체코와 슬로바키아 전국 교회들, 관심있는 개인들과 단체들 그리고 20여 곳의 정부기관과 주요 도서관들에 배포되고 어느 정도의 여분을 두어 새로운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 인들을 만날 때 활용하기도 한다. 지속적이지 못하고 단발성의 프로그램으로 끝날 때도 많지만 체코인들을 위한 또는 한국인들을 위한 그리고 체코와 한국인들을 모두를 위한 문화행사와 강좌를 다양하게 기획하고 있다. 이 활동들은 체코인들과의 폭 넓은 교류와 접촉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주며 정착되는 프로그램들은 열린교회 “오픈 하우스”를 생각하는 체코교회 목회자들의 목회현장과 연결 될 것이다.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9)
땅끝까지이르러/(27) 나의 목사 나의 친구 이지 슈토렉 (9)
이지 슈토렉은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목사였다. 체코형제교단의 소개로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그 무렵 그가 프라하에서 유일하게 슬램화 되어가던 프라하 4구역의 아파트 단지 교구 안에 있던 카톨릭 교회 그리고 감리교회에게 에큐메니칼 선교프로그램을 제안하여 모임을 시작했을 때였다.
그러나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그 지역 교회 목회자가 자신의 교구에서 활동하는 같은 교단의 이지 슈토렉 목사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계속 갈등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갈등이 다른 교단과 교회의 사람들 보기 민망해서 내가 직접 나서서 한번은 이지 슈토렉 목사에게 프라하 4구역에서의 활동에 손을 떼고 프라하 8 꼬빌리시 지역에서 활동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때는 이미 나의 가족이 이지 슈토렉 목사가 시무하는 꼬빌리시 교회의 교인으로 출석을 하며 그를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우리는 체코교회의 사명과 선교적 과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교육 봉사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교회의 중요한 과제로 이해를 하고 있지만 체코교회는 구조적으로 이 교회의 과제들이 분리되어 있다. 예배와 교육과 성도의 교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선교와 봉사는 교회와는 분리되어 있는 교회의 사회봉사 기관인 “디아코니아”에서 진행된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분리된 데에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상황이 있었고 그리고 그에 대한 신학적 응답의 결과였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의 독특한 관계로 “디아코니아”가 체코 국내의 많은 인도주의적인 사회봉사 기관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이 되면서 구조적으로 “디아코니아”가 감당해야 될 교회의 선교와 봉사의 역할이 교회 공동체와 상호작용을 할 수 없게 된 문제점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체코교회의 문제점을 이지 슈토렉과 나는 공감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중풍병자 이야기에 주목하게 되었다. 교회의 디아코니아의 활동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가리워진 상황이 바로 체코교회의 현실이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진지한 디아코니아 실천이 오늘 체코교회의 문제의 해결임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네 친구가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까지 운반을 하였듯이 디아코니아 실천은 단지 봉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만찬의 식탁에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체코교회의 문제에 대한 공감과 성경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지 슈토렉과 나는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에서 체코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 댜블리쩨 디아코니아 활동 그리고 꼬빌리시 교회의 교구 안에 있는 8백명의 환자와 천여명의 의사와 직원이 거주하는 한 마을 같은 보흐니쩨 정신병원을 향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활동들은 날마다 발전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들인 꼬빌리시의 한국 교우들에게 “여러분들은 우리 체코교회의 천사들입니다. 이곳은 여러분들의 집입니다. 이 교회를 지켜주십시오. 다른 곳으로 떠나지 마십시오.” 마지막 말을 남기고 2003년 6월 28일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 6년 그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그에게 목회와 목회자의 삶과 개혁교회와 그 신앙을 배웠고 그리고 췌장암과의 일년 반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면서 일상생활의 리듬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흐트러트리지 않던 그로부터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크게 배운 시간이었다.
“이 목사, 의사 선생님이 이제부터 내 인생이 이전 보다 더 좋아진대.” 중요한 내장 기관에 퍼진 암을 떼어낼 수 없어 그대로 봉합을 하고 퇴원한 후에 평상시처럼 입가에 싱글벙글 웃음을 띄며 나에게 한 그의 농담이었다. 그의 농담은 앞으로 남은 짧은 자신의 인생의 기간이 이전 보다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질병이 그의 육신을 죽어가게 하였지만 그의 일상생활과 그의 마음과 정신은 더 생동감을 느꼈다. 언제 부턴가 그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는 욥의 고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설교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의 눈으로 이해한 성서의 깊이에서 흘러나왔다.
