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5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5.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Kostel Panny Marie před Týnem)
첼레뜨나 거리(Celetná ulice)에서 북동쪽 지역에 있는 오른쪽편의 구시가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까지 걸어간다. 여기서 회랑이 있는 두개의 고딕건물 뒤로 띤 앞의 마리아 교회당의 거대한 탑이 우뚝 솟아 있다. 당시 고딕 교회당의 중심적이고 대표적인 프라하 성당으로 까렐 4세가 1365년에 세웠다. (1511년에 완성됨) 앞에서 이야기했듯이(I/2) 1360-69년에 독일 개혁교회 설교가 콘라드 발트하우저(Konrad Waldhauser)와 그가 죽은후 끄로므녜지쉬의 얀 밀리츠(Jan Milič z Kroměříže)가 이 교회에서 활동을 – 얀 밀리츠는 당시 일이(Jilji) 교회서부터 신부였다 (I/7) – 하였다.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과 교황의 면죄부 판매 문제에 대해 대학에서 논쟁이 일어났던 시대에 얀 후스(Jan Hus) 선생과 야꼬우벡(Jakoubek) 선생이 이 성당의 설교자들이었다. 면죄부 판매 시위를 벌렸던 후스의 젊은 추종자 세 사람이 띤 교회당입구 모퉁이에서 처형당하였다. (I/8).

띤 성당은 체코 종교개혁시대에 가장 유명한 후스파 교회당이었다. 당시 후스파의 가장 높은 공식기관인 „돌르니 꼰지스또즈(dolní konzistoř)“(I/3)가 띤 교회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카톨릭파의 가장 높은 공식기관인 „호르니 꼰지스또즈(horní konzistoř)“는 프라하 성의 성 비뜨 성당에 위치하고 있었다. 1427년부터 두 기관의 교회의 대감독으로 체코국가 회의가 1435년에 선발한 얀 로끼차나 (Jan Rokycana) 선생이 1427년부터 띤 앞의 마리아 교회의 행정 관리자 및 수석 설교자가 되었다. 1436년에 로끼차나는 띤 교회로부터 바젤에서 열린 공의회에 후스파 협상 사절로 파송되었다. 바젤 공의회에서 그는 양종성찬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고 1437년에 다시 한번 더 발표하였다.

띤 성당에서 얀 로끼차나 선생의 장례식이 있었다.(1471) 후에 여기서 1484년 부터 후스파 신부로 임명된 미란돌라의 루찌안(Lucian z Mirandoly) 비숍의 장례식이 있었다.(1493) 1601년 여기서 루돌프 2세 황제 시대에 유명한 덴마크 천문학자 개혁파 티코 브라헤 (Tycho Brahe)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후에 귀족들의 반란 (* 번역자 주 – 30년 전쟁의 시작) 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당한 대학 총장 얀 예세니우스 박사 (Dr. Jan Jesenius)가 설교를 하였다. 티코 브라헤의 무덤이 오늘날까지 교회당의 중앙 제단 앞 오른쪽 기둥 옆에 보존되고있다.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 1457-1471)의 통치시대에 띤 성당 지붕의 중앙부에 움푹들어간 곳에 금 성찬잔과 그 아래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한다“라고 씌여있는 왕의 형상이 놓여있었다. 반 종교개혁 시대에 이 후스파 심볼들이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성모 마리아 형상으로 교체되었다. 성모 마리아상 뒤의 금으로된 후광은 금 성찬잔을 녹여 만든것이다.

개혁파 설교가인 얀 로끼차나 선생을 띤 교회의 설교가로 언급한 것과 관련해서 그의 주도 아래 „그리스도 율법“을 사랑하는 새로운 후스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슬로바니에 있는 새도시 후스파 수도원(III/6)의 관리자인 로끼차나의 조카 제호즈 끄라이치(Řehoř Krajčí)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서클은 다시 초대 사도 교회를 모범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믿음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열성가들은 프라하를 떠나 1457년에 잠베르크의 쿤발트 (Kunvald u Žamberka) 에서 체코 형제단 (Jednota Českých bratří) 이라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먼저 로끼차나를 설득하여 그와 함께 떠나 자신들의 목회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뻬뜨르 헬치쯔끼(Petr Chelčický)의 글들을 접하였고 그리고 이지 왕의 북 체코 통치시대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은 빌라 호라 전투때까지 체코 종교개혁운동의 주요 성당이자 중심이 되었다. 이웃나라 독일에서 1519년 얀 후스 선생의 종교개혁 유산을 이어받은 새로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등장이후 프라하에서 루터의 추종자 토마스 뮌쩌(Tomáš Müntzer)가 환영을 받았다. 1521년 베들레헴 채플(I/8)과 띤 성당에서 독일어로 설교하고 체코어로 통역되었다. 띤 교회에서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몇몇 후스파 설교가들이 번갈아 가면서 설교하였다. 1523년부터 하벨 짜헤라(Havel Cahera)가 그리고 1539년부터 바츨라브 미뜨마넥 (VáclavMitmánek) 박사가 양종성찬파 꼰지스또즈 (* 번역자 주 – 후스개혁파 최고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두 사람들은 페르디난드 1세의 반종교개혁 시대에 프라하에서 추방되었다. 다음으로 1542년부터 후스파 꼰지스또즈의 책임자가된 얀 미스또뽈(Jan Mystopol +1568)이 띤 교회의 유명한 관리자가 되었다. 루돌프 2세 황제 대헌장 발표이후 엘리아쉬 슈드(Eliáš Šúd 1609 – 1614)가 관리자가 되었고 1618년 프리드리흐 팔쯔끼(Fridrich Falcký)를 왕위에 즉위 시킨 이지 디까스뚜스(Jiří Dikastus 1614-1621)가 마지막 관리자였다. 빌라 호라 전투 승리 이후 드레스덴에서 망명자로 생을 마쳤다. (I/3)

Subscribe
Notify of
guest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