팔 다리의 모든 근육이 풀어져 걷거나 설 수 없게 되자 그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마지막 순간까지 휠체어에 앉아 설교를 하고 성만찬을 집례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이었던 월요일 6월 23일 그는 당회에 참석하여 세시간이 넘게 중요한 일들을 마무리하였다. 마지막 안건으로 그는 당회에 교회 정원을 담장처럼 둘러싸고 세월질 납골당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요청하여 당회는 그것을 결정하였다. 당회를 마치고 저녁 10시가 훌쩍 넘어 분주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사를 나눌 때 그는 내게 해맑은 미소를 띄며 “나는 고향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 보다 한국형제 자매들이 있는 이곳에 남고 싶다.”고 하였다.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8)
땅끝까지이르러/(26)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이야기 (8)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유창한 한국말로 꼬빌리시 체코 교우들이 인사를 건네면 자연스럽게 “도브리-덴” “뎨꾸이” 대답을 하는 한국 교우들이다. 예배가 끝나면 예배당 뒤쪽에 마련된 커피와 차 그리고 다과를 나누며 서로 인사를 나눈다. 간단한 대화 이상을 넘어가지 못하는 언어의 장벽을 느끼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다.
타민족이 어울려 사도들의 고백대로 “거룩한 공회” 즉 하나의 교회를 고백하고 실천하는 현장이 바로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이다.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해 체코와 한국인 신자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어려운 에큐메니칼 신학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일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함께 예배 드리기 위해 한국인들은 이상한 쉰내를 참아야 하고 체코인들은 역겨운 마늘냄새를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신앙을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체코 기독교인들과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예배와 설교 등 모든 교회생활의 차이를 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체코 기독교인들은 예배예전을 마치 우리나라 유교의 제사의식처럼 예전의 순서와 절차 그리고 그 내용들을 소중하게 다루기 때문에 감성적 요소가 많은 한국 교회들의 예배에 익숙한 우리 한국 교우들에게는 지루하고 건조하게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한국인들의 예배는 그들에게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한국인들에게 체코 목회자의 설교는 무언가 내용은 있는데 결론이 없이 느껴지고 반대로 체코 교인들에게 나의 설교는 너무 선동적으로 느껴진다.
서로 경쟁하듯 신앙생활을 하는 개교회주의에 익숙한 한국인 교우들에게는 교구중심의 체코교회가 나태해보이고, 늦은 저녁시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교우들 가정을 방문하는 나의 목회활동을 체코교우들은 신기하게 생각한다.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민족이 하나의 교회를 고백한다는 것은 단순히 피상적으로 국적과 생김새와 피부색깔과 문화의 다름을 넘어 실제의 삶에서 사고방식, 삶의 습관 심지어 신앙의 방식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신앙의 경험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고 수용하는 법을 배워가는 우리들은 초교파로 모이는 한국인 교우들 내부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정한 규범을 형성하였고 나아가 활기 없이 죽은 교회 같지만 천년이 넘는 기독교역사의 뿌리에서 흘러나와 끈적끈적 이어져 가는 체코 교우들의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에 꼬빌리시의 한국인들은 다른 한국인들 처럼 유럽교회를 경솔하게 판단하지않는다. 오히려 연약한 체코교회이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의 저력을 미래의 세계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하고 호흡하려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프라하 꼬빌리시의 한국 교우들은 내가 존경하는 체코 선교사들이며 나의 선교 동역자들이다. 이들이 불씨가 되어 체코개혁교도들의 가족모임처럼 변해버린 체코교회가 자신들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세상을 향해 스스로 열린 공간 “오픈 하우스”가 되어 세상이 새롭게 교회를 인식하고 복음에 대해 그들이 마음 문을 연다면 그것이 바로 체코선교이다.
600년의 체코개혁교회의 역사에서 네 차례 큰 박해를 겪는 동안 체코개혁교도들은 생존을 지상목표로 삼고 살아왔기에 유대인 게토처럼 체코개혁교도들의 게토가 되어버린 체코교회에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가족이 되어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체코교회에 던지는 선교적 의미가 적지않다. 우리교회의 일거수 일투족이 300여개의 체코전국교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리고 이웃나라 독일에서 년간 한 두 차례 독일 목회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우리교회를 방문하여 이런 저런 모습을 살펴보고 돌아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에서의 활동이 더욱 무거운 책임감